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82화 (18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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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5: 극동에 부는 마파람 (6)

Episode 45: 극동에 부는 마파람 (6)

저택의 응접실.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하시바는 허겁지겁 도착한 최현을 보고 손짓을 했다.

옆자리에 앉으라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최현은 하시바가 지정한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쉬는 날 아니었던가.

조금 전까지 딸들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야쿠자 졸개가 나타나서 ‘하시바 님’의 호출을 알렸다.

“무슨 일이야?”

“잘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불안한 마음으로 달려왔건만, 의외로 하시바의 표정은 차분했다.

생각해보면, 이 자는 표정이 원래 이렇다.

인상이 구겨지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그건 대개 누군가를 협박하려고 할 때다.

그러니까, 하시바 세이이치로라는 자는 자신의 표정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상황과 상대방에 맞추어, 표정을 의사소통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남자다.

감춰야 할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바람에 뒷수습을 해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뼛속까지 정치꾼이군. 속에 능구렁이가 여러 마리 들어있다는 게 이런 놈을 두고 하는 얘기겠지.’

최대한 하시바와 눈을 맞추지 않으면서, 최현은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분부대로 대령했으니 명령만 내려달라는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게 하고 싶었다.

눈을 맞추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시바와 눈을 맞추면, 불쾌한 정도를 벗어나 공포감이 몰려왔다.

이 저택에 들어오던 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학살을 저지르던 것을 목도한 다음부터다.

“최 선생, 오늘은 비번인데··· 미안하게 됐소.”

“아··· 아닙니다, 하시바 님. 말씀하십시오. 저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내 부하들 중에도 그런 놈은 많지 않은데.”

“제가 해야 할 일이 생긴 겁니까?”

“바로 맞췄소. 미안하지만··· 오늘 차원문, 최 선생이 수고 좀 해주시오.”

“네? 오늘 차원문이라면···”

“이거 말이오.”

하시바는 최현 쪽으로 서류 하나를 밀었다.

차원문 개요와 공격대원 명단이 표시된 문서다.

어리둥절한 최현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하시바가 선수를 쳤다.

“명단에 최 선생 이름은 없죠. 원래 최 선생은 오늘 비번이었으니까.”

“네, 그렇습니다.”

“야스다 겐지. 그 녀석 대타를 부탁하겠소.”

“야스다 상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 미친 녀석이··· 지금 경찰에 잡혀갔소.”

“경찰···이라고요?”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오. 이 나라에 경찰이 어디 있냐는 의문이라면, 대단히 타당한 의문이니까. 그런데 사실이오. SSF가 개입되었거든.”

“SSF?”

“들어본 적 없소? ‘국경 없는 구원자회’라는 조직이오. 국제 봉사단체라고 주장하는 구원자 조직이지. 조직원이 100명은 될 거요. 구원자가 그 정도 있다는 말이오. 장난이 아니지.”

“그 조직이 야스다 상을 공격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 하니 짜증이 나는군. 야스다 그 미친 녀석이 SSF 로고가 박힌 구급차를 공격했거든.”

“네?”

“그랬더니 정말로 구급차에서 구원자가 내렸다는군. 둘이 일대일 대결을 벌여서 깨졌다는 거요. 함께 있던 부하 녀석이 직접 보고 와서 생생하게 증언한 내용이지. 일대일 대결에서, 그것도 여자한테 지고 나서, 뒤늦게 나타난 경찰의 테이저건을 맞고 실려 갔다는 얘기요. 우습지 않소? 으하하하.”

하시바의 표정을 보자, 최현은 따라 웃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하시바는 계속했다.

“여기 경찰이야 썩어빠졌으니, 야스다 녀석을 빼내는 것은 일도 아니오. 문제는 오늘 일정이 틀어졌다는 거지.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최 선생이 야스다 대신 후발대를 리드해주시오.”

“제··· 제가 가능할까요?”

“그게 무슨 말이오? 최 선생도 야스다와 같은 40레벨이잖소. 자신이 없소?”

“아··· 아닙니다.”

