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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4: 가지 않은 길 (5)
Episode 44: 가지 않은 길 (5)
“왜 나냐고. 성차별하는 건 아니겠지?”
바실리사의 항의에, 세르게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얼굴은 아마 놈들이 알아볼 거야. 그리고 대장은 동양인 외모라서 아무래도 수상하잖아?”
“쳇. 마약중독자 역할이라니.”
그렇게 말하면서 바실리사는 야구 모자를 머리에 눌러썼다.
평소에도 바른 자세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왠지 여군 같은 느낌의 바실리사다.
야구 모자 하나만 썼는데도 군복을 차려입은 느낌이 들었다.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세르게이가 이준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껌이라도 씹어야 하나?”
“그러게. 너무 모범 시민 느낌인데. 이래서야 마약 사러 왔다는 느낌이 전혀 아니잖아.”
세르게이가 이번에는 바실리사에게 말했다.
“바실리사, 껌을 좀 씹으면서, 풍선··· 불어보면 어때?”
“꺼··· 껌까지? 정말 그래야 해?”
“그 모습은 너무 반듯해서 말야.”
“모자 눌러쓰고, 그 근처를 배회하면 되는 거 아냐?”
“범죄자들을 너무 설렁설렁 보는 거 아냐? 걔들도 조심할 건 다 조심한다고. 너처럼 한눈에 보기에도 여경처럼 보이는 사람한테 다가와서 마약 필요하냐고 묻지는 않아.”
“하아··· 껌 좀 씹는다고 달라질까?”
“좋아. 내가 약속하지. 껌을 씹어도 느낌이 영 나지 않으면, 그냥 내가 할게.”
“어, 정말? 약속한 거다.”
세르게이가 내민 껌을 받아 바실리사는 입에 넣었다.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열심히 껌을 씹었다.
“너무 빤히 쳐다보니까 어색하잖아.”
“변장이 제대로 되는지 보려고 그러는 거잖아.”
껌이 충분히 부드러워지자, 바실리사는 풍선을 불어 보였다.
“푸하하하!”
“아하하하!”
세르게이와 이준기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바실리사가 거의 울상이 되었다.
“왜 그래?”
“유치원생이 마약 사러 왔다는 말을 누가 믿냐.”
*****
블라디보스토크 모처의 뒷골목.
해가 진 뒤라서 그런지, 보이는 사람들은 전부 어딘가 불량한 느낌을 풍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량한 모습이라면 역시 이 사람.
모자를 눌러쓰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찢어진 청바지에는 자전거 체인이 늘어져 있고, 아직 겨울인데 반팔 셔츠에 가죽조끼 차림이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양팔에 가득한 문신이다.
이내, 사람이 다가왔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할아버지가 그에게 말을 건 것이다.
“필요한 거야?”
“어? 할아버지네? 물건은 있어요?”
“필요한 게 뭔데?”
“가루요.”
“따라와.”
할아버지를 따라 걸으면서 세르게이는 생각했다.
세상이 막장으로 돌아가니 이제 할아버지까지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나.
아지트에 도착하면 담당자를 혼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한눈에 봐도 수상한, 버려진 공장 건물 같은 곳에 그들은 도착했다.
건물과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초인종을 누르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야?”
“저, 파텍입니다.”
“파텍 영감이군. 손님인가?”
“네.”
“얼굴 보여봐.”
“알겠습니다.”
파텍 영감의 안내에 따라, 세르게이는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바실리사가 가볍게 메이크업을 해주기는 했지만, 알아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한때 극동 마피아의 간부였던 그다.
세르게이는 싸움이라도 걸 것처럼, 최대한 인상을 써가면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가 나왔다.
“그놈, 인상 한번 더럽군. 좋다. 들어와라.”
장소를 알았으니 그냥 들이닥쳐도 상관없기는 하다.
만에 하나, 그들이 세르게이의 얼굴을 알아본다면 그렇게 하기로 이미 정해놓았다.
그러나,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편이 낫다.
세르게이는 파텍 영감을 따라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건물 안은 미로 같이 복잡했다.
원래도 복잡한 건물이었지만, 더 복잡하게 개조한 것 같았다.
확연히 색깔이 다른 벽돌과 시멘트로 메워진 벽이 드문드문 보였다.
지하 1층에 내려와서도 한참을 걸었다.
일부러 길을 돌아가는 게 틀림없었다.
