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70화 (17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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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4: 가지 않은 길 (2)

Episode 44: 가지 않은 길 (2)

2월 1일 화요일, 오전 5시.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에, 문아린은 새벽에 일어났다.

호박돌(cobblestone)이라고 부르던가.

돌로 포장된 거리를 보니 이국적이면서도 왠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인공적이지 않아서, 그런 느낌이겠지.’

문아린은 호텔을 나와 바깥을 걸었다.

통째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 구시가.

인적이 전혀 없는 새벽 시간이었지만 위험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스위스니까.’

건물과 나무 건너편으로 드문드문 아레(Aare) 강이 보였다.

강이라고는 해도, 한강에 비하면 개울물 수준이다.

시가에서 한참 아래쪽으로 흐르는 강은 멀어서 그런지 더 좁아 보였다.

‘길고 구불구불하기는 하네.’

요란한 간판이라고는 없는 차분한 거리.

얼마 동안 걷다 보니 교회의 종탑 같은 것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그러고 보니 어제 기차에서 내려 호텔까지 올 때 지나쳤던 곳이다.

산책을 끝내고 호텔에 도착하니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간단하게 과일이라도 먹을까 해서 내려간 식당.

문아린은 과식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많이 먹다니. 도대체 얼마 만이지.’

크롸상은 너무 부드럽고, 버터는 입에서 살살 녹았다.

무엇보다 우유가 너무 맛있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먹던 게 이런 맛?’

이준기의 실종 이후, 문아린은 커피를 끊었다.

그런데 이런 우유라면···

라테를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오늘은 참아야지. 하지만 이 유혹을 내가 계속 견뎌낼 수 있을까?’

*****

국경 없는 구원자회 베른 지부 사무실은 호텔에서 멀지 않았다.

호텔로 그녀를 데리러 온 아니타와 함께, 그들은 걸어서 사무실로 갔다.

출근 러시가 막 끝난 거리를, 둘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제네바에 본부가 있는데, 베른에 또 지부가 있는 이유가 있나요?”

“간단합니다. 작년 말에 베른에 좋은 차원문이 하나 생겼어요. 그래서죠.”

“좋은 차원문이라뇨?”

“E 등급이에요. 요즘은 구원자 레벨이 높아져서 E 등급 차원문도 예전보다는 많이 귀해졌잖아요?”

“E 등급 차원문이라면··· 혹시 테스트용으로 쓰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구원자 신분을 확인하려면 그냥 차원문 정보만 읽어보라고 해도 될 텐데, 테스트용 차원문씩이나 필요한가요?”

“퇴각 페널티가 없는 차원문 하나쯤 있으면, 직접 실력도 확인할 수 있고, 전략 짜는 데 도움도 되고요.”

“그래도 조금 불안하네요. 차원문을 방치하면 위험하지 않나요? 아무리 E 등급이라지만.”

“그런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철저히 방비해 두는 거야말로 스위스의 국가 특성 아니겠어요? 그 차원문은 인적도 많지 않은 곳이고, 군인들이 철저히 감싸고 있으니까요.”

“인적이 많지 않은 곳이라고요?”

“네··· 원래는 인적이 좀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음···”

아니타는 휴대폰을 꺼내 지도 앱을 켰다.

베른 지도를 보여주면서, 그녀는 설명을 이었다.

“여기가 베른 시내. 차원문이 생긴 곳은 여기예요. 시내 중심부에서는 한참 떨어진 곳이죠. 그래 봐야 작은 도시라서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요. 여기는 구르텐(Gurten)이라고 부르는 지역인데, 협궤 산악열차도 있고 말하자면 베른 시민들을 위한 주말 공원 같은 곳이죠.”

“그렇다면 유동 인구가 좀 있겠군요.”

“네. 그런데 차원문이 생긴 거예요. 시민들 생각을 하면 당장 닫아버려야겠죠. 그런데 차원문이 요즘 흔하지도 않은 E 등급인 데다 근처에 민가가 거의 없는 곳이라서, 우리 조직에서 스위스 정부에 건의를 한 거죠. 정확히 말하면 스위스 정부가 아니라 베른시에.”

“테스트용으로 쓰도록 해달라는?”

“네. 온라인 여론 조사 결과도 좋게 나왔어요. 찬성이 70% 정도 나왔어요. 아시겠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오기 힘든 찬성률이죠.”

“정말 그렇군요. 70%라니.”

“아, 사무실에 도착했네요.”

인구 13만이라면서, 베른에는 백화점이 있었다.

백화점 옆 건물 2층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

창문을 내다보니 길 건너편에 네스프레소 부티크가 보였다.

