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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5: 극동에 부는 마파람 (4)
Episode 45: 극동에 부는 마파람 (4)
“시작됐군요.”
창문에 선팅이 잔뜩 된 방탄 차량 안에서, 야스다가 말했다.
김창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역시, 하시바 상이 예측한 대로 진행되는 거군요.”
“하시바 님이야말로 지략의 천재죠.”
“네, 네. 하시바 님의 지략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김 선생, 오늘 작전 개요는 잘 숙지하고 있지요?”
“물론입니다. 저와 함께 진입하는 선발대의 목표는, 마리아 보로닌 일당을 차원문 안으로 유인해 들이는 겁니다.”
“모두 다섯 명이죠.”
“네. 사토 상, 와타나베 상, 설국헌 님, 고윤아 님, 그리고 저. 이렇게 다섯입니다.”
“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사흘 전에 들어오셨다면서요?”
“네. 열심히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훌륭합니다.”
차량 앞자리에 앉은 부하가 야스다에게 패드를 건넸다.
선발대 명단이 나와 있었다.
- 사토 켄이치. 일본. 히토츠다케 길드. 공격대장. 39레벨.
- 김창수. 한국. 프리스타일 길드. 탱커. 29레벨.
- 와타나베 아카리. 일본. 타임리스 길드. 힐러. 33레벨.
- 설국헌. 한국. 프라이드 길드. 딜러. 33레벨.
- 고윤아. 한국. 브릴리언트 길드. 딜러. 32레벨.
명단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야스다가 말을 이었다.
“와타나베 아카리 양은 훌륭한 힐러입니다. 서포트가 충분할 테니, 좋은 탱킹 기대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와타나베 양은 우리 일본 쪽 원정대 멤버 중에는 최저 레벨이죠. 하지만 한국 팀으로 치면 중간은 가죠?”
“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쪽은 협회 운영이 엉망이라서 그런지 고레벨 구원자들이 너무 잘 죽어요. 그래서 우리 일본에 비해서 상위랭커들 레벨이 많이 낮은 거 아닙니까. 뭐, 앞으로는 새로 협회장을 맡은 한상태가 잘해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선생은 한일 연합군 최저 레벨이지만 탱커입니다. 책임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하시바 님도 기대가 커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제 차원문 진입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마리아가 저 깡패들을 전부 쏴죽일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러시아 놈들끼리 서로 죽이는 거니까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지금 나갈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다른 차에도 연락은 해야죠.”
“알겠습니다.”
“안에 들어가시면,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고 마리아 일당이 진입했다는 메시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후발대는 놈들이 진입하는 걸 보고 곧바로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야스다 상은 후발대로 오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니면 제가 여기 왜 나와있겠습니까?”
“하시바 님은···”
“우리 정보망에 의하면, 마리아 보로닌은 기껏해야 30레벨대 후반이에요. 저는 40레벨입니다. 45레벨이나 되시는 하시바 님이 들어갈 이유가 있습니까?”
“시··· 실례했습니다.”
“탱킹에 집중하시되, 사토 상의 지시에 잘 따라주세요. 선발대 공격대장이니까요.”
“네.”
야스다가 전화를 거는 동안, 김창수는 상태창과 인벤토리를 체크했다.
*****
극동 마피아 졸개들의 대부분은 그저 동네 깡패일 뿐이지만, 간혹 총기류를 다뤄본 자들도 있었다.
주로 군인이나 경찰이었던 그들은 총알 밥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전의 몇 차례 총격전에서 이미 드러난 것처럼, 반격은 소용없었다.
“어디야? 조금 전과 위치가 조금 다른데?”
“세 명이잖아!”
“아니, 저쪽 건물에서 쐈던 녀석 얘기하는 거야.”
“옥상에서 달리고 있나보지.”
“옥상이 아닌데···”
“그딴 거 계산할 겨를이 있으면 응사나 해!”
“제대로 반격하려고 위치를 가늠하려는 거잖아!”
“흥. 군 출신이라고 자랑하는 거냐.”
“그냥 군이 아니라 스페츠나츠다.”
“말끝마다 스페··· 컥!”
총성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마피아는 종아리를 잡고 굴렀다.
