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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4: 가지 않은 길 (1)
Episode 44: 가지 않은 길 (1)
1월 30일 오후 8시.
아브람 일당을 처치하고, 던전의 나머지 구역을 정리한 이준기 일행이 바깥으로 나왔다.
차원문 위치에 지은 아브람의 간이 사무소.
던전 클리어로 차원문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원래는 지붕을 뚫고 나간 크기의 차원문이었지만, 이제는 실내로 완전히 들어와 있었다.
“미겔. 뒷일을 부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은 일은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우크라이나 침략을 지휘하던 아브람 쉬넨코가 죽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1분이라도 일찍 우크라이나 민병대 쪽에 보고해야 한다.
러시아 쪽도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평화 협상에 나설 것이다.
미겔은 저녁도 먹지 않고 인근 마을로 뛰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미겔의 모습을 보면서, 이준기는 잠시 미뤄뒀던 일을 생각했다.
광화문 차원문 클리어 이후 한국의 상황을 체크하고, 귀국 계획을 짜야 한다.
어제 아침, 미겔의 문자를 받던 당시 그는 광화문 차원문 클리어 소식을 보고 있었다.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하니, 일단 한국 문제는 마음속에서 치웠다.
이제 우크라이나의 일이 끝났다.
모스크바 마피아의 아브람 쉬넨코, 그리고 푸가초프의 이리나 보로비예프.
두 건이 한 번에 해결되었다.
우크라이나 국경을 벗어나게 만들었던 두 가지 위험요인이 동시에 해소된 것이다.
한국 소식을 체크할 때가 되었다.
제목만 다른 수많은 기사들을 정리하면 결국 세 가지 사실로 요약된다.
- 제3차 한일 연합 공격대, 광화문 차원문 클리어. 이로써 연합 공격대는 3연속 던전 클리어.
- 공격대 메인 탱커 한상태, 이상덕 협회장 사망 사실 공식 확인.
- 이상덕 협회장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 이어져. 무엇이 사실인가?
공격대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다.
한일 양국에서 참가한 30명의 구원자 중에서 무려 7명이 사망했지만, A 등급 차원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도톤보리, 광주에 이어 광화문까지 3연속으로 성공한 한일 연합 공격대.
인터뷰를 통해 한상태는 연합 공격대를 앞으로도 꾸준히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이상덕의 희생을 추모하면서, 그의 뜻을 잇기 위해 협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도 말했다.
사망자 7명 중 6명이 한국 측 구원자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전원 서울연합 길드 소속이라는 점.
길마 이상덕을 비롯해서, 오대영, 변희영, 정두리, 박보도, 남경철.
던전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해당 공격대의 증언을 무조건 채택하는 것이 관례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서울연합 소속 공격대원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강명성.
그는 전투 중에 도주했다고, 한상태는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그것은 차원문 근처를 지키던 군인들의 증언에 의해서도 확인이 되었다.
여섯 명이나 죽어 나간 한국에 비해 일본의 피해는 미미했다.
딜러 다나카 사부로가 사망했지만, 나머지는 무사 귀환했다.
문제는, 죽었다는 이상덕을 본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끼어들었다가는 제명에 못 죽는다.”
당시에 차원문을 지키던 수많은 군인들과 전경들, 그리고 협회 직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국 구원자 계의 절대 권력자가 된 한상태의 말에 의문을 표시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죽었다면 죽었겠지.
이상덕이든 한상태든, 한국 구원자 계가 한쪽으로 정리가 된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단합된 힘을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한일 연합 공격대 사업을 계속 진행하겠다는 한상태의 발언으로 보아, 한상태 역시 일본과 야합한 것이 틀림없다.
이상덕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제어하려 했던 이준기.
이상덕의 배신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한 달 정도를 밖에 나와 있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시골 마을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이준기는 세르게이와 바실리사를 향해 말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표정으로 세르게이가 눈을 들어 이준기를 보았다.
바실리사의 큰 눈은 평소보다도 더 커져서 그를 향했다.
세르게이의 손에서 떨어진 숟가락이 가볍게 수프 접시에 부딪히면서 소리를 냈다.
*****
같은 시각.
문아린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불 꺼진 기내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았다.
벨라루스보다 여섯 시간이 빠른 한국은 이미 1월 31일 새벽이다.
밤 비행기를 고른 것은, 역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는 건지, 김대기 기자가 공항에 나와 있었다.
“문아린 구원자님!”
“김대기 기자님!”
“이런 밤에 어딜 가세요?”
“김 기자님이니까 알려드려야 하나요?”
“이미 알고 있다고 말씀드리면, 기분 나쁘시려나요?”