뭘 보고 있냐는 듯, 문아린 옆으로 다가온 아니타가 창을 내다 보고 말했다.

“아!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네? 뭐가요?”

“길 건너 네스프레소 부티크에서 아침 커피 해요.”

“저거, 캡슐 파는 곳 아닌가요? 커피도 팔아요?”

“커피를 그냥 줘요. 저는 한 달에 백 프랑어치는 네스프레소 캡슐을 사니까 커피를 얻어먹을 자격이 충분하죠.”

사무실에서 랩탑만 챙긴 아니타는 문아린을 끌고 네스프레소 부티크로 들어갔다.

호박돌 포장도로에 철로가 박혀 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발 조심하세요! 걸려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이건, 트램 철로인가요?”

“네. 이따가 구르텐에 갈 때 트램 타고 갈 거예요. 아··· 베른은 주차가 거의 불가능해요. 구르텐에 주차장이 있기는 한데, 대중교통이 워낙 잘 되어 있으니까요.”

네스프레소 부티크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작은 테이블에 둘씩 모여 앉아 에스프레소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캡슐과 커피 머신을 사는 사람들도 많아서, 직원 숫자도 많았다.

“뭐로 하시겠습니까?”

“아르페지오 두 잔요.”

아니타는 작은 에스프레소 잔으로 커피 둘, 그리고 초콜릿 두 개를 받아 왔다.

“이거, 진짜 공짜예요?”

“그럼요.”

“왠지 부담스러운데요.”

“아까 말했잖아요. 제가 한 달에 네스프레소에 쏟아붓는 돈이 얼만데. 부담 가지실 것 전혀 없어요.”

*****

베른 중앙역에서 9번 트램을 타고 그들은 구르텐으로 이동했다.

다리를 건너고, 주택가를 지나서 조금 한적한 거리가 나타났다.

조금 휑한 동네.

내려서 길을 건너니 조그마한 베른시에 어울리지 않는 제법 큰 주차장이 나타났다.

차는 별로 없었다.

주차장을 바라보며 걷는 문아린을 보고, 아니타가 설명했다.

“주말 공원 같은 거라고 말씀드렸었죠. 오늘은 화요일, 게다가 차원문 때문에 아무래도 전보다는 사람이 적죠.”

협궤 열차라고는 했지만, 크기는 케이블카 정도였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타와 문아린은 맨 끝자리에 앉아 경치를 구경하며 올라갔다.

철로가 하나여서, 차 하나로 왔다 갔다 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중간에 정차역이 하나 있는데, 정확하게 거기에서 두 개의 열차가 교차했다.

정차역 섬 승강장 양쪽으로만 철로가 갈라져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스위스답네. 정확하게 교차해야만 가능한 시스템이잖아.”

“자, 여기예요. 안으로 들어가요.”

아니타의 안내에 따라 문아린은 건물로 들어갔다.

꽤 넓은 카페테리아. 모르긴 몰라도 백 명은 넘게 수용할 크기다.

“경치가 꽤 좋죠? 베른에 이사 온 이후로, 여기는 매주 오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일 때문에 왔지만, 경치도 좋고 커피도 맛있어서요.”

“정말 예뻐요.”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오세요.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겨울에 바깥에 앉을 수는 없으니.”

아니타는 곧 그 맛있다는 커피를 두 개 들고 왔다.

국그릇 크기의 하얀 잔에 라테가 가득 담겨 있었다.

“드세요. 이곳 명물이라고나 할까. ‘샬레 헬’이에요.”

“네? 샬레··· 헬?”

“샬레는 이 그릇을 말하는 거고요. 커피잔치고는 엄청 크죠.”

“아, 네.”

“헬은 H.E.L.L.”

“네?”

무슨 농담일까, 문아린은 잠깐 생각했다.

이게 매운 음식이라든가 하는 종류라면, ‘hell’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겠지.

하지만 이건 그냥 커피인데?

엄청 쓰다는 건가?

보기에는 그냥 라테 비주얼인데?

“아하하. 농담이에요. 아니, 농담이 아닌가?”

“네?”

“Hell이라고 해서 뭐 지옥처럼 쓴 커피라는 건 아니라고요, 하하. 스위스에서 독어 쓰는 건 아시죠? 스위스 공식어는 네 개지만, 여기 베른은 독어 지방이에요. 독어로 hell은 그냥 가볍다는 말이에요. 영어로 light. 그러니까 오히려 연한 커피라는 얘기죠. 큰 사발에 담은 연한 커피.”