다리는 못 쓰게 되겠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듣던 대로, 마리아 보로닌 일당은 다리를 노려 쏘는 모양이다.
마리아 보로닌도 극동 마피아다.
야쿠자들에게 굴복당해 총알 밥으로 나서는 이들도 극동 마피아.
말하자면, 식구들이다.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마피아 졸개들 중에도 마음속으로는 마리아 보로닌의 승리를 비는 자들이 많았다.
“사람들의 피를 빠는 너희들은 쓰레기다! 마피아에 부역하는 일 따위는 그만두고, 이제 일본 기업의 정식 사원으로 새 출발 하는 거다!”
2차 침략군이 상륙한 직후, 야쿠자 녀석들은 마피아 졸개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일장 연설을 했다.
일본 기업이라고 말하지만, 실체는 야쿠자 사업장이다.
마피아에서 야쿠자로 뱃지를 바꿔다는 것뿐이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국제전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깡패들 사이의 나와바리 싸움에 불과하다.
피차 잘 아는 진실을 굳이 미사여구로 가리려는 일본놈들을 마피아 졸개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마피아의 마수로부터 선량한 시민들을 구원한다는 미명하에, 극동 마피아의 잔가지들은 무참하게 썰려 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와중에 블라디보스토크 시민들의 삶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블라디미르 아쉬코프가 사망하고, 극동 마피아의 하부 조직은 분열되었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쁜 마피아에게서 시민들은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들어온 야쿠자들에 의해 상황은 역전된다.
야쿠자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한 마피아 끄나풀들은 이전보다 더 악랄하게 시민들을 쥐어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우크라이나에서 돌아왔다는 극동 마피아의 잔당, 마리아 보로닌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또다시 급변한다.
마피아 졸개들은 마리아 일당을 막느라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힐 시간을 내지 못했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해서 야쿠자와 마피아가 공멸해버리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다.
그런데 왠지 상황이 정말 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전황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이준기 일행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민들도, 극동 마피아 졸개들도, 침략해온 한일 연합군 멤버들도, 진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동료가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위치를 바꿔가며 뛰어다녔지만,
스페츠나츠 출신이라는 마피아 졸개도 결국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며 울부짖으면서도 그는 어쩐지 해방감을 느꼈다.
‘마피아 짓은 은퇴인가···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이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는 쉴 수 있을지도···’
의식이 흐려지면서 그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
김창수 일행이 차원문에 진입한 지 10여 분이 지났다.
야스다를 비롯한 후발대 멤버들은 근처 골목 안쪽으로 차량을 이동 시켜 대기 중이었다.
하시바의 지시대로, 선발대를 배웅하고 돌아가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근처를 한 바퀴 크게 돌고 와서 숨어 있다.
마피아 졸개들이 설마설마하면서 얘기를 나누던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
이들은 악랄한 짓거리를 하려고 대기하는 중이다.
총을 맞았으나 죽지 않은 총알받이들을 어딘가에 가져다 버리려고, 뒷좌석을 빼버린 승합차 두 대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리아 보로닌 그년은 왜 다리를 쏘는 거야? 헤드샷을 날리라고. 그렇게 원샷원킬 해주면 우리가 이 고생을 안 하잖아.”
차량 앞자리에 앉은 부하가 굽신거림이 느껴지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야스다 님.”
“그래도, 자기 식구다 이건가? 쏴 죽여버리려니까 마음이 아파?”
“나와바리를 다시 빼앗으면,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버러지 같은 마피아 조무래기들이지만, 이렇게 총알받이로 쓰는 거, 우리도 아깝다고. 야쿠자 놈들을 대량으로 러시아에 실어나를 수도 없는 법이고, 잡일을 시키려면 마피아 졸개들도 좀 살려놔야 하는 건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라고.”
“물론입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리에 총 맞고 안 죽으면 다냔 말이야. 다리에 총 맞은 절름발이를 어디에 쓰냐고. 아마 우리가 죽여주는 걸 고맙게 생각하는 놈도 있을걸? 사무라이라면 쓸모가 없어졌을 때 죽을 각오는 해야 하는 거지. 러시아 상놈들은 역시···”
“지당한 말씀입니다.”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어. 러시아 놈들은 말야. 마피아뿐 아니라 군이고 경찰이고 다 그렇지.”
