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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3: 아브람의 탑 (8)
Episode 43: 아브람의 탑 (8)
알렉세이 믈라디노프(Alexei Mladinov).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모스크바 마피아의 우크라이나 작전 총괄 지휘자였다.
더 거창하게 말하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원정군 총사령관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포로 신세다.
황금문 전투 직후, 건방진 한국인 관광객을 혼내주려고 했다가 오히려 당했다.
전쟁 포로, 그것은 그럴 수도 있는 운명이다.
문제는, 그의 가치가 자꾸 부정당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저··· 정말이냐?”
“왜 자꾸 물어. 너는 명단에 없어.”
“그럴 리가 없다! 다시 한번 잘 확인해 봐라. 알렉세이 믈라디노프다! 알료샤 믈라디노프라고 되어 있을지도 몰라. 잘 확인해 봐라.”
“알렉세이고 알료샤고··· 믈라디노프, 아니 M으로 시작되는 성을 가진 사람 자체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나 참··· 명단이 길기나 하면 내가 다시 한번 살펴라도 보겠다. 그쪽에서 요구한 것은 겨우 일곱 명이다. 그중에 성이 M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고. 이름이 A로 시작하는 사람도 없어.”
“그···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뭐가 그럴 리가 없어. 범죄 조직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 쓸모없어지면 버리는 거 아냐?”
“버··· 범죄 조직이라니! 우린 의적(義賊)이다! 민중을 대표하는 조직이란 말이다!”
“시끄러워! 소란 피우지 말고 가만히 있어! 쓸데없는 일로 나 부르지도 말고.”
간수는 가버렸다.
정부 조직이 무너진 우크라이나지만, 형무소는 민병대가 넘겨받아 운영하고 있다.
기존의 범죄자들에 더해, 전쟁 포로들을 수감해야 해서 공간이 부족했다.
알렉세이 믈라디노프는 그나마 적장(敵將) 취급이라도 받아 이곳에 머무는 것이다.
구원자가 아닌 러시아 마피아는 임시방편으로 운영하는 수감 시설, 그러니까 헛간이나 공장 같은 곳에 대충 수용되어 있다.
그들은 더 열악한 처우를 받고 있다.
이준기에게 제압당하고 나서, 알렉세이는 우크라이나 민병대에 체포되었다.
무릎에 총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던 그는 체포 당시, 차원문에 들어가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차원문 안에 들어가서, 힐링 포션 하나만 먹고 나오겠다! 그렇지 않으면··· 난 평생 불구의 몸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우크라이나 민병대는 요청을 거부했다.
적 구원자를 차원문 안으로 놓아 준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크라이나 측 구원자를 감시역으로 함께 들여보내도 좋다고, 알렉세이는 애원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죽어가는 것도 아니고, 부상병 치료를 위해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알게 모르게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도 발생하는 형국이다.
병원도 아니고, 차원문이라니, 어이없는 부탁에 민병대원들은 실소를 터뜨렸다.
“미친놈.”
“으아아아! 제발 부탁이다! 힐링 포션 하나만 먹으면 된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나오겠다!”
기가 막힌 민병대원이 함께 포로로 잡힌 알렉세이의 부하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놈은 뭐야? 뭔데 이렇게 고압적이야? 지가 귀족인 줄 아네.”
“아··· 알렉세이 믈라디노프. 우크라이나 원정군 총지휘관입니다.”
“뭐··· 뭐라고!”
화들짝 놀란 민병대원들은 서둘러 알렉세이에게 총구를 모아 들이댔다.
알렉세이는 희망에 차서 다시 외쳤다.
“그렇다! 나는 사령관이다! 걸맞은 예우를 해라!”
걸맞은 예우가 돌아오긴 했는데, 좀 혹독했다.
민병대원 몇 사람이 총구를 들이대고 위협하는 가운데, 다른 민병대원은 알렉세이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이 개새끼! 죽어라!”
“아버지의 원수!”
“그냥 이 자리에서 죽입시다!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하면 되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알렉세이는 울면서 애원했다.
