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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5: 극동에 부는 마파람 (2)
Episode 45: 극동에 부는 마파람 (2)
2월 15일 화요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
자동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서자 한글로 또렷하게 쓰인 자기 이름이 보였다.
커다란 몸집에 작은 팻말을 들고 있는 상대방의 모습이 조금 웃겼다.
‘환영합니다. 김창수. KOREA.’
남자에게 그가 꾸벅 인사를 하자, 상대방도 황망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저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마중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김창수 탱커님.”
“반갑습니다, 장대한 구원자님.”
“블라디보스토크는 처음이신 거죠?”
“처음입니다. 사실은··· 제주도 빼고는 비행기를 타본 것 자체가 처음이에요.”
“정말입니까? 그건 너무 뜻밖이네요.”
“바쁘게 살다 보니···”
“구원자가 바쁠 건 또 뭐 있습니까? 아··· 하긴, 김창수 구원자님은···”
“밥값 해야 하니까요.”
“김창수 구원자님이라면, 정말 열심히 렙업하셨죠. 이준기 정도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김창수 구원자님 렙업 속도는 정말 세계기록 급이었으니까요. 실례지만 지금 레벨이?”
“그저께··· 29레벨 달았습니다.”
“정말 빠르시군요.”
장대한은 뭔가를 기억하려는 듯 머리에 손을 짚었다.
“그··· 원래 길드가··· 그··· 뭐였더라.”
“서울연합 말씀하시는 건 아닐 거고, 구룡회?”
“아, 맞다. 네, 구룡회. 이제 거기 출신 멤버 중에는 단연 톱이신 거죠?”
“하하··· 그렇게 표현하시니까 쑥스럽네요. 석주 형님보다 이제는 제가 레벨이 더 높기는 하죠.”
“최석주··· 그 사람 평판이 별로 좋지 않던데···”
“아뇨. 오해십니다. 석주 형님 알고 보면 사람 좋아요. 정도 많고···”
“아이템에 정이 많다고 하더군요.”
“아이템이야 다들 궁한 거고요.”
“아무튼 잘 오셨어요. 렙업에도 좋고, 아이템 모으기에도 좋아요. 저도 얼마 전에 무기를 바꿨다니까요.”
“아, 그래요? 저도 좀 운이 따라주려나요.”
“제가 직접 챙겨드리겠습니다! 일본놈들이 채 가지 못하게··· 하하하!”
“요즘 실세인 프라이드 길드 분이 직접 나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길드 얘기는 또 왜 하세요? 다 같이 한국 협회 소속 구원자인 거죠.”
“저는 프리스타일 길드 소속이니까요. 예전의 서울연합. 한상태 회장님이 안 좋게 보셔도 할 말이 없죠. 그런 사람을 길마로 두고 있었으니까.”
“한 회장님을 뭐로 보시고 그런 얘기를 하세요. 한 회장님 그런 분 아닙니다. 이제 이상덕 시절과는 달라요. 모두가 협회의 깃발 아래 똘똘 뭉치는 거죠!”
주차장에 도착한 그들은 차에 탔다.
짐을 트렁크에 싣고, 보조석으로 타면서 김창수는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 장대한 구원자님은 예전에 서울 유명 길드 마스터셨잖아요. 직접 운전까지 해주시고··· 이거 너무 황송하네요.”
“다 지난 얘기죠. 하긴··· 그러고 보니, 우린 둘 다 서울 중소길드 출신이군요. 이거, 친해질 것 같은 예감이 팍팍 드는데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죠. 안전띠 매시고요··· 시내로 직접 가겠습니다.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시내에 도착하면, 딱 저녁 먹을 때네요. 제가 새우 요리 잘하는 데를 알고 있습니다.”
*****
자동차 키를 넘겨주고, 장대한은 차에서 내렸다.
식당 창문으로 흘끗 보니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반쯤은 혼잣말이지만, 장대한은 김창수도 들으라는 투로 말했다.
“아··· 저 원숭이 놈. 그렇게 말렸는데···”
“누가 와 있나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그냥 우리 둘이 저녁 먹겠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한국 사람도 아니면서 도대체 낄 데 안 낄 데를 구별을 못 하네요. 낄끼빠빠라는 말을 가르쳐줘야 하나.”
“누굽니까?”