“마리아 보로닌의 정확한 레벨은 모르지만, 40레벨이 못 되는 것은 확실하오. 그쪽은 부하들까지 합쳐서 서너 명에 불과한데, 우리는 최 선생까지 합쳐서 열 명이란 말입니다. 열 명···”

“알겠습니다.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오늘 목표는 알고 있죠?”

“네?”

“차원문 봉쇄. 그리고··· 잉여 부품의 제거.”

하시바가 씩 웃어 보이자 최현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이··· 잉여 부품이라고요?”

“최 선생, 이거 왜 이러시오? 얼마 전에 히데요리 얘기한 거, 기억 안 나시오?”

최현은 하시바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서··· 김 탱커를 들여보낸 것 아닙니까? 미끼···로 말입니다.”

“잘 기억하시는구만.”

“미끼라고 하셨잖습니까? 잉여 부품··· 제거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최 선생은 낚시를 안 하시는구만, 맞소?”

“네··· 맞습니다.”

“미끼를 던져서 물고기를 잡았는데, 운 좋게도 그 미끼가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고 칩시다. 그렇게 되면 낚시꾼이 미끼를 방생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요? 네 역할은 끝났으니 살려주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아···”

“미끼라는 건 일회용이오. 던져버리면 그만이지.”

“···”

“가서, 미끼를 던져버리고 오시라는 말이오. 미끼라는 건 한 번 입질에 걸리면 너덜너덜해지는 거지. 쓸모가 없단 말요.”

“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간신히 질문을 짜내고, 최현은 하시바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얼굴이 일그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최현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만에 하나··· 최 선생이 그걸 못 해준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하··· 하겠습니다!”

*****

“혹시 아까 보셨어요? 야쿠자 구원자가 당하는 거?”

바실리사가 물었다.

차원문에 진입하자마자, 그들은 오두막을 나와 걷고 있었다.

“그럼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서두르는 거잖아요.”

“후발대 진입이 지연된다는 얘기죠?”

“네. 야스다가 당했으니, 하시바는 다른 사람을 대타로 투입할 겁니다.”

“잘 아시나 봐요, 하시바라는 사람.”

“그럼요. 유명하거든요, 그 사람.”

거짓말은 아니다.

한국 침략 당시, 하시바를 고니시에 비유하는 이유는 한둘이 아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이 앞서는 야마시타가 가토 기요마사와 닮았듯이,

신중하게 앞뒤를 재고 난 다음에야 행동에 나서는 하시바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비슷했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하시바는 그렇게 유명해졌다.

아직은 아니지만.

“국경 없는 구원자회라는 단체··· 정말 활동하는 단체였군요.”

“저도 직접 눈으로 본 건 처음입니다.”

물론, 미래에서 돌아온 이후만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의외인 것도 사실이다.

국경 없는 구원자회도 여느 구원자 길드와 마찬가지로 칭찬보다는 욕을 먹고 사는 단체였다.

아까 그 장면이 SSF라는 단체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문아린이라는 구원자의 일면을 보여줬을 뿐이다.

“나도 조금 감동 받았는데. 구원자로서 그런 단체에서 일한다면 뿌듯할 것 같아.”

“그렇다면 세르게이, SSF에 가입해 보는 건 어때? 내가 너한테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

세르게이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쪽이 훨씬 재미있을 거야. 그건 확실하지.”

“보람 얘기하는 것 아니었나?”

“보람도 있고.”

“잠깐···”

이준기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면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흙바닥이 끝나고 풀이 촘촘히 나기 시작하는 지점에, 흐릿한 발자국이 나 있었다.

*****

김창수가 여러 차례 정중하게 부탁했지만, 사토 켄이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 39레벨이란 말입니다. 지금 절 가르치려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하시바 상이 지시한 대로, 이번 임무를 제대로 해내려면···”

“하하하, 한국에서는 탱커가 벼슬인가 봅니다. 김 상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선발대 조장은 바로 접니다.”