“으아아아! 사람 살려! 잘못했습니다! 거짓말이에요! 저는 그냥 졸개입니다! 살려주세요!”
민병대원들에게 신나게 얻어맞고 나서, 알렉세이는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민병대원들은 죽지 않을 만큼만의 치료를 요구했고, 의사도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
“적당히 하쇼. 죽지만 않음 되는 거지.”
알렉세이의 애걸에도 그들은 냉담했다.
알렉세이는 무릎 부상만 대강 치료받고 형무소로 옮겨졌다.
그는 일반 죄수들과 섞여 수감되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신입을 보고, 방장은 혀를 차며 물었다.
“아아? 이번 신입은 다리 병신이야?”
알렉세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장을 향해 다가갔다.
거구의 방장이 일어나며 외쳤다.
“뭐야, 이 새끼는? 머리도 이상한 거야?”
알렉세이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방장의 이마를 밀었다.
방장은 그대로 고꾸라져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순간,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좁은 옥사의 황제가 되었다.
일반 형무소에 수감되어 좋은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제한된 시간 동안이지만, 그는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공영 방송의 뉴스 정도를 볼 수 있을 뿐이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그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공영 방송에서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실제로는 러시아에게 엄청 밀리고 있는 거군? 다들, 안 그렇게 생각하나?”
“그··· 그러믄입쇼.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포로 교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 측과 침략군 사이에, 포로 교환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일단 시범 케이스로 몇몇 지휘관급에서 시작해서, 나중에 일반 병사까지 확대할 예정입니다.”
알렉세이는 신났다.
지휘관급 포로 교환이라면, 당연히 자기 얘기다.
간수를 불러서 자세한 소식을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간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보를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호언장담은 그저 말뿐이었다.
요청 명단에서 그는 알렉세이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조무래기 주제에 거물 행세를 한다고 생각하고, 간수는 그를 대놓고 홀대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고! 다시, 다시 한번 명단을 좀 살펴봐 줘! 아니, 명단을 좀 보여줘!”
간수는 뒤를 돌아 그를 한번 쳐다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조용하게 뇌까리는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미친놈.”
*****
“우와아아!”
형무소 전체가 진동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전쟁 포로도, 일반 범죄 수감자도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오늘, 2월 1일 오후 9시를 기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 간에 정전 협정이 발효되었습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 우리 조국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을 이겨냈습니다!”
알렉세이 믈라디노프도 자기 방에서 뉴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비좁은 방 안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열세 명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축하드립니다, 방장님!”
“흠··· 그래, 그래. 고맙구나.”
알렉세이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2주일이 채 되지 않은 수감 생활이지만, 그동안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했다.
“에? 뭐라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알렉세이는 귀에 손가락을 넣어 파는 시늉을 했다.
알렉세이의 위협적인 표정에도, 간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행정 절차가 필요한 건 당연하잖아. 전쟁이 끝났으니 감옥 문을 열기라도 하라는 거야?”
“하지만 간수 양반··· 아니 간수님, 수용소에서는 그냥 일제히 풀어준다고 하던데요?”
“그건 당연하지. 포로수용소에는 러시아인 전쟁포로들뿐이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너 같은 전쟁 포로도 있지만 일반 범죄자들도 있잖아. 그러니까 서류 심사도 필요하고 절차가 좀 있어.”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차별대우하는 거예요?”
“차별대우라니··· 그래도 꼴에 장교급이라고 우대해 줬더니··· 그동안 텔레비전도 보고 샤워도 하던 건 잊었냐?”
“네? 아니 겨우 그깟···”
“그깟이라니? 포로수용소가 어떤 덴지 못 들었어? 그냥 헛간이나 폐건물이란 말이다! 거긴 텔레비전은 고사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해! 호강시켜줬더니 뭐가 어째? 혼나보고 싶어?”
“이봐요, 간수 양반. 난 곧 풀려난 몸이오. 그렇게 고압적으로 굴었다간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간수가 문에서 멀어지며 소리 질렀다.
