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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2)
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2)
“이런 건 왜 파나 했는데, 다 쓸 데가 있는 거더라고.”
와타나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면서 세르게이가 말했다.
던전 입구 오두막 자판기에서 파는, 구원자용 수갑이다.
“이걸 던전 밖에서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힘 스탯 무식하게 찍은 녀석들은 수갑도 끊어버리니까.”
선발대 전원이 순순히 수갑을 찼다.
이준기에게 온몸을 난자당한 사토 켄이치도 수갑을 찬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준기와 직접 만나본 적이 있는 김창수는 물론, 한국인 전원이 이준기에게 물어볼 것이 많은 눈치였다.
그러나 적으로 만난 자리다.
아무도 선뜻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결국, 설국헌이 나섰다.
김창수와 고윤아를 차례로 쳐다보고 나서 눈빛으로 동의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주··· 준기 씨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설국헌 교수님.”
“나··· 나를 알아요?”
“교수님 모르는 사람이 한국에 얼마나 될까요? 교수님 특강 동영상, 저도 많이 봤죠.”
“고··· 고맙군요.”
“궁금하신 것이 많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따가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이따가··· 라면?”
“후발대까지 정리해야죠.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 그렇군요.”
“지금은 제가 질문을 드려야 합니다. 대답은 짧고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알겠소.”
“지금 러시아를 침략한 이 조직, 한일 연합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한일 연합에 한국인 구원자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일곱 명입니다.”
“전부 아시겠군요?”
“그렇지요. 최현, 장대한, 유지호, 진태형··· 거기에 우리 세 사람.”
“그렇다면, 총괄 역은 브릴리언트의 최현?”
“그렇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국 협회 차원에서 참가한 거죠? 한상태 회장이 직접 지시한?”
“맞아요.”
“외국 침략입니다. 아무리 협회 차원에서 추진하는 거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받아들일 생각을 한 거죠?”
“마피아 처단이라는 구실이 일단 먹힌 것 같고··· 연해주 수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연해주 수복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만주, 연해주··· 우리나라 사람들 로망이니까.”
“아니, 수복(收復)이라뇨? 연해주가 언제 우리나라 땅인 적이 있어야 수복이라는 말이 그나마 말이라도 되는 것 아닙니까?”
“부끄럽지만··· 그런 선동이 먹히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이런 침략 전쟁을 사람들이 찬성한다는 말씀입니까?”
“국민들한테는 비밀이죠. 구원자들은···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지금 협회는··· 한상태 회장이 완전히 휘어잡은 상태요. 반대 목소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오. 게다가 한상태는 청와대 쪽하고도 연결이 되나 보더라고요.”
“청와대?”
“경호실장 차진철이 배후라는 말이 있소.”
“하아··· 차진철.”
이상덕에게 받아먹은 뇌물로 강남에 빌딩을 샀다는 소문이 났던 사람이다.
이상덕이 몰락한 지금은 한상태에게 붙은 모양이다.
“교수님. 이건 침략 전쟁입니다. 우크라이나에 쳐들어간 러시아와 뭐가 다릅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더 악랄한 짓입니다.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 사람들이라도 많이 살고 있죠.”
“아··· 알아요. 대의명분 없는 싸움이라는 거.”
“그런데 왜 여기에까지 오신 겁니까?”
“한상태 회장을 거역할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소. 내가 뭘 어쩌겠소?”
“죽는 것보다는 한상태 회장을 거역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소. 부끄럽지만···”
이준기는 고개를 돌려 김창수를 보았다.
김창수도 명백하게 동요하는 눈빛이었다.
그가 먼저 이준기에게 말했다.
“이준기 구원자님!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김창수 구원자님··· 29레벨에 여길 오시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저··· 저는··· 마피아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린다고 해서 온 겁니다. 정말입니다.”
“직접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조직 같아 보이십니까, 이 조직이?”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준기는 고윤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고윤아 구원자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실 수는 없겠죠?”
고윤아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이준기는 김창수와 설국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 모두에게 묻는 겁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시겠지만, 그래도 돌아가실 수는 없는 거잖아요?”
설국헌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한상태 회장 때문에··· 돌아가는 건 어려울 것 같소만.”
