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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72화 (17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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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4: 가지 않은 길 (4)

Episode 44: 가지 않은 길 (4)

마츠야마 아키히로, 아니 이상덕이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갔다.

구라모토는 문을 열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었다면, 구라모토는 이상덕을 죽여 태평양에 수장해버렸을 것이다.

한 번도 한국 협회장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는 이상덕이었지만, 그 리더십의 실체는 초라했다.

박충기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의 반대파가 와해되자마자, 다른 사람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상덕의 반대편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자리를 채울 것 같았다.

그래서는 한국지부를 맡길 수가 없다.

이상덕을 돕기 위해 일본이 지금까지 치러야 했던 비용을 생각하면, 그를 내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결정이다.

그러나 구라모토는 매몰 비용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들어갔던 비용은 과거의 것.

앞으로 들어갈 비용만 고려해서 프로젝트의 실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하시바의 계획에 OK 사인을 낸 것이다.

하시바가 제안한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이상덕은 공항 밀실에서 시체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구라모토는 생각을 바꾸었다.

비록 여러 차례 그를 실망시키기는 했지만, 구원자 이상덕은 상당한 실력자다.

정령 소환 스킬을 가진 자는 일본에도 몇 되지 않는다.

그런 아까운 인재를 분노 해소 차원에서 그냥 죽여버린다는 것은 자원 낭비다.

게다가, 사사건건 하시바 세이이치로가 간언하는 대로 하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네놈은 백번 죽어 마땅하다.”

구라모토는 하네다 공항 밀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총을 든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이상덕은 그야말로 죽음 직전에 있었다.

사색이 된 표정으로 이상덕은 애원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 동안 그 표정을 즐기고 나서, 구라모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수족이 되겠다는 생각이 여전하다면···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고··· 고맙습니다!”

이상덕은 무릎을 꿇고 구라모토의 손을 붙잡았다.

“나를 위해서 일해라. 내 부하가 되란 말이다.”

“무··· 물론입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하지만 네놈은 나를 여러 번 실망시켰지.”

“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나도 보험은 필요하단 말이지.”

“네? 무··· 무슨?”

다른 수행원이 여전히 이상덕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로, 수행원 하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상덕은 겁에 질린 얼굴로 수행원과 구라모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구라모토 회장님! 이··· 이게 무슨···”

“죽기보다는 낫지 않느냐?”

팔이 꽉 잡힌 채로, 이상덕은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의 따끔함보다, 주사기가 눌렸을 때의 고통이 더 컸다.

아니면, 그저 공포감에 사로잡혀 느낌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었다.

“무··· 무슨 주사입니까, 이건?”

“탄저균이다. 미군에서 개발한 최신 버전이지.”

“탄저균? 아니 어떻게 그런···”

“후후후. 그렇게 사색이 될 필요는 없어. 이 탄저균은 아주 특별하다. 증상 발현을 막아주는 혈청, 말하자면 해독제가 한 세트로 나와 있지.”

“해독제?”

“가만히 있어. 혈청을 맞지 않으면 넌 오늘 저녁 뉴스에 나오게 될 거야. 세상에 이런 일도··· 아마 그런 코너가 되겠지.”

주사기가 하나 더, 이상덕의 팔에 꽂혔다.

이상덕은 뭔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꿈쩍도 하지 않고 주사를 맞았다.

“이··· 이제 저는 괜찮은 건가요?”

“후후후.”

“구라모토 회장님!”

“그건 한 달짜리야. 한 달 동안은, 탄저균의 발현을 억제해 주지.”

“그··· 그 얘기는?”

“너는 한 달마다 그 주사를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되는 거지.”

“그··· 그렇다면···”

“너는 그야말로 내 수족이 되는 거다. 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한, 나는 잊지 않고 너에게 해독제를 주사해주겠다. 그거··· 아주 비싼 거다. 그만한 가치를 네가 나에게 증명해야 한다는 말이지. 지속적으로 말이야.”

“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말 그대로, 목숨을 빚진 거니까. 아니, 목숨을 빚진 상태로 살아간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한 달씩 내가 네 녀석의 목숨을 연장시켜주는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넌 내 비밀 요원이다. 이상덕은 한국 땅에서 죽었다고 생각해. 일본 이름을 지어라. 필요하다면, 내가 작명가라도 소개해주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구라모토 회장님.”