한참을 걸어가다 잠시 멈춰서서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어? 여기가 아닌가? 하하··· 치매가 오려고 그러나. 미안하구만, 젊은이.”
“아아··· 약 기운 떨어져요. 빨랑 좀 가라고요.”
양팔 가득 문신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약쟁이.
약쟁이보다는 마피아가 무서운 파텍 영감은 세르게이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길을 돌아돌아 걸어갔다.
몇 번이나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한 끝에, 그들은 철문 앞에 도착했다.
철문 앞에서 다시 인터폰 통화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또 철문이 여러 개 있었다.
“3번 방이다.”
책상에 앉은 비열한 인상의 사내가 파텍 영감을 한번 쓱 쳐다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3번 방문을 향해 걸어가는 파텍 영감.
세르게이는 그를 따라가는 대신, 안내를 해준 책상 남자의 앞에 가서 섰다.
그 남자가 세르게이를 올려다보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3번 방이라고? 여기에는 모두 몇 명이나 있나?”
“너한테 말한 게 아니다. 신경 꺼, 약쟁이.”
“대답해. 모두 몇 명이야?”
“죽고 싶나?”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일어섰다.
세르게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는 위협적으로 말했다.
“우리 새 보스께서는 참을성이 없으시다. 너 같은 약쟁이 새끼, 그냥 태워버릴 수도 있어.”
“그래? 그놈 이름이 뭐냐?”
“뭐? 그놈? 설마, 보스 얘기하는 거냐?”
“그래. 네놈의 그 새로운 보스.”
“이 새끼가!”
사내는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뒤로 살짝 몸을 젖혀 주먹을 피한 세르게이.
순식간에 오른손을 앞으로 날려 상대방의 멱살을 잡았다.
“어? 어어?”
소파에 앉아 상황을 구경하던 불량배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사내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있었다.
불량배들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뭐, 뭐야! 기습이냐?”
“이번엔 또 누구야!”
세르게이가 왼손으로 모자를 벗었다.
“혹시, 나 아는 사람 없어?”
소파에서 일어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불량배 하나가 소리 질렀다.
“세··· 세르게이 로스코비츠?”
*****
이준기와 바실리사는 세르게이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도착했다.
파텍 영감이 뱅뱅 돌려서 그렇지, 그렇게 복잡한 구조는 아니었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무릎 꿇은 불량배들이 한 줄로 앉아 있었다.
맨 오른쪽에는 전형적인 야쿠자 외모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일단 반항을 해보기는 한 모양이다.
휴지로 틀어막은 코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이준기를 보자마자 세르게이가 말했다.
“왔구나, 대장! 이거··· 대박인데.”
대장이라는 말에, 꿇어앉은 불량배들이 일제히 이준기를 돌아보았다.
세르게이는 별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지만, 이럴 때는 확실히 효과가 있다.
조금 전에 자신들을 상대로 무쌍을 찍은 세르게이.
그가 대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등장했다.
책상을 내리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일단 겁주기 효과를 한 단계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수고했어, 세르게이. 그래, 벌써 뭔가 알아낸 거야?”
“여기 이놈··· 야쿠자야. 야쿠자같이 생긴 게 아니고 정말 야쿠자라고.”
이준기는 야쿠자를 쳐다보았다.
예상하고 있던 가능성의 한 가지가 현실로 나타났다.
일본의 러시아 침공.
구원자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벌어지는 신개념 영토분쟁은 순식간에 전 세계를 집어삼켰다.
기존에 영토분쟁이 있던 곳이라면 예외 없이,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이준기가 경험하고 돌아온 원래의 역사 루트에서는, 러시아가 일본을 침공했다.
일본이 댜오위다오 등지에서 중국과 싸우고 전력이 약해진 틈을 노린 것이다.
이준기의 새로운 선택으로 인해 역사는 바뀌었다.
홋카이도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온 이준기는 극동 마피아를 와해시켜버렸다.
사할린을 모니터링하고 있던 일본 세력이 그 공백을 치고 들어온 것이다.
변수가 있었다면 한국 문제였다.
사할린 나부랭이보다는 훨씬 더 구미가 당기는 먹잇감, 한국.
구라모토 협회장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시킨 모양이다.
생각보다 능력 있는 녀석인 듯.
“예브게니가 연락을 끊었던 것은, 야쿠자에게 굴복한 것이었군.”
