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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3: 아브람의 탑 (1)
Episode 43: 아브람의 탑 (1)
앞으로 이렇게 하리라는 것을 시연이라도 하듯이, 이준기는 첫 번째 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아주 천천히 돌렸다.
구원자의 예민한 청력으로도 감지하기 어려운 작은 소리만으로, 문이 열렸다.
발소리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일행은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방은 마치 오래된 서고 같은 느낌이다.
놀의 키보다도 높은 책꽂이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실용성은 개에게나 줘버렸는지, 책꽂이는 규칙도 없이 배열되어 있어 방 전체를 미로로 만들어 버렸다.
조심조심 코너를 돌아 따라가다 보면 막다른 골목이 나오고는 했다.
“크왁!”
몇 번째인가 코너를 돌았을 때, 오크 돌격병 무리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오크들은 나름 기습을 해온 것이지만, 상대방이 너무 강했다.
이준기가 선두의 오크에게 일격을 가하며 달려 나가자, 바실리사가 나머지의 공격을 막아섰다.
미겔은 이준기가 한 것처럼 한 마리를 오크 무리로부터 분리시켰다.
세르게이는 양손 둔기를 들어 바닥으로 내리찍는 식으로 공격했다.
책장 때문에 둔기를 횡으로 휘두를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팀의 화력은 충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 전원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첫 번째 방의 유형은, ‘미로에 배치된 다수의 몬스터’다.
퍼즐 유형이 아니라면, 몬스터는 방 하나에 한 부대다.
그러니까 이걸로 끝이다.
책꽂이로 이루어진 미로의 끝에 다다랐다.
몬스터를 처치하든 말든, 다음 방으로 가는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문을 열기 전에, 이준기가 물었다.
“다음 방으로 가도 되겠죠? 전부 준비됐어요?”
“아··· 잠깐, 대장.”
세르게이가 말했다.
“왜 이 방에는 몬스터가 있는 거지? 이미 아브람 일당이 지나간 방 아냐?”
“리셋된다고 들었어. 새 방으로 진행하고 뒤의 문을 닫는 순간, 문이 닫힌 방에는 몬스터가 다시 스폰되는 거지.”
“그렇다면, 아브람 일당이 현재 점유하고 있는 그 방에는 몬스터가 없겠군.”
“몬스터를 잡기 전이라면 그렇지 않겠지. 게다가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은 다음 방으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니까.”
“아··· 그런 거군.”
“몬스터를 변수로 활용하기 위해 놔둘 수도 있는 것이고.”
세르게이는 잠깐 동안 주위의 책꽂이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래? 실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뭔데?”
세르게이는 둔기 ‘퍼시벌의 평온’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바닥을 서로 비볐다.
“뭐해?”
“책꽂이를 밀면 넘어질까? 만약 그렇다면 공격에 활용할 수 있겠지.”
“흠. 재미있는 생각이네. 저쪽 책꽂이를 밀어 봐. 그쪽은 막다른 골목이니까.”
“오케이.”
세르게이와 같은 생각을 예전에 이준기도 한 적이 있었다.
생각을 실행으로 옮겨봤으니, 그 대답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남의 제안에 초를 칠 수는 없는 법.
이준기는 세르게이가 책꽂이를 미는 것을 구경했다.
“끄···.응!”
신음까지 내며 세르게이가 힘을 주었으나 책꽂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음··· 역시.”
“이 던전··· 사무실 같아 보이기는 해도 집기를 집어 던질 생각은 말아야겠군요.”
미겔의 말에 이준기가 대답했다.
“말 나온 김에 한번 던져볼까요?”
이준기는 책 한 권을 뽑아 벽을 향해 던졌다.
충격을 벽이 흡수하고, 책은 맥아리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광경이다.
예상과 다른 결과에 사람들은 놀랐다.
벽을 향해 날아간 책은 그대로 운동량을 유지한 채 튕겨져 나왔다.
“벽에 공격당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
쿠쿵.
케이지 안에 갇힌 채로, 파이톤(Python)이 쓰러졌다.