“아하. 재미있네요.”

“그렇죠? 이 커피를 저는 참 좋아하거든요. 좀 드셔보세요.”

그래서 문아린은 끊고 있던 커피를 아침에 이어 또 마시게 되었다.

따뜻하고 맛있었다.

*****

베른 시민들의 주말 공원이라는 구르텐을 문아린은 둘러보았다.

나무로 만든 전망 탑도 있고, 조형 미술 작품도 있고··· 겨울에는 달리지 않지만 아이들용 장난감 열차도 있다.

“눈이 많이 오면 눈썰매장도 해요. 그런데 올겨울에는 안 하죠. 차원문 때문에요. 눈썰매 타다가 길 잃어서 차원문 쪽으로 걸어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면서요?”

“그래도요. 안전장치는 이중 삼중으로 해놔야죠. 스위스 사람들 생각이 그래요.”

“그건 좋은 생각이네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방심하는 것보다는.”

“그렇죠? 어? 잠깐만요.”

아니타는 전화를 꺼내 받았다.

상대가 외국인인지, 영어로 통화.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내고, 아니타는 문아린에게 말했다.

“벌써 도착했다고 합니다. 오이빈드.”

“아, 그 사람이요? 구원자라는.”

“네. 노르웨이 사람인데, 문아린 구원자님과 마찬가지로 우리 조직, SSF 소속이죠. 지금은 베른 근무 중이고요.”

“저와 함께 차원문 들어간다는 거죠?”

“네. 고블린 하나둘 정도 사냥하게 될 거예요. 문아린 구원자님 전투 스타일 분석차 동행합니다.”

“네···”

“레벨은 문아린 구원자님에 비해서 한참 낮아요. 그러니까 귀엽게 봐주세요. 키가 워낙 크니 별로 귀엽지는 않지만.”

“키가요?”

“본인은 190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2미터는 넘어요. 키 큰 것도 컴플렉스가 될 수 있나 봐요.”

아니타의 말에 의하면 차원문 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맞는데도, 그 희뿌연 소용돌이가 보이지 않았다.

충분히 가까워지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둘러싼 것은 물론, 튼튼해 보이는 거대 바리케이드가 차원문을 감싸고 있었다.

탱크 두 대도 옆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국의 차원문 포위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준다는데, 스위스는 더했다.

아니타가 이름을 부르자, 방탄 헬멧에 방탄복을 차려입은 군인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뒤로 돌았다.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헬멧까지 군복을 풀세트로 차려입은, 키 큰 사람이 웃으며 인사했다.

“문아린 구원자님? 외이빈드 에릭슨(Øyvind Eriksen)입니다. 발음이 어려우면 그냥 오이빈드(Oyvind)라고 불러주세요.”

*****

- 차원문 고유번호 12371. 랭크 E. ‘고블린의 멋진 신세계’.

- 차원문 소멸 조건: 고블린 전초기지의 깃발 탈취.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아이템 1개(75% 확률).

- 퇴각 페널티: 없음.

차원문 안을 들어오니, 작고 아담한 오두막이 나타났다.

처음 구원자로 각성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다.

오이빈드가 오두막 안을 한번 둘러보고는 문아린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볼 일 없으시죠? 나갈까요?”

“네.”

바깥은 황무지다.

황무지를 개척하는 고블린들이 진땀을 흘리며 신세계를 개척하고 있었다.

곡괭이나 삽을 든 고블린도 있지만, 대개는 그냥 맨손이다.

맨손으로 돌을 고르고, 자루에 담아 옮기는 일을 한다.

“아시겠지만, 얘네들은 비선공 몹들입니다. 절대로 먼저 덤비는 일이 없죠.”

“네.”

“아무나 한 녀석 골라서 전투 스타일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문아린은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비선공 고블린을 공격하는 건···”

“네? 문아린 구원자님이 레벨이 높으시기는 하지만··· 굳이 무리하시지 않아도 되는데요.”

“전초기지 쪽으로 가면 병사들도 있잖아요? 거기에서 하죠.”

“네?”

이 던전 포맷에 대해서 이미 아는 건가 하면서 오이빈드는 놀란 눈을 했다.

“이 던전 포맷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예전에 해봤던 거니까요.”

“아··· 그래도 그걸 다 기억하시다니. 다시 올 일도 없는 포맷에 대해서.”

그냥 기억하는 걸로도 모자라 꼼꼼이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문아린은 잠자코 있었다.

그 사람에 대해 꼬치꼬치 묻기라도 하면 괴로워질 뿐이다.

문아린은 큰 키의 오이빈드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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