그렇게 말하면서, 이상덕은 땅을 손에 짚더니 무릎을 펴면서 바닥에서 일어섰다.

기세에 눌렸는지, 그를 구속하던 수행원들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비싼 정장 바지의 무릎 부분을 털고 나서, 이상덕은 구라모토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회장님은 야마토 민족에 대한 내 충심을 정말 몰라주시는군요. 일본 이름이라면,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기특하군.”

“마음속으로 저는 언제나 일본인이었습니다. 왜 저의 충심을 몰라주십니까.”

“그래, 그래. 그건 미안하게 됐네. 그래서, 이제 내가 자넬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마츠야마 아키히로. 그게 내 이름입니다.”

“좋아, 마츠야마.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일본 이름까지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다니, 의외였다.

늘 자신이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다고 얘기하고는 했던 이상덕이었지만, 그건 구라모토에게 잘 보이기 위한 말치레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이상덕은 뼛속까지 일본인이었다.

이상덕을 죽이지 않기로 한 결정이 뿌듯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태어날 나라를 내가 결정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난 나라라고 무조건 충성해야 하나? 그건 아니지.’

정말 힘들게 구한 탄저균, 그리고 해독제.

41레벨이나 되고 정령 소환이 가능한 구원자라면, 그렇게 비싼 비용은 아니다.

게다가 뼛속까지 일본인, 아니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다.

수족같이 부릴 수 있는 수하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훌륭한 투자라고 해야 한다.

문제는 이준기.

이상덕에게는 죽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또다시, 이준기는 그의 그물을 벗어났다.

홋카이도에 추락한 이준기.

공작원 한 명이 차에 태우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그 보고를 받지 못했다면, 이준기가 죽었다고 지레짐작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떨어졌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살아 있는 그를 차에 태웠다고, 그 여자는 분명하게 증언했다.

이준기의 사진을 보고, 자신이 차에 태웠던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준기는 이제 나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겠군. 이 일이 있기 전이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아무튼 내 신변이 조금은 더 위험해진 것이 맞다.’

그러나 구원자 한 명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구라모토 신스케는 일본 구원자협회의 수장이자, 야마토 연합의 숨은 보스다.

그 모든 보호막을 뚫고 이준기가 그에게 도달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구라모토는 에비앙 물병의 뚜껑을 비틀었다.

*****

“난, 대장을 따라간다. 어디를 가든 말야.”

세르게이의 말에, 이준기는 손사래를 쳐 보였다.

“그건 너무 무시무시한 얘긴데?”

“아, 뭐야, 대장. 난 진지하게 말한 건데.”

“아하하. 농담이야, 세르게이. 세르게이가 날 도와준다면 나는 정말 고맙지. 엄청난 전력이니까.”

“정말···이야?”

“이제 조금은 자기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라고, 세르게이. 너 정도면 엄청 능력 있는 구원자니까.”

“그래? 헤헤헤.”

세르게이에 이어, 바실리사가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눈싸움을 포기하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긴장된 표정이 한순간 풀어졌다.

진지한 표정을 버리고 미소를 가득 띄운 채로, 그녀가 물었다.

“저는요? 준기 씨, 저는 안 데려가요?”

이준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바실리사··· 푸가초프는요? 푸가초프를 재건해야 하잖아요?”

“푸가초프의 첫 미션, 그건 해외미션이 될 운명이었나 봐요. 서울이든 부산이든 어디든.”

“저··· 정말, 저를 도와주겠다는 건가요?”

“지금까지는 준기 씨가 저를 도왔으니까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정말 괜찮겠어요, 바실리사?”

“물론이에요. 저도 데려가 줘요.”

“고마워요. 바실리사까지 와줄 줄은···”

“에? 제가 세르게이보다 의리가 없어 보여요?”

“아니, 그게 아니고요. 바실리사는···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준기 씨는 푸가초프를··· 저를 살려준 은인인데.”

아직도 조금은 놀라는 표정을 짓던 이준기가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바실리사. 고마워, 세르게이.”

바실리사가 물었다.