“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죠. 저는 단지, 조금 조심해서 움직이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도 제 앞가림은 하는 사람입니다. 쓸데없는 오지랖은 사양하겠습니다.”

김창수의 옷자락을 살짝 건드리는 사람이 있어 쳐다보니 설국헌이었다.

설국헌은 김창수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니 그냥 놔두라는 표정이었다.

“제가 야스다 그 녀석보다 레벨이 딱 하나 낮아서, 지금 선발대 조장이나 하고 있으니 우스워 보이죠?”

사토가 한국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창한 한국어다.

“한국말을 잘하니까 이런 일을 다 당하네요. 미끼들 길잡이라니···”

“미끼라뇨? 그건 말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고윤아가 항의하자, 사토는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말이 좋아 선발대지. 미끼 맞죠. 마피아 녀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아니, 그렇게 표현하시면 우리가 무슨 소모품 같잖아요. 쓰고 버리는···”

그 말이 맞아,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사토는 참았다.

마리아 보로닌의 극동 마피아 잔당을 싹쓸이하고 나면, 너희들은 토사구팽이다.

구시렁거리고는 있지만, 사실 사토는 선발대에 자원했다.

가만히 있어도 차출될 순서여서 선수를 친 것도 있지만, 토사구팽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냥개를 삶는 작업에 한 몫 낄 수 있으면 더욱더 좋고.

사토는 웃으면서 고윤아에게 말했다.

“윤아 씨라고 했던가요?”

“네.”

“윤아 씨 레벨이 32 정도 되죠? 일한 연합군 전체에서 거의 최저 레벨 아닙니까?”

고윤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사토가 말을 이었다.

“최저 레벨이 뭘 할 수 있을까요? 미끼 역할이라도 맡겨주면 감지덕지해야죠. 안 그래요?”

보다 못한 설국헌이 끼어들었다.

“사토 상, 우리 다 같이 선발대인데··· 사이좋게 지내야죠. 그렇게 만드는 게 공격대장 역할 아닙니까?”

“하하, 설 교수님. 역시 배운 분이라 다르시네. 뭐···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는 그만두죠.”

“이거, 제가 시작한 겁니까? 김 상이 시작한 거죠!”

사토는 김창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생각해보니까 윤아 씨한테 미안하네요. 윤아 씨는 ‘거의’ 최저 레벨인 것이고, 진짜 최저 레벨은 저기 계시니까. 29레벨이라니··· 이건 뭐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게 압도적으로 최저 레벨이군요.”

“사토 상이 우리 중에 ‘압도적으로’ 최고 레벨인 것은 다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이제 그만하시죠.”

“설 교수님, 저도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탱커에게도 역할은 있죠. 김 상이 저레벨이라고 제가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탱커와 공격대장은 분명히 다른 역할입니다. 김 상이 자꾸 선을 넘으려고 하니까 제가 그만···”

“알겠습니다, 사토 상. 그 정도로 하시죠.”

“좋아요, 교수님. 제가 참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토 상.”

사토 켄이치는 김창수를 빤히 쳐다보며 땅바닥에 발을 찍었다.

얼어붙은 땅바닥, 게다가 풀이 빽빽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게나마 발자국이 났다.

“이렇게 세게 밟아도 발자국이 거의 안 보입니다. 뭘 조심해서 걸으라는 겁니까?”

김창수는 입을 닫았다.

의기양양해진 사토가 한마디를 더했다.

“저라고 추적술이나 잠행술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오늘은 그런 게 필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사토 공격대장님.”

고개를 숙인 김창수의 태도에 흐뭇해진 사토는 노래하는 듯한 말투로 모두에게 말했다.

“자, 다들 가보실까요? 날씨도 추운데 어디 아늑한 데서 후발대를 기다리죠.”

앞장서는 사토의 등을 바라보며 걷는 김창수를 향해, 설국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수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설 교수님. 제가 성격이 원래 그래서···”

“아녜요. 신중하면 좋지요. 그렇지만 오늘은··· 사토 상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사토 켄이치가 아니라 김창수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는 것을, 그들은 조금 후에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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