“이해합니다. 구원자를 은퇴하는 거라면 모를까, 구원자 활동을 계속하겠다면 한상태 협회장과 척을 지기는 어렵겠죠.”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침략군을 막아내는 수밖에요.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계속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후발대를 처리한 다음에요.”
*****
원래의 후발대는 일본인 구원자 다섯 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한일 연합군이라고는 해도, 일본인 구원자가 훨씬 많다.
10명 중 3명이 한국인이라면, 연합군 전체 구성비와 얼추 맞는 비율이다.
야스다 대신 최현이 투입되는 바람에, 통역이 필요해졌다.
결국 일본어가 유창한 장대한이 따라오는 것으로 결정 났다.
인원수가 제한된 던전도 아니어서, 일본인 4명에 최현과 장대한까지 6명이 후발대를 이루게 되었다.
입구의 오두막에서 인원 점검을 마치고, 최현은 오두막에서 던전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나선 그들은 화들짝 놀랐다.
1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 그들이 서 있었다.
극동 마피아 잔당이라는, 마리아 보로닌과 부하들.
그런데 그녀의 오른쪽에 선 사람은 굉장히 낯이 익다.
어디에서 본 얼굴인지 최현이 기억하기 전에, 장대한이 외쳤다.
“이··· 이준기!”
최현은 물론 일본인 구원자들도 놀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일본에서 오신 분들까지 놀라시다니··· 제가 악명을 좀 떨치고 있나 보죠?”
‘원형경기장’ 던전을 함께했던 최현.
놀라움보다 반가움이 앞서는 기분으로 최현은 물었다.
“이준기 씨, 무사하셨군요!”
“네. 어떻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계신 거죠?”
“보시다시피.”
그렇게 말하면서 이준기는 바실리사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최현이 물었다.
“마리아 보로닌의 부하가 됐다는 겁니까?”
“지금은 얘기가 될 것 같지 않군요. 일단 싸워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이준기는 양손에 단검을 쥐었다.
최현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안에 마법 막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기 씨! 뭐 하는 겁니까?”
“말씀하셨듯이, 저는 극동 마피아 쪽에서 싸울 생각입니다. 덤비시죠.”
“농담하지 마세요. 이준기 씨가 왜···”
“전, 제국주의가 싫어요.”
“네?”
머뭇거리는 최현 대신, 뒤에 서 있던 일본인 하나가 앞으로 달려 나왔다.
최현을 제치고 앞으로 나온 그의 손에서부터 단검 하나가 이준기를 향하여 날아왔다.
쿠나이.
고리가 달린 단검으로, 고리에는 줄이 매여 있다.
쿠로사와 카츠.
하시바의 부하로 한국에 쳐들어왔던 침략자 중 하나다.
물론, 역사가 바뀐 지금 그는 한국 대신 러시아에 와 있다.
이준기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서, 날아오는 쿠나이를 향해 오른손의 단검을 내밀었다.
쿠나이의 줄이 프로스트바이트의 검날에 걸리면서 감겼다.
이준기가 줄을 잡아당기자, 쿠로사와가 앞으로 딸려 나왔다.
“비겁한 건 여전하구나.”
“이준기, 죽어라! 다들 덤벼!”
쿠로사와는 쿠나이를 버리고 양손에 쌍 단검을 들었다.
쿠로사와를 따라 다른 일본인 구원자들도 앞으로 달려 나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해 하면서 장대한이 최현에게 물었다.
“이준기? 우리가 이준기를 공격해야 하는 겁니까?”
“나··· 난 관두겠소. 그래야 한다면 말이지···”
“무슨 얘깁니까, 최현 대장님?”
“이준기와 싸워야 한다면··· 차라리 구원자를 은퇴하겠다는 말이오.”
최현은 오두막을 향해 몸을 돌렸다.
퇴각 페널티도 가벼운 던전이다.
아니, 퇴각 페널티가 어떻든 일단 도망가야 한다.
이준기가 적이라면.
그런데 오두막 문을 러시아 남자가 막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도망은 안 돼.”
*****
38레벨의 쿠로사와 카츠를 포함, 네 명이 이준기 하나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이준기의 타격에 쓰러진 멤버는 뒤로 빠져서 힐링 포션을 마셨다.