“그래서, 행선지는 어디죠? 곧바로 서울로 날아가나요?”

“아뇨. 우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보려고요.”

“블라디보스토크에요?”

“제가 지금 러시아 여권을 가지고 있잖아요. 한국 비자가 없으니 비행기로 곧바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바탕 소동을 부리면 실종자가 돌아왔다고 들여보내 줄 수도 있겠지만.”

“아, 그랬죠.”

“우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예브게니에게 여권이나 비자 위조를 부탁해 보려고요. 만약 안 된다면, 밀항을 하면 됩니다.”

세르게이가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예브게니 영감과는 연락이 안 돼.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그걸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되겠지.”

*****

2월 2일 수요일, 아침.

민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3시간을 소모해서 그들은 이동했다.

경유지인 모스크바에서 세 시간을 보냈으니, 비행시간만 따지면 10시간 남짓.

나쁘지 않다.

비행기가 계속해서 늦게 출발하는 게 문제였을 뿐.

아침 햇살을 받으며 택시는 시내로 이동했다.

비행기가 연착했기 때문에,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침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아르바트 거리의 해적 커피.

오픈한 지 얼마 안 되는 커피숍에는 아침 카페인 보충을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길게 줄을 만들고 있었다.

줄을 서면서, 세르게이가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예정 시간이 7시 40분이었는데, 두 시간이나 비행기를 더 태워주다니 고맙군.”

“덕분에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커피 타임이잖아. 여기 오픈 시간이 열 시였네. 예정대로 도착했다면 문도 안 열었을 거야.”

“대장이 의외로 여기 커피는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나,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아침 러시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숙련된 직원들은 긴 줄을 빠르게 해치우고 있었다.

운 좋게도 그들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테이크아웃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긴 팔 셔츠 정도의 가벼운 옷차림에 커피를 들고 바깥 자리를 찾아 앉는 사람들.

그들을 보며 이준기가 한마디 했다.

“이런 날씨에 바깥에 나가는 거야?”

“봄 날씨니까.”

“이런 걸 봄 날씨라고 부르는구나.”

“유창한 러시아어로 그런 문장을 말하니까 너무 이상한데?”

바실리사도 거들었다.

“세르게이 말대로 너무 이상한데요? 은연중에 준기 씨는 러시아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우리 둘 다 말이죠.”

세르게이는 회상했다.

불과 한 달 전에 바로 이곳에서 극동 마피아의 디마 호로비코프를 만났다.

자신이 속해 있던 조직에 반기를 든다는 생각만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본부 간부를 직접 만나고 나니 현실 감각이 엄습해 왔다.

“무슨 생각해, 세르게이?”

“아, 대장. 여기서 디마 만났던 것 기억해?”

“물론이지. 이 커피숍의 바로 이 자리 아니었던가?”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그랬군. 어떻게 똑같은 자리에 앉을 수가 있지.”

“창가 자리니까 그렇지. 비어 있으면 땡큐잖아. 냉큼 앉은 거지. 그때도 지금도.”

“휴우··· 그때 생각을 하니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실리사가 끼어들었다.

“디마라면, 디마 호로비코프? 극동 마피아 간부 말하는 거예요?”

“네.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극동 마피아가 디마였죠.”

“그 나쁜 놈은 어떻게 됐나요?”

“처리했죠.”

이준기는 그렇게 말할 뻔했다.

디마 그놈이 요즘도 꿈에 나온다고.

화염 마법이 일상인 구원자 세계이기는 하지만, 석유를 뿌리고 사람을 태워죽인 것은 과연 잔인한 일이었다.

사람을 고문하며 즐기는 디마의 모습을 보고 울컥해서 저지른 일이다.

다시 그 상황을 재연하게 되더라도 이준기는 디마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냥 총으로 쏴버릴 걸 그랬나.

세르게이가 물었다.

“대장, 무슨 생각해?”

“오후에 예브게니의 저택으로 갈까 하는데, 세르게이 생각은 어때?”

“그냥 그 집으로 가겠다고?”

“전화 연락이 안 되잖아. 다른 방법이 있나?”

“고전적인 방법을 써보는 건 어때? 아직 접선 방법이 바뀌지 않았다면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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