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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1)
Episode 46: 제국주의의 앞마당 (1)
“하아? 정말로 세··· 명인 거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얼굴에 가득 띄우고, 사토 켄이치가 어눌한 영어로 물었다.
바실리사가 대답했다.
“너희들도 알고 있던 거잖아?”
“마리아 보로닌···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항복해라. 목숨은 살려주겠다.”
“뭐···라고?”
사토가 주변을 향해 한국어로 외쳤다.
“내···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죠? 저 여자가 지금 나한테 항복하라고 한 거.”
설국헌이 대답했다.
“네.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싸움은 천천히 해도 되니 제가 얘기를 좀 해볼까요?”
사토가 빠르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합니다, 설 교수님. 제가 영어가 짧아서··· 저 여자가 제정신인지 파악이 안 되네요.”
설국헌이 선발대 다섯 명의 맨 앞으로 나섰다.
상대방은 세 명. 짧은 금발 머리의 여자가 선두에 서 있고, 뒤로는 두 남자가 시위(侍衛)하듯 서 있다.
연갈색 머리의 백인은 얼굴을 그대로 내놓고 있지만, 언뜻 동양계로 보이는 다른 남자는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저는 설국헌이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입니다. 그쪽은 마리아 보로닌, 맞습니까?”
“네, 맞아요.”
조금 망설이다 대답한 것 같다고, 설국헌은 느꼈다.
“보로닌 씨 사진은 많이 봐뒀는데, 실물로 뵈니까 훨씬 미인이시군요. 접대용 멘트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이런 얘기는 하도 들으셔서 식상하시겠지만.”
“고맙군요.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려고 앞으로 나오신 건 아닐 텐데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잡담 몇 마디쯤은 괜찮잖아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저도 한 가지 묻고 싶네요. 한국 분이 여기에는 웬일이시죠?”
“그건···”
설국헌은 말문이 막혔다.
하긴, 마리아 보로닌이나 극동 마피아 입장에서는 그게 궁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해 설국헌은 준비해 둔 대답이 없었다.
“이건, 침략이에요. 일본은 사할린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치고, 한국은 왜죠? 한국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 맞죠?”
“맞아요. 저는 한국 사람이 맞습니다.”
“그래서,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마리아 보로닌 씨. 당신은 마피아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두죠.”
“마피아는 범죄자. 저희는 범죄자를 단죄하러 온 것뿐입니다.”
“그래요? 왜 남의 나라 범죄를 단죄하러 오신 거죠? 한국이나 일본에는 범죄자가 없나요?”
“그··· 그건···”
“게다가, 지금 그쪽에서 하는 일은 범죄자 단죄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쪽 분들이 오신 이후로, 거리의 불량배들은 오히려 숫자가 는 것 같단 말입니다.”
“아··· 그게 말입니다···”
“불량배들을 혼내주고 나서, 경찰서에 넘기는 게 아니라 부하로 들이신다고 들었어요. 그게 범죄자 단죄인가요?”
“그··· 그게···”
영어를 잘 못 하는 사토라도, 설국헌이 상대방의 논리에 우물쭈물하는 건 보였다.
사토가 설국헌을 옆으로 밀치면서 앞으로 나왔다.
“마리아!”
“뭐죠?”
“싸우자!”
“하하하!”
바실리사가 웃어젖히자, 사토는 벙쪄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짧게 비웃고 나서, 바실리사는 설국헌에게 말했다.
“이봐요, 한국 분. 저분한테 얘기 좀 해주세요. 살 기회를 차버리지 말라고요.”
씩씩거리는 사토를 일본인 힐러, 와타나베 아카리가 말렸다.
설국헌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보로닌 씨. 저도 궁금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한테 모습을 드러낸 겁니까? 기습할 수 있었잖아요?”
“그건 간단합니다.”
“간단?”
“망설이거나, 잘못 생각할 여지를 두지 않으려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당신들을 기습해서 이겼다면요? 기습 때문에 졌다고 생각할 거 아녜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3차, 4차 침략군도 상대해야 하겠죠.”
설국헌은 기가 차서 외쳤다.