문아린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김대기 기자의 정보망은 협회보다 나은 게 틀림없다.
지난 1월 23일, 대통령 긴급명령에 의한 강제징집을 거부한 문아린은 은퇴를 선언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보였겠지만, 사실 시간문제였다.
협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싸움에 지쳤다.
이준기의 실종은 바로 그 정치 싸움의 부산물이었다.
길수연도, 한상태도 보기 싫었다.
이상덕의 얼굴을 다시 보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다.
‘아니, 이제는 그런 일도 없겠지만. 이상덕은 죽었다고 하니까.’
구원자로서 활동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구원자인 것은 변함없다.
각성을 했음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차원문 정리 활동을 하지 않는 구원자는 많이 있다.
그러나 문아린과 같은 고레벨 구원자가 활동을 그만두는 케이스는 대단히 희귀하다.
김대기 기자가 말했다.
“유럽··· 잘 다녀오세요. 문아린 구원자님 편이 한국에도 많이 있다는 사실, 잊지 마시고요. 저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구원자님 팬이니까요.”
문아린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있었다.
“행선지는 제네바죠? 스위스에서 한국 음식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이거, 고추장 세트예요. 액체류에 해당하니까 지퍼락에 넣어서 검색대 통과시키세요.”
“감사합니다···”
“좀 웃으세요. 문아린 구원자님은 웃으시면 참 예쁜데···”
“후우···”
웃는 건 무리다.
얼굴이라도 펴려고, 문아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웃어 달라는 건, 무리한 부탁이죠? 하지만 기억해 주세요. 구원자님들 아니었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파괴되었을 거예요. 여기 인천 공항만 해도 그렇잖아요? 문아린 구원자님의 정찰대, 그리고 나중에 협회의 본대가 아니었다면 차원문이 아직도 저 밖에 그대로 있었을 것이고, 비행기들이 제대로 뜨고 내리지도 못했을 거예요.”
“···”
“이곳을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 마음 한구석에서는 구원자님들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걸 잊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억지로라도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과연 어떤 얼굴이 되었을까.
아무렴 어때. 그런 건 상관없잖아.
문아린은 꾸벅 인사를 하고 검색대 쪽을 향해 걸어갔다.
조그만 기내 가방 하나만 끌고 가는 그녀의 모습이 작아 보였다.
길수연과 광화문에 갔던 일을 계기로, 문아린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은퇴하고 활동을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구원자인 사실은 변함없다.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세금이야 축내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동생이 전화를 해왔다.
“언니.”
“아영아?”
“은퇴, 번복할 생각은 없는 거지?”
“···”
“재능이 아깝지 않아? 난 그런 거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걸?”
“아영아··· 내 의지가 아니잖아. 내가 각성한 거.”
“그래서 전화한 거야. 봉사활동이라도 하면 어때?”
“봉사?”
“메일로 링크를 보내줄게. ‘국경 없는 구원자회’라는 단체야.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대.”
“국경 없는 구원자회?”
“그래. 언니 구원자 은퇴한 것은 결국 협회 정치 싸움 때문이잖아? 언니 같은 사람이 여기에만 있겠어? 세상에는 버려진 차원문도 많이 있대. 정부도, 구원자 단체도 신경 쓰지 않는 빈민촌 같은 곳에 생기는 차원문이 그런 경우지. 그렇게 버려진 차원문을 닫고 다니는 게 이 단체가 하는 활동이야. 의료 기반이 부족한 곳에서 의료 봉사를 벌이는 ‘국경 없는 의사회’와 비슷한 거지.”
“아아···”
“가입 절차도 간단하던데? 하루 이틀이면 된대.”
“고마워, 아영아. 꼭 네가 언니 같다.”
“그런 말 듣는 게 하루 이틀인가?”
“하하.”
“그렇게라도 웃는 소리 들으니 좋다.”
“고마워, 아영아.”
“사랑해, 언니.”
“사랑해, 나도.”
*****
카타르의 도하라는 곳을 잠시 경유, 문아린은 비행기를 갈아타고 취리히에 도착했다.
새벽 1시 비행기를 탄 데에다, 시간을 버는 방향으로 가는 비행기라 아직도 1월 31일 정오밖에 되지 않았다.
공항을 나오니 그녀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든 여자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외국인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문아린 구원자님?”
“아니타(Anita)?”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점심시간인데.”
“비행기에서 간단하게 먹었어요. 아, 그게 아니지. 아니타는 점심시간이죠?”
“하하, 맞아요. 그렇지만 뭐 걱정하지 마세요. 기차에서 먹죠.”
“기차에서요?”