“이 러시아 개새끼 같으니라고! 포로라고 정중하게 대해줬더니, 정신을 못 차리는구만!”
간수가 호루라기를 불자, 멀리에서 두 명이 뛰어왔다.
“이 새끼, 독방에 처넣어! 간수를 협박했다.”
알렉세이도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너··· 너! 내가 얼굴 다 봐뒀다! 이름도 물어볼 거야! 내가 네놈을 못 찾을 것 같아?”
문이 열리고, 알렉세이를 향해 테이저건이 발사되었다.
구원자인 수감자는 이렇게 다루는 것이 정규 프로세스로 정해져 있었다.
정신이 희미해져 가면서도 알렉세이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 악랄한 간수 놈! 손가락으로 박살을 내··· 주···”
*****
2월 22일.
알렉세이 믈라디노프는 자루를 내미는 간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굴이 초췌해진 것은 물론이고,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행동을 하는 알렉세이를, 간수는 연민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소지품이다. 확인해라.”
“에? 소지품이라고요? 왜 그걸···”
“출소다.”
“추··· 출소?”
출소라는 말에 알렉세이의 귀가 활짝 열렸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누군가와 면회실에서 만났던 것 같다.
면회를 끝마치고 돌아가 독방에서 기다리는데 점심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두 번째 독방이다.
이번에도 일주일이 넘게 있었다.
시계는 없지만, 알렉세이는 식사 시간을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밥만 기다리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분명 점심시간이 지났다고 그는 확신했다.
밥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기대감이 배신당하자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소동을 피우거나 소리를 지르면 또 ‘전기 치료’를 받게 된다.
‘아··· 안돼. 아프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입에서 조금씩 공기가 새어 나갔다.
어느새, 그는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다가 드디어 말이 나왔다.
“으아아아! 바··· 밥 줘! 저··· 점심시간이··· 지났잖아!”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나자, 조금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러나 곧바로 후회의 마음이 몰려왔다.
이제 간수들이 나타나 그를 치료실로 끌고 갈 것이다.
끌려가기 전에 또 테이저건을 맞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
“으··· 으아아아! 아··· 안돼!”
알렉세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벽을 향해 자꾸 뒷걸음질 쳤다.
벽이 등에 닿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양쪽 발을 꼼지락거렸다.
‘이··· 이제··· 문이 열리면!’
정말로 문이 열렸다.
알렉세이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눈도 감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1387. 나와라.”
모든 것이 생각났다.
그렇게 방에서 나와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소지품 자루를 내밀고 있는 간수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옆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다.
‘누구지? 아는 사람이던가?’
그 사람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수고했다, 알렉세이. 조국이 너를 필요로 한다.”
그랬다.
알렉세이가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가 대답했다.
“조··· 조국?”
“조국 러시아가 위기에 처했다. 조국을 위해 싸워라.”
“당신은 누구?”
그 남자가 옆의 간수에게 화를 냈다.
“아니, 사람을 이렇게 고문해도 되는 거요? 반드시, 법적 책임을 묻겠소.”
“저··· 저는 모릅니다. 저는 면회실 근무예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고문해 놓고, 뭐가 어째요?”
“잘은 몰라도··· 규정대로 한 걸 겁니다. 난동을 부렸다고 들었어요.”
“오늘은 일단 물러가겠소. 다행인 줄 아시오.”
간수가 우물쭈물하며 뒤로 빠지자, 그 남자는 다시 알렉세이를 돌아보았다.
“알렉세이 믈라디노프!”
이름이 불리자, 그는 어떤 힘에 이끌리는 듯이 대답했다.
“네, 넷!”
“조국이 그대를 부른다. 죽을 각오로 이 땅을 지켜라.”
“다··· 당신은?”
“난 드미트리 요코비치다. 정말로 날 잊은 건가?”
“드··· 미트리··· 요코비치.”
“지독한 우크라이나 놈들. 이 빚은··· 반드시 갚아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