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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74화 (17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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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4: 가지 않은 길 (6)

Episode 44: 가지 않은 길 (6)

총알받이 신세라는 걸 가르쳐줬건만, 스가 노리나가는 잔뜩 긴장한 채로 이준기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긴, 당연한 것이다.

오늘 당장 이준기에게 죽어버리면 총알받이 신세가 될 일도 없다.

마피아의 총구는 멀고, 이준기의 주먹은 가까우니까.

스가와의 대화를 마친 이준기가 세르게이와 바실리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 정보는 충분히 모은 것 같아.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지. 첫째, 일본이 러시아를 침략 중이다. 둘째, 블라디보스토크에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셋째, 마리아 보로닌의 반격에 주춤했던 일본이 다시 공세를 준비 중이다··· 적어도 그들은 이대로 물러갈 생각이 없어.”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아니, 이런 일쯤은 예상했어야 했나? 저도 준기 씨처럼 생각을 많이 해봤어야 했는데···”

“나도 이런 건 생각하지 못했어, 대장. 마피아를 쓸어버린 자리에 야쿠자가 들어올 줄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이준기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충분히 봤잖아. 세계는 이미 전쟁터야. 문제는··· 더 악화될 것 같다는 것이지.”

“왜 그렇게 생각해요? 말해줄 수 있어요?”

“구원자라는 신무기가 생겼어요. 그런데 이게 보통의 신무기와는 달라요. 다른 신무기였다면, 그건 강대국들이 독점했겠죠.”

“구원자는··· 어디에나 생기니까요. 아무리 작고 못 사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그래요, 바실리사. 부탄이나 바누아투에도 구원자는 있을 거예요. 인구라든가 여러 가지 변수 때문에 구원자 전력은 나라마다 다르긴 하죠. 그래도, 구원자라는 신무기가 생겼다는 사실은 약소국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기에 충분해요. 핵무기와는 달리, 구원자라는 무기는 소규모로도, 비밀 작전 용도로도 활용이 가능하죠.”

“그래서···”

“주먹을 날리고 싶어도 참고 있어야 했던 그 모든 세력들이 모험을 감행하는 거예요. 카탈루냐 독립도 그렇게 가능했던 거죠. 세계 각지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경 분쟁과 민족 간 갈등은 그렇게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 거예요.”

“알겠어요.”

“영토 분쟁도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러시아나 일본이나, 아니 웬만한 국가라면 영토 문제는 한두 개쯤 가지고 있죠. 구원자를 활용해서 국지전 수준에서 영토 분쟁을 해결하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생각인 거죠. 더구나 일본과 러시아라면, 야쿠자와 마피아 간의 항쟁으로 꾸며버리면 그만이죠.”

세르게이가 물었다.

“이런 질문 해도 되나··· 어떻게 할 거야, 대장?”

“한국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 러시아에 오게 된 것,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려던 것, 전부 다 일본과 관련이 있어. 야쿠자와 함께 일본 세력이 여기로 온다면, 내가 굳이 한국으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군.”

“그렇다면, 당분간 여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래, 세르게이. 당분간은 러시아 신세를 더 져야겠는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상태가 협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옮긴 한국 길드협회 사무실이다.

한상태는 창밖으로 펼쳐진 빌딩의 숲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덕이 공약했던 대로 협회장 선거는 지난 1월 31일에 치러졌다.

광화문 차원문 클리어 이틀 뒤다.

한상태의 단독 입후보.

기권과 무효표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유효표 100%를 득표한 한상태는 당당하게 제3대 협회장 자리에 올랐다.

박충기가 그토록 원하고 도전해왔던 자리.

한상태는 단숨에 꿰찼다.

‘박충기와 나는 깜냥이 다르다는 거지.’

그러나 곧바로 자기혐오가 몰려왔다.

하시바 세이이치로 때문이다.

광화문 차원문 진입 며칠 전, 하시바라는 일본인이 그를 불쑥 찾아왔다.

원숭이같이 생긴 일본놈은 역겨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었다.

이상덕과의 밀약을 공개하면서, 그는 한상태에게 한국 협회를 넘기겠다는 구상을 이야기했다.

원숭이의 손에 들려 오기는 했지만, 하늘이 내린 기회.

한상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밀약에 서명했다.

‘광화문 보상템 양도··· 그 조건은 한 번쯤 강짜를 부려볼걸···’

사상 초유의 A급 던전.

한상태를 포함한 공격대원 대다수가 심하게 다치기는 했지만, 사흘 만에 정리했다.