상처가 아물면 다시 이준기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렇게 다시 덤벼든 상대에게 이준기는 다시 칼침을 먹였고,
부상을 당한 상대는 다시 대열을 빠져나와 힐링 포션을 마시는 패턴이 계속되었다.
쿠로사와 카츠만 부상 없이 이준기를 계속 상대하고 있었다.
“으하하하, 이준기! 나는 아직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이준기는 달려드는 다른 상대를 베어 넘기고 대답했다.
“말은 정확하게 해야지. 내가 공격을 하지 않은 거다. 너만 말야.”
“뭐라고?”
주춤하며 물러서면서 쿠로사와는 생각했다.
과연, 이준기는 지금까지 자신의 칼날을 받아치기만 했을 뿐, 한 번도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주변의 부하들은 칼을 맞고 전선을 드나들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만 쌩쌩했다.
“날··· 가지고 놀고 있다고?”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런 거겠지.”
“이··· 건방진 놈!”
소리를 내지르며 이준기를 향해 돌격했지만, 이준기는 쿠로사와의 칼날을 가볍게 흘리고 옆으로 돌았다.
이준기가 한 바퀴를 완전히 돌자, 그의 옆으로 붙었던 부하 하나가 칼을 맞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크아아악!”
쓰러진 남자는 바닥을 기어 전선을 이탈했다.
인벤토리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서 허겁지겁 들이키는 것이 보였다.
눈으로는 여전히 이준기를 훔쳐보면서, 그는 힐링 포션을 마셨다.
“힐링 포션을 꽤 많이 사 가지고 왔나 봐.”
“뭐야?”
“좋은 자세다. 하지만 힐링 포션이 아무리 많으면 뭐 하나?”
“놀리는 거냐!”
“상대를 가려야 하는 거다. 그게 제일 중요한 거지.”
“이 새끼!”
이젠 검술이나 격투술이라고 부를 만한 동작이 바닥이라도 난 것인지,
쿠로사와는 단검 두 개를 식칼처럼 부여잡고 이준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로사와는 이준기의 발에 걸려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러면서도 이준기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준기가 스핀을 마치자, 또 다른 일본인 구원자가 옆구리를 붙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인벤토리가 무제한인 것도 아니고, 이제 끝이 보인다.”
쿠로사와를 제치고 다른 구원자를 칼로 베어 넘기면서 이준기가 말했다.
아무리 해도 맞힐 수 없는 상대방을 향해, 쿠로사와의 공격 동작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또 공격이 빗나가자, 쿠로사와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져 굴렀다.
쓰러진 쿠로사와를 향해 이준기가 성큼 걸어서 다가왔다.
세 명의 부하들은 전부 이준기 주위에 쓰러져 있었다.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그들의 손에 힐링 포션은 들려 있지 않았다.
이준기의 말대로, 힐링 포션이 다 떨어질 때까지 그들은 맞고 치료하기를 반복한 것이다.
“저··· 저리 가!”
쿠로사와는 나자빠진 자세에서 팔다리로 기어 뒤로 물러났다.
이준기는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뭐··· 뭐냐!”
이준기가 품에서 암기라도 꺼내나 싶어 쿠로사와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준기의 손에 쥐어진 것은 물통이었다.
무한대로 물이 나오는, 던전용 물통.
이준기는 음료 광고라도 찍는 것처럼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캬아! 시원하다. 운동을 좀 길게 했더니 목이 마르네.”
핏자국은 고사하고, 이준기의 옷에는 베인 자국 하나 없다.
쿠로사와의 귓가로 땀이 흘렀다.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물병을 인벤토리로 되돌리고, 이준기는 다시 양손에 단검을 쥐었다.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는 이준기.
쿠로사와는 아까처럼 네 발로 뒷걸음질 쳤다.
“워··· 원하는 게 뭐야? 나한테 왜 이래?”
“그 대사를 왜 네가 하지?”
“뭐··· 뭐라고?”
“침략자는 너희들이야. 싸움에 졌다고 해서 피해자 행세하지 말란 말이다. 역겹다.”
“무··· 무슨 말이냐!”
“태평양 전쟁 때도 그랬지. 핵폭탄 두 개 맞았다고 너희들의 죄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거냐? 침략 전쟁을 일으켜 놓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그런 개소리를 들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