멀리에서부터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커지며 달려왔다.
야스다 겐지가 창밖을 쳐다보며 앞자리 좌석을 주먹으로 쳤다.
“이건 또 뭐야? 어떤 개자식이 자꾸 앰뷸런스를 불러?”
앞자리의 부하가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피아 버러지들, 좀 죽게 놔둘 것이지.”
“저 앰뷸런스, 그냥 날려 버릴까?”
“네?”
“화염구 한 방 먹여주면 터져버리지 않을까?”
“야스다 님, 그건 그러지 않으시는 것이···”
야스다는 이죽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으스댔다.
“그렇겠지? 뉴스에 나오겠지? 그래도 비밀 작전인데, 뉴스에 나오면 하시바 님도 구라모토 협회장님도 곤란해하시겠지?”
“아··· 그것도 그렇겠지만···”
“다른 이유가 또 있나? 설마 너··· 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럼 왜?”
“저도 소문으로만 들은 거지만··· 구급차를 보호하는··· 구원자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뭐가 어째? 러시아에 그렇게 할 일이 없는 구원자가 있다고?”
야스다가 눈을 부라리자, 부하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NGO 느낌을 물씬 풍기는 단체의 홈페이지가 나와 있었다.
- www.ssf.org.
“이 단체··· 들어본 적 없으십니까?”
“이건 또 뭐야? 국경 없는 구원자회?”
“네. 꽤 유명한 단체입니다만.”
“뭐, 국경이 없어? 무슨 장난 같은 이름이야, 이게?”
“국제 봉사단체입니다. 구원자들로 구성된.”
“봉사단체? 설마 무료봉사라는 건가? 그게 말이 돼? 구원자가 무료로 뭘 한다고?”
“저도 믿기 어렵지만, 아무튼 그런 단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 구급차에 국경 없는 뭐시기, 그놈들이 타고 있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기 보시죠··· 구급차 뒷쪽에 SSF라고 로고가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뒷문이 들려서 잘 안 보이기는 하지만.”
“그딴 놈들이 나를 막겠다고? 이런 미친···”
“고··· 고정하십시오, 야스다 님.”
“그런 미친 얘기를 듣고 나니,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어떤 개자식들인지 몰라도 내가 다 죽여버리겠어!”
“상대가 몇 명인지 모르시잖습니까?”
“국경 없는 뭐시긴가에 구원자가 그렇게 많다고? 세계 각지에 한 무더기씩 보내고 구원자가 남아돌아서 블라디보스토크 깡촌에도 여러 명을 보낼 정도로?”
“설마 그렇지는 않겠죠. 하지만 만에 하나···”
“그래. 지금 저 차에 몇 놈이나 타고 있는지, 그걸 내가 확인 시켜 주겠다는 말이다.”
“야··· 야스다 님!”
말릴 새도 없이, 야스다 겐지는 차 문을 열어젖히고 바깥으로 나왔다.
가까이 갈 것도 없다.
야스다 겐지는 마음속에 이미지를 그리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외쳤다.
“화염구!”
슁!
총알 같이 뭔가가 날아와 야스다 겐지의 손을 직격했다.
“헉!”
손을 거둬들이며, 야스다 겐지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확인했다.
작은 조약돌.
화염구 시전이 끊겼다.
날아온 조약돌의 속도를 보아, 일반인이 아니다.
야스다는 조약돌이 날아온 구급차 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어떤 새끼냐! 죽을래?”
구급차 바깥으로 한 사람이 발을 내디뎠다.
딱 한 사람, 그것도 여자다.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모르겠지만, 스타일이 마음에 드는 동양인 여자다.
러시아 땅에서 예쁘장한 동양인 여자를 보자, 야스다는 잠깐 상황을 망각했다.
‘아니, 그게 아니지. 꽤 예쁘기는 하지만···’
야스다는 건너편의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일본어지만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다.
말투에서 무슨 뜻인지가 다 묻어날 테니까.
“죽고 싶나? 우리 일에 상관하지 마라.”
뭐라고 말하는 듯, 여자의 입이 움직였다.
‘무슨 말이지? 아··· 아차!’
야스다 겐지의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