“비행기가 일찍 도착해서 다행이네요. 서두르면 다음 기차 탈 수 있겠어요.”
‘국경 없는 구원자회’의 사무직원 아니타 슈나우저의 안내에 따라, 문아린은 기차에 탑승했다.
일등석이기는 하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식당차로 가는 게 어떻냐고 그녀는 제안했다.
식당차 구경도 할 겸, 문아린은 흔쾌히 동의했다.
식당차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자리가 넓지는 않았지만 일단 깔끔해 보였다.
메뉴판을 뒤적이던 아니타는 오늘의 메뉴가 뭐냐고 직원에게 물었다.
“인도풍 카레입니다.”
“그걸로 주세요. 아차, 문아린 구원자님은요?”
“저는 커··· 아니, 녹차 있나요?”
“식사 안 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비행기에서 간단히 먹어서요. 괜찮습니다.”
아니타는 직원을 돌아보며 주문을 마쳤다.
“녹차 하나, 그리고 라테 하나 추가해 주세요.”
기차 식당칸이라는 걸 이용해본 적은 없지만, 기차에서 음식이 좋게 나올 리가 없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문아린.
실제로 나온 음식을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난 것은 들었지만, 간편 조리식품 치고는 고급져 보였다.
같이 나온 빵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하일라이트는 아니타가 주문한 라테였다.
실제로 맛은 어떨지 모르지만, 시내 커피숍에서 나오는 것에 비해봐도 꿀릴 것이 없는 비주얼이었다.
도대체 저걸 어디에서 만들어 오는 걸까?
녹차 티백도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준비한 커피만 할까.
허겁지겁 식사를 끝내고, 아니타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네바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작년 말부터 베른 지부로 나와 있다고 한다.
베른에서 두어 달 살다 보니, 복잡한 제네바보다 마음에 든다고.
“베른이 스위스의 수도죠? 많이 조용한 동네인가 봐요.”
“인구가 13만 정도밖에 안 되니까요.”
“에? 그렇게 작아요? 제네바는 많이 큰가요?”
“제네바는 20만요.”
문아린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는지, 아니타가 서둘러서 수습했다.
“스위스 전체 인구가 700만 정도밖에 안 되니까요.”
“그래도··· 전체 인구가 700만이면 4분의 1 정도는 수도권에 사는 게 보통 아닌가요?”
“한국이 그런가 보네요. 하긴, 영국이나 프랑스는 그렇겠죠. 하지만 스위스는 달라요. 지방마다 도시들이 잘 발달해 있어서요.”
“제네바가 최대 도시는 설마 아니겠죠?”
“취리히가 제일 크답니다. 인구가 40만 정도죠.”
“통계를 줄줄 외우시네요.”
“아··· 제가 얼마 전까지 제네바에 살던 것은 맞지만, 전 원래 오스트리아 사람이라서요. 스위스에 산 지는 꽤 됐지만, 아직 그냥 영주권자예요. 외국에 살면서, 그 나라에 애착도 좀 있으니까 이런저런 통계를 좀 기억하게 되네요.”
“아··· 오스트리아 분이시군요. 거기도 살기 좋지 않나요?”
“다들 그렇게 말하고는 하죠. 하지만 전 스위스가 더 좋아요.”
“유럽은 좋네요. 자기 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옆 나라에 가서 살면 되고.”
“아?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녜요. 스위스는 유럽 연합도 아니고요.”
“그렇긴 하겠네요. 제 말씀은, 한국은 주변에 국경 닿는 나라도 없고 사실상 섬나라나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이웃끼리 오손도손 모여있는 유럽을 보니 신기해서요.”
“아하, 그렇군요.”
딸깍 소리를 내며 아니타가 커피잔을 테이블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시계를 보며 손가락을 테이블에 두드리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베른까지는 한 시간이면 가니까. 아··· 시간이 애매하네. 커피 한 잔 더 하고 싶기도 하고···”
“저는 괜찮아요. 더 드세요.”
“그럴까요?”
아니타는 문아린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이고, 직원에게 라테 한 잔을 더 부탁했다.
한 잔을 더 마시다니, 커피 맛이 괜찮은가?
문아린은 괜히 궁금해졌다.
유럽에서 마시는 커피 맛은 어떨까?
“커피 맛이 괜찮은가요?”
“아··· 한 잔 주문해 드릴까요?”
“아뇨. 그냥 궁금해서 여쭤봐요.”
“저는 뭐, 별로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서요. 기차에서 파는 밥이나 커피도 좋아요.”
입맛이 까다롭지 않다고 주장하는 커피광이라면 한 사람 알고 있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길수연 말대로, 정말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