“블라디보스토크에 원숭이가 한 마리밖에 더 있겠어요? 하시바 세이이치로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 하시바 상. 그런데 그분이 왜 여기에?”
“새로 충원되는 멤버에게는 직접 인사를 하겠답니다. 제가 그렇게 말렸건만···”
“하하. 말도 안 통하는 일본 사람과 같이 저녁을 먹으려니, 체할 것 같은 생각도 조금 드네요.”
장대한은 김창수의 옷자락을 잡아끌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이건 말씀드려야겠네요. 저 사람··· 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무서운 사람입니다. 마음의 준비는 조금 하셔야 될지도 몰라요.”
“네? 그런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조금 섬뜩한데요.”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면, 제가 말을 잘한 거군요. 바로 그겁니다. 섬뜩해요. 이제 좀 적응하나 싶어도 저놈 인상 쓰는 걸 보면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아요.”
김창수는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종업원이 자리를 안내했다.
과연 원숭이의 외모, 게다가 키도 작고 몸집도 왜소했다.
풍채나 위엄이라는 말과는 상관없는 세상의 주민이다.
그러나, 거구의 장대한이 오줌 지릴 것 같다고 표현한 대상이 바로 이 사람이다.
김창수는 황망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김창수입니다. 하시바 회장님이시죠?”
하시바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김창수가 손을 잡자, 하시바는 균형 잡기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마구 흔들었다.
“하시바입니다. 처음 만나 뵙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한국말··· 잘하시는군요.”
“배우는 중이지만, 아직 멀었어요. 한국 분들끼리 얘기하시면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하시바는 장대한을 흘끗 노려보았다.
순간, 장대한이 움찔했다.
큰 몸집을 앞으로 굽혀 악수를 청하면서, 장대한이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사령관님··· 오시지 마시라니까··· 피곤하신데 직접 오실 필요가 있나요.”
“하하하. 손님은 맞아야죠. 일기일회. 모든 만남에는 최선을 다하라는 일본 격언입니다.”
“하하··· 일기일회.”
만화책에서 본 것 같다고, 장대한은 생각했다.
‘일본 만화는 좋은데, 일본놈은 정말 싫어. 특히 이 하시바 놈은··· 싫은 게 아니라 무서운 거지.’
모두 자리에 앉자, 코스 요리가 순서대로 서빙되었다.
김창수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여긴 정말 유럽이군요. 오면서 보니까 경치도 그냥 유럽이던데, 요리도 정말 최고급···”
“하하하. 요리가 입에 좀 맞으십니까?”
“물론입니다! 하시바 회장님. 정말 맛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긴 적진 한복판입니다. 일본어로 말하는 거니 누가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별실을 준비했습니다.”
일본어에 능통한 장대한이 통역을 맡고 있었다.
통역을 기다렸다가, 하시바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기본적인 전황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공부를 하시고 오셨겠지만, 빠진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고, 또 현장에서 직접 듣는 브리핑은 또 다르니까요.”
“알겠습니다. 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하시바 회장님.”
“이름은 부르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는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고, 도청 장치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지만··· 또 모르지요. 여기 종업원들은 우리가 다 구워삶아 놓기는 했지만, 요 며칠 사이에 저쪽으로 넘어갔는지 또 누가 압니까? 그런 게 전쟁이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래서, 김 선생. 간략하게나마, 전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경청하겠습니다.”
“일단, 서론은 간단히 하겠습니다. 이곳 극동 지역은··· 뭐 우리 땅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할린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거긴 우리 일본이 개척한 곳입니다. 프런티어 시대 전에는··· 미개인들이 살던 불모지였습니다. 그걸, 태평양 전쟁 끝물에 참가한 소련이 강탈해 간 거죠.”
“아··· 네. 소련···”
역사는 잘 모르지만, 남의 땅을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인의 주장은 역겨웠다.
하지만 참는 수밖에 없다.
김창수는 협회 차원에서 차출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이상덕이 사망하고 한상태가 협회장이 된 지금, 이상덕의 옛 길드 ‘서울연합’ 출신 구원자들은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
이름을 ‘프리스타일’로 바꾸고 외부 인력 영입도 추진했지만, 별 효과는 없다.
‘프리스타일’ 길드가 한상태 협회장의 숙적, 이상덕의 ‘서울연합’이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사할린은, 우리 땅을 우리가 되찾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연해주는 좀 다르죠. 여긴, 톡 까놓고 얘기해서 일본 땅이었던 시절이 잠깐뿐이었으니까.”