“하! 정말입니까? 그렇게 자신이 있어요? 세 명인데?”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여드리죠.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이보세요, 보로닌 씨. 저는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 교수 하던 사람이에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일 것 같아요? 고양이에게 덤비는 쥐 모양이란 말입니다. 레벨이 많이 높으신가 봐요? 우리 쪽도 그렇게 만만치는 않은데.”
“학자셨군요? 교수님은 살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지, 증언해 주세요. 나머지 분들은 전부 죽여드리죠.”
“하하··· 어이가 없어서···”
“안 무서워요?”
사토 켄이치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봐, 러시아 여자. 그러니까 네놈들이 아주 세다, 이거야? 그래서 우릴 이길 수 있다고?”
“그렇지 않다면, 여길 왜 들어왔겠어요?”
“용기가 가상하다. 특별히 기회를 주지. 일대일로 해주마.”
사토의 말에, 설국헌이 끼어들었다.
“사토 상, 그렇게 하면 도발에 걸려드는 꼴 아닙니까?”
“마리아 보로닌이 레벨이 아무리 높아도 39예요! 저도 39입니다.”
“저 여자가 마리아 보로닌이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에? 무슨 얘기예요? 마리아 보로닌의 부하라면 레벨이 더 낮겠죠.”
“반드시 그러라는 법은 없죠. 게다가, 용병일 수도 있고.”
“용병이라고요?”
저벅.
여자의 뒤에 서 있던 동양인이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판단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어디에서 들어본 목소리인지 떠올리려고, 설국헌은 기억을 뒤적거렸다.
앞으로 나온 남자는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
선글라스를 벗고 나서 마스크를 벗으려던 것이었지만,
그가 선글라스를 다 벗기도 전에, 설국헌의 뒤에 있던 고윤아가 소리를 질렀다.
“이··· 이준기!”
*****
고윤아의 외침에, 한일 연합군 선발대 전원이 한마디씩 했다.
“이준기라고?”
“살아있었단 말야?”
“이준기?”
“이준기 구원자님?”
김창수의 목소리에, 이준기는 마스크를 벗으며 대답했다.
“김창수 구원자님, 오랜만입니다.”
츠캉.
사토 켄이치의 손에 일본도가 쥐어졌다.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검을 내려뜨린 채로, 사토가 이준기에게 말했다.
긴장감에 날이 선 목소리였다.
“정말이냐? 네놈이 이준기라고?”
와타나베 아카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맞아요. 이준기입니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과 정확하게 일치하네요.”
“넌 가만히 있어, 와타나베!”
“죄··· 죄송합니다.”
사토가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준기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냐? 네놈이 이준기 맞냐고!”
“그래. 내가 이준기다.”
“사··· 살아 있었다고?”
“역시 구라모토··· 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군.”
“비··· 비행기에서 추락했잖아!”
“그래. 그랬지. 구라모토 덕분에.”
“그··· 그런데, 어떻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나는 딱 한 가지만 너에게 묻겠다.”
“뭐··· 뭔데?”
“정말로 일대일을 원하나?”
짧은 시간 동안, 사토 켄이치의 머릿속에 수천 개의 생각이 스쳐 갔다.
도톤보리에서 일본인 구원자들을 학살했다는 소문.
네네키리마루의 야마시타 시게루를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죽였다는 이야기.
솔로잉으로 던전을 닫고 다닌다는, 믿지 못할 풍문도 들었다.
그 모든 것에 더해, 이제는 비행기에서 추락하고도 살아남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로 일대일을 원하느냐고, 그렇게 물었다.”
이준기는 실종 당시, 38레벨로 한국 랭킹 2위였다.
그 이후로 렙업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
비공식이지만, 세계 최고속 렙업 기록을 보유한 그다.
실종된 지 두 달이 가까이 지났다.
도대체 어디까지 레벨을 올렸을까?
이제 겨우 39레벨을 단 자신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다.
“대답해라. 너만 죽이면, 다른 사람들은 항복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이준기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사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같은 국적의 와타나베 아카리의 표정에만 안타까움이 있었을 뿐, 한국인 구원자들은 동정이 아니라 경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토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준기는 여전히 냉정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토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후··· 후발대가 있다. 우리가 전부가 아냐.”
“조금 늦어질 거다. 야스다가 병원에 실려 갔거든. 병원 다음에는 유치장에 가겠지만.”
“야··· 야스다가?”