“일단 그렇다고 봐야지.”
“일단?”
“상황이 아주 간단하지는 않아.”
“설명을 좀 해줘 봐.”
“극동 마피아가 박살이 나서, 일본이 쳐들어온 것은 맞아. 우선 사할린 접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는군.”
“흠.”
“예브게니 영감이 어떻게든 겁을 줘서 쫓아내려고 한 모양이야. 그런데 야쿠자 놈들도 필사적이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예브게니 휘하의 마피아들과 항쟁을 벌여서 결국 블라디보스토크도 접수했다는 거야.”
“그게··· 예브게니 영감과 연락이 끊긴 시점이겠지?”
“그렇지. 그런데 그다음에 상황이 바뀐 거야.”
“상황이? 어떻게?”
“마리아 보로닌.”
“아하.”
“대장이, 아니 대장과 바실리사가 여기 집행부를 거의 전부 증발시켜 버렸으니···”
이 시점에서 불량배들이 다시금 흠칫하며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세르게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원래는 서열 5위였던 마리아가 극동 마피아 최고 실력자가 된 거지. 우크라이나 전선에 나가 있던 그녀가 돌아와서, 다시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거야.”
“흥미로운 얘기군.”
“블라디보스토크의 80%는 마리아의 극동 마피아가 다시 빼앗았지만, 아직 야쿠자 손안에 있는 나와바리도 있다는 거야. 이곳도 그중 하나고.”
“마리아가 블라디보스토크 전역을 수복하지 못했다··· 그건 중요한 정보다.”
“그렇겠지?”
이준기가 야쿠자를 향해 일본어로 소리쳤다.
“이봐, 야쿠자!”
“네, 넵!”
야쿠자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차렷 자세라도 하듯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이름은?”
“스가··· 스가 노리나가입니다!”
“노리나가(宣長)? 야쿠자치고는 거창한 이름이군.”
“죄···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건 없고··· 몇 가지 질문에 빠르게 대답한다. 알겠나?”
“넵!”
“소속은?”
“삿포로 후지사와파 야시로 구미입니다!”
“후지사와파는 야마토 연합 소속인가?”
“네? 야마토 연합이요? 그게 뭔지···”
“좋다. 네 수준에서는 모를 수도 있지. 다음 질문이다. 너희 조직 보스 후지사와는 구원자냐?”
“네, 그렇습니다!”
“후지사와는 러시아 원정에 직접 참여하고 있나?”
“아닙니다! 후지사와 님은 아직 일본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냥 병력 차출이군. 후지사와파에서는 러시아에 얼마나 나와 있나?”
“현재로서는··· 저뿐입니다.”
“더 있었는데 죽었다는 얘기?”
“넵!”
“좋아. 다음 질문이다. 중요한 질문이니까 잘 생각해서 대답해라.”
“네, 알겠습니다!”
“구원자도 아닌 네 녀석이 어떻게 아직까지 여길 지키고 있지?”
“그··· 그게··· 죄송합니다!”
“그게 대답이야?”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그 뭐냐···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직 공격받지를 않아서.”
세르게이가 끼어들었다.
“거짓말은 아닐 거야. 마리아 보로닌이 극동 마피아의 하부 조직을 전부 꿰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말하자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거지.”
“그 얘기는, 세르게이··· 예브게니 영감이 죽기라도 했다는 거야?”
“맞아. 예브게니 영감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예브게니 영감은 완벽할 정도로 꼼꼼하니까.”
“예브게니는 죽었거나, 아니면···”
“야쿠자 쪽에 잡혀 있든가.”
이준기가 야쿠자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이봐, 노리나가, 예브게니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지?”
“죄···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아··· 너는 정말 조무래기인가 보구나.”
“그··· 그렇습니다!”
“현재 너의 보고 라인은 어떻게 되어 있나? 마약 판 돈을 어디에 상납하느냐는 말이다.”
“보··· 보스 후지사와 님에게 직접 보고합니다!”
“마피아가 반격했다는 얘기는 들었겠지?”
“무··· 물론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에 남아 있다? 그건 네 결정이 아니겠지?”
“보스의 결정입니다! 후지사와 님이 직접 그렇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야마토 연합이 후지사와에게 그렇게 지령을 내린 거겠지. 다시 말해, 일본 협회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면서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야쿠자 따위야 총알받이로 소모해 가면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