최초의 A급 던전이라서 배려를 좀 해준 건지, 보상템으로는 전설템이 나왔다.

전설템 하나, 에픽템 하나.

에픽급 방패에 한상태는 관심이 없었다.

이미 전설급 방패, ‘아스트라아제’를 들고 있다.

에픽템 따위, 당연히 관심이 가지 않는다.

문제는 하시바에게 빼앗긴 전설템이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직도 아이템 링크를 시스템에서 지우지 않고 있다.

- 레드 클라우드(Red Cloud)

- 한손 도끼. 전설 등급.

- 근접 공격 시 10의 대미지. 공격 속도 1.5초.

- 투척 시 5~15의 대미지를 최대 5명에게 입히고 마지막 타격 이후 2초 만에 손으로 돌아옵니다.

- 착용 효과: 민첩성이 5% 증가합니다.

- 발동 효과: 근접 공격으로 유효타를 터뜨릴 경우, 일정 확률로 상대방에게 출혈 효과를 부가합니다. 디버프당 매초 1의 대미지를 입히는 출혈 효과는 최대 5번까지 중첩됩니다.

- 발동 효과: 투척 공격으로 유효타를 터뜨릴 경우, 100% 확률로 상대방을 밀쳐내고 바닥에 쓰러뜨립니다. 밀쳐내는 거리는 숙련도에 따라 증가합니다.

- 사용 효과: 하루 1회, ‘흡연’을 통해 체력을 100% 회복합니다. (진짜 흡연이 아니니 폐암 걱정은 내려놓으셔도 좋습니다.)

이 아이템이 얼마나 좋은 건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무시무시한 발동 효과, 사기적인 사용 효과, 스탯을 올려주는 착용 효과···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투척이 가능하고, 투척 시에 적을 밀쳐낸다.

탱킹용 아이템이라는 얘기다.

출혈 효과를 불러오는 공격이 기본인데, 그게 고정 대미지로 들어간다.

확률 게임을 안 해도 된다는 말이다.

계산대로 사냥을 진행할 수 있다.

‘뭐··· 내가 계산을 해가면서 사냥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좋다는 얘기지.’

그런데 그걸 지금 하시바 세이이치로라는 원숭이가 가지고 있다.

원숭이 손에 토마호크라니, 이게 웬 가당치 않은 농담인가.

‘하지만, 하시바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상덕을 이겼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베팅은 10대 7이었다.

한상태와 이상덕을 넣으면 11대8.

패싸움으로 몰고 갔어도 이기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요소를 빼먹고 생각한 결과다.

그 한 가지 요소란 다름 아닌 일대일 대결이라는 포맷.

그게 아니었다면 베팅이 10대7로 나왔을 리가 없다.

나현우, 박건우, 장대한, 한소미는 어느 쪽으로 베팅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일대일 대결은 한상태가 유리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일대일 대결이 가능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시바가 끌고 온 일본인 구원자들의 존재 때문이다.

게다가, 하시바가 한상태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이상덕 쪽으로 일본인 구원자 10명이 가세하는 것이다.

이기기는커녕, 살아나올 수도 없는 함정이었다.

인정하기 싫기는 하지만, 한상태 대신 이상덕이 죽게 된 것은 하시바 덕분이다.

이상덕은 던전 안에서, 구원자 본분을 다하다가 죽은 것으로 발표했다.

공격대원들부터 시작해서, 협회 직원들, 현장에 있던 군인들, 그리고 언론까지 입막음을 해서 이상덕에 대한 공식 사망 처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던전 안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적어도 수십 명이다.

‘어둠 정령을 자폭시켜서 ‘사자의 서’를 발동시키다니. 약은 놈 같으니라구.’

갑자기 사라진 이상덕이 죽었다고 믿는 천진난만한 공격대원은 없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차원문 바깥으로 순간 이동한 이상덕을 보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상덕은 사람 하나를 불태워 죽이고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발악을 했건만, 이상덕은 결국 죽고 말았다.

‘일본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하시바의 예상대로, 이상덕은 일본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그가 약속한 대로, 일본 협회는 이상덕을 죽였다.

이상덕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마법 막대, ‘에번 드림’을 그들은 이상덕의 죽음에 대한 증명으로 가지고 왔다.

한상태에게 보여준 다음, 그것은 이상덕 처단에 공을 세운 일본 구원자에게 상으로 주어졌다고 한다.

‘사필귀정이다.’

한상태는 시계를 보았다.

출근한 지 한 시간이 되어 간다.

‘이제 도착할 때가 됐군. 이번 작전이 잘 되기를 빌어야 하는 건가? 어느 쪽이 나에게 유리한 건지, 도대체 계산이 나오지 않는군.’