“야스다가 없으니 대타를 구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하시바가 직접 온다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고···”
“네놈 짓이냐?”
“좋을 대로 생각해라.”
“네··· 네가 왜 러시아 마피아 쪽에 있는 거지?”
“용병이라고 해두지.”
“요··· 용병이라면··· 돈 때문에?”
“하하.”
“돈이라면··· 우리가 더 많이 줄 수 있다.”
“단어를 잘못 썼군. 용병이 아니라 자원봉사라고 해두지.”
“너··· 넌 한국인이잖아. 도대체 왜 러시아를 도··· 돕는 거지?”
“질답 시간은 끝났다. 앞으로 나와라.”
“자··· 잠깐만···”
“앞으로 나와.”
사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와타나베 아카리조차도, 곧 죽을 사람을 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사··· 사토다. 사토 케··· 켄이치.”
“사토 켄이치, 덤벼라.”
이준기의 양손에 단검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사토 켄이치는 검을 꽉 쥐고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빈틈이 없다.
주저하는 그를 향해, 이준기가 외쳤다.
“선수를 양보하는 거다. 한 번뿐인 기회란 말이다.”
사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들어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 앞의 쥐가 이런 느낌일까.
사토는 이준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간다.”
“자··· 잠깐!”
사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준기를 한 번 흘끗 보고, 사토는 뒤를 돌아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이미 그와 갈라선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한국인들은 그렇다고 쳐도, 와타나베까지 경멸조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흙 보호막!”
사토가 보호막을 시전하는 것을, 이준기는 그냥 지켜봤다.
흙먼지가 사토의 주위를 돌며 보호막을 형성했다.
“준비됐으면 덤벼라.”
“으아아아!”
고함인지 비명인지, 사토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이준기를 향해 덤벼들었다.
가볍게 옆으로 비켜서면서, 이준기는 왼손의 단검 자루로 사토를 둘러싼 흙바람의 구체(球體)를 살짝 건드렸다.
1회의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흙 보호막’.
단검 자루에 닿자마자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등을 보이고 지나가는 사토의 옆구리로 단검 ‘프로스트바이트’가 스쳐 지나갔다.
우아하게 반 바퀴 스핀을 완성한 이준기는 자연스럽게 사토를 보며 돌아섰다.
“으아아악!”
적에게 등을 보인 사토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았다.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지만, 상처가 깊지 않았다.
비명에 고함을 섞어 내지르며 사토는 다시 이준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기는 돌진해온 사토를 뒤로 흘리면서 다시금 반 바퀴 스핀을 돌았다.
자연스럽게 돌면서, 그는 허공을 뚫고 지나가는 사토의 옆구리를 가볍게 벴다.
돌진해온 상대를 가볍게 흘려보내면서 칼침을 한 번씩 놓는 꼴이, 투우라도 하는 것 같다.
“브··· 블러!”
스킬을 시전하는 사토를, 이준기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놔두었다.
흙 보호막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리는 스킬, 블러.
회피율과 마력 저항을 극적으로 높이는 스킬이다.
피가 흐르는 옆구리에 정신 집중을 놓치면서도, 사토는 결국 스킬 시전을 마쳤다.
사토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잔상과 본체의 모습이 한꺼번에 겹쳐 있는 것처럼, 사토 켄이치라는 존재와 세상의 경계선이 모호하게 변했다.
“덤벼라.”
“으아아아!”
이준기를 향해 실루엣이 모호해진 사토가 달려들었다.
이준기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반 바퀴 스핀을 돌면서 한 차례 그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사토의 뒤에 선 이준기는 그의 뒤통수를 왼손으로 잡고 밀었다.
근처의 나무에 사토의 몸뚱이가 강렬하게 부딪혔다.
나무 몸통에 몸이 겹쳐진 사토에게 이준기의 단검이 다시 날아들었다.
이래서는 높아진 회피율도 의미 없다.
사토의 허리를 향해 날아든 프로스트바이트.
순간 척추가 얼어붙는 듯한, 묵직한 통증이 사토를 강타했다.
“끄어억!”
잠깐 동안의 경직이, 프로스트바이트의 발동 효과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그는 몰랐다.
0.5초 동안 나무를 껴안고 있던 사토는, 다음 순간 바닥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