“네에.”
“그래서 연해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네, 네.”
“바로, 러시아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하는 거죠. 러시아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정부는 있으나 마나, 마피아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구원자라는 놈들이 죄다 마피아죠. 세상에 이런 무법천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한테는 그냥··· 지옥입니다!”
“그렇군요.”
“조금만 돌아다녀 보시면 아실 겁니다! 여긴 그냥 지옥이에요! 그 지옥에 사는 사람들을 구하러, 우리 일한 연합군이 들어온 겁니다. 사할린에서도 우리는 환영을 받았어요! 당연한 얘기죠. 마피아에게 상납금을 바치느라 등골이 휘어지던 상인들이··· 우리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하긴 그렇겠군요. 마피아에게 상납금을 바치려면···”
“그럼요! 우리는 마피아가 받던 것의 반 정도만 받기로 했습니다. 다들 정말 기뻐하더군요.”
기뻐했다고?
김창수는 동요했다.
상황을 감안해서, 하시바의 궤변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한국에서 듣고 온 얘기와 또 다르다.
마피아를 몰아내고 대신 상납금을 받고 있다고?
마피아를 야쿠자로 바꾸는 것이라면, 그걸 어떻게 해방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하시바와 말싸움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김창수는 동요를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귀담아 상대방의 말을 듣는 척했다.
“사할린에 이어, 우리는 속전속결, 이곳으로 왔죠. 그런데 뜻밖에 저항이 좀 있더군요.”
“그랬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거저로 먹나 했어요. 무주공산이었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극동 마피아가 아주 박살이 나 있더군요. 그래서 제압이 쉬웠어요. 그··· 저택에 살던 그 영감탱이··· 이름이 뭐였더라···”
장대한이 대답했다.
“예브게니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그래요. 예브게니. 그 능구렁이 같은 영감태기가··· 뭐 주전력이 돌아오면 큰 싸움이 날 테니까··· 순순히 보내줄 때 물러나라고 협박을 하더라니까요? 마피아 녀석들이 만만치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주먹, 칼, 총싸움이 아니라 말빨이 그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어요.”
“그렇습니까···”
“아무튼 그 예브게니 영감의 입을 닥치게 하고, 간단하게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장대한이 끼어들었다.
“마리아.”
하시바가 손사래를 치며 장대한의 말을 끊었다.
“그 여자 이름은 잘 기억합니다, 장 회장.”
“시··· 실례했습니다.”
“마리아 보로닌. 우크라이나 전선에 나가 있다더니··· 그 여자가 부하들과 돌아왔어요. 일본인으로만 편성되었던 제1차 연해주 해방군은 그렇게 궤멸됐습니다. 그러니까··· 기습을 당한 거죠.”
김창수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극동 연방 관구는 넓어요. 인구밀도로 보면 그렇게 좋은 시장은 아니죠. 어쨌든··· 일본이나 한국 입장에서는··· 가까운 곳부터 먹어들어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할린 다음에는 여길 먹어야 하는 게 맞아요. 그래서 하바롭스크로도 진출하고··· 김 선생, 아십니까? 하바롭스크가 원래는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큰 도시였다는 걸?”
“아닙니다. 몰랐습니다.”
“저도 알게 된 건 최근이에요. 시베리아 철도··· 그거 종착역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놓이는 바람에 하바롭스크는 죽고, 여기가 살게 됐다는 거죠. 뭐, 흔한 얘깁니다. 그건 그렇고··· 아무튼 마리아 보로닌 그 여자를 상대로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여자가 게릴라 전으로, 그러니까 진흙탕 싸움으로 우릴 자꾸 유도하니까···”
“아아···”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공방전 중입니다. 지역이 넓으니까 전투를 효율적으로 할 수가 없어요. 게다가 또··· 웃기는 게, 여긴 인구에 비해서 차원문이 너무 많아요. 마피아 녀석들이 일부러 안 닫고 놔둬서 그렇다고 합디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차원문을 일부러 방치하다뇨!”
김창수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외쳤다.
악의 근원인 차원문을 닫지 않고 방치한다니.
“맞아요, 김 선생. 얼마나 흉악한 얘깁니까! 마피아는 악이에요! 우리가, 일한 연합군이··· 박살 내버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