*****

2월 8일 화요일 오전 10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로 호화로운 배 한 척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처음으로 밖에 나온 남자는 키가 작은 일본인이었다.

작은 체구로 과장스럽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 그는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문 앞을 가로막은 그의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뒤에 선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최 선생, 어떻습니까, 블라디보스토크는?”

뒤의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공기가 좋군요. 그놈의 미세먼지··· 없으니까 좋네요.”

“이렇게 공기 좋은 곳을 나와바리로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시바 상,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하하.”

최현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시바 세이이치로라는 남자,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에서부터 진담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성미에 안 맞으면 아무한테나 눈을 부라린다.

일본 랭킹 3위라고 들었는데, 하는 짓을 보면 전 세계 랭킹 3위라고 해도 될 지경이다.

“일단, 갑시다.”

그렇게 말하고 하시바는 드디어 길막을 풀었다.

자그마한 남자를 선두로, 여남은 명이 배에서 내려 항구로 진입했다.

“방문 목적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관광이지 뭐겠습니까?”

입국 심사 직원의 물음에, 하시바는 이를 잔뜩 드러내며 웃었다.

하시바를 시작으로, 차례로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유지호가 기다리던 최현에게 말했다.

“최현 대장님.”

“아···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대장이시니까 대장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제 입장을 좀 봐주세요.”

유지호는 한상태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이상덕 지지자다.

이상덕 본인은 아이템 ‘사자의 서’로 죽음을 벗어났고, 강명성은 던전 입구를 강행 돌파하여 빠져나왔다.

살려달라고 울고불고해서 살아남은 것은 유지호뿐이다.

그 굴욕스러운 장면은, 최현을 비롯한 10여 명이 현장에서 목도했다.

“최현 대장님. 도대체 왜 우린 배로 온 겁니까? 부하들은 비행기로 왔다면서요?”

“안전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테러라도 당하면 어쩌냐고.”

“그거, 원숭이 생각이죠?”

“쉿! 그 사람··· 한국어도 할 줄 알아요. 적어도 그 단어 정도는 알고 있을 겁니다.”

“아··· 그렇겠군요. 아무튼, 그거 ‘그 사람’ 생각이잖아요.”

“네.”

“그 사람은 지은 죄가 많아서 테러 걱정을 하는가 본데, 우리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군요. 멀쩡한 비행기 놔두고 배가 뭡니까?”

“돌아갈 때는 비행기로 하겠습니다. 일본 팀은 배로 가라고 하고, 우리는 비행기로 돌아가면 되죠.”

“돌아갈 때요···”

유지호는 한숨을 쉬었다.

“구원자로 각성해서, 다니던 회사 때려치운 것도 좋고, 예전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된 것도 좋은데··· 요즘은 정말 구원자 목숨 파리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정말 매 순간이···”

“유지호 탱커님.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뭡니까? 유지호 탱커님은 이상덕에게 베팅을 했지만, 저는 한상태 협회장을 지지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지에 차출이라니!”

“아··· 하긴 그렇군요. 최현 대장님은 저보다도 억울하시겠군요.”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는 수밖에 없습니다. 집에서 기다리는 공주님들 생각을 하면···”

“하긴, 최현 대장님은 따님들 보고 싶으시겠네요.”

“죽겠습니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뭐 하는 짓인지···”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하시바가 주목을 요청하고 있었다.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일단 식당으로 이동하시고, 환담은 거기에서 계속하시죠.”

하시바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항구를 나와 리무진에 올랐다.

최현은 장대한, 유지호와 함께 두 번째 차량에 탑승했다.

기사 옆자리에는 야쿠자 잔존 세력이라는 러시아인이 안내인 자격으로 앉아 있었다.

최현이 그에게 영어로 물었다.

“후지사와파 사람인가?”

“네. 스가 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스가?”

“스가 노리나가 님.”

“아··· 그게 그 사람 이름이었지. 이번 항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야쿠자.”

“그렇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러시아 마피아가 쳐들어왔다던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최현은 장대한과 유지호를 돌아보며 한국어로 논평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몰라도, 다행이긴 하군요. 모두 다 전멸해버렸다면, 지금 택시를 타야 했을 테니까요. 그랬다면 하시바 저 녀석이 뭘 또 얼마나 요란하게 했을지··· 위험하게 택시를 어떻게 타냐고 했을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군요.”

그때였다.

펑 하는 둔탁한 소음이 귀를 찔러왔다.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바로 앞을 달리던 검은색 리무진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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