철창 안에 갇힌 상대로 싸우는 것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파이톤은 입에서 독화살을 뱉어내는 원거리 공격을 해왔으므로, 철창 안에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방안 네 구석에 놓인 케이지 안의 생물이 모두 쓰러지자, 남쪽 벽에서 문이 나타났다.
공격대원들이 탄성을 질렀다.
“아, 역시!”
“벽에 쓰인 설명대로 하니까 되네요. 혹시 속이는 것인가 해서 조금 불안했는데.”
“앞으로도 설명은 잘 읽어야겠어요.”
이준기는 상태창에 적어 놓은 던전 유형 관련 메모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작년 여름 신림동 고시원에서 깨어난 이후, 미래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그는 틈나는 대로 메모를 해왔다.
‘문 뒤에 문’ 포맷은 이준기로서도 두 번밖에 경험이 없고, 전체적으로도 흔한 포맷은 아니다.
메모해 두니까 이렇게 쓸 일이 생기지 않는가.
‘현재까지 서문을 두 개 연속으로 열었다. 회전판에서 현재 방의 위치는 북서쪽, 즉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퍼즐 형태. 이번에 남쪽 문이 개방되었으니, 회전판 위치는 반전··· 즉, 남동쪽이다. 소수의 적을 상대하는 미로라는 얘기.’
모두 100개의 문을 열어야 하는 이 던전 포맷은 100% 규칙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슈아의 연구팀도 그렇게 결론 내렸고, 이준기 일행이 경험을 토대로 정리한 결과도 같다.
방의 유형은 모두 8개가 있고, 다음번 방으로 통하는 문의 방향에 따라 그 방의 유형이 정해진다.
모든 방에는 입구 하나, 출구 하나뿐이다.
방에서 방으로 옮겨 다니는 형식이지만, 본질은 일직선의 이동 경로다.
횡 스크롤 게임과 마찬가지다.
‘미로라면 기습에 가장 취약한 형태인데, 상대해야 할 적도 소수정예라는 얘기. 경고해야 하겠지.’
남쪽 문을 향해 터벅터벅 걷는 일행의 뒷모습을 향해 이준기가 물었다.
“휴식 필요하신 분?”
바실리사와 미겔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마지막 파이톤을 처리했던 세르게이만이 대답을 주저했다.
조금 쉬고 싶은 기색인데, 발목 잡는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말을 못 하는 듯.
이준기가 제안했다.
“조금 쉴까요?”
“100개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겨우 다섯 개 열었어요.”
“하루에 스무 개씩 열면 닷새 정도 걸리겠네요.”
“네?”
“아니, 농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적은 아브람이에요. 던전 클리어는 부가적인 목표일 뿐입니다.”
“아··· 그랬었죠.”
미겔이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세르게이도 바실리사도 자리에 앉았다.
바깥은 겨울이지만, 실내 던전은 조금 더웠다.
세르게이가 맨머리 위로 헬멧을 벗는 듯한 동작을 취하자, 그의 오른손에 해골 가면이 쥐어졌다.
“휴우··· 덥네. 투구까지 쓰고 있으려니.”
세르게이의 투구, ‘해골왕의 면갑’은 착용 상태에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미겔 산체스의 성흔, ‘량차오의 망치’에 의해 그런 특성이 부여되었다.
성능은 준수하나 보기 흉한 투구라서 나름 딜레마가 있었는데,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결국, 투구의 모습을 가장 많이 봐야 하는 것은 같은 팀 멤버들 아닌가.
머리를 내려치려고 하는 적을 기만하는 효과도 생겼으니 일석이조다.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이준기도 자리에 앉았다.
네 명이 둘러앉은 상황. 카드라도 돌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다음 방 포맷은 조금 위험하다. 미래 얘기를 해줘야 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 그냥 직감이라고?
이준기는 잠깐 생각했다.
“다음 방은··· 조금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세르게이와 바실리사가 반응했다.
“아··· 또 나왔다.”
“준기 씨, 다음 방에서 뭐가 나올지도 알아요? 그건 또 어떻게···”
이준기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냥··· 느낌인데요.”
“준기 씨는 무슨 직감이 매번 맞아요? 아무래도 수상한데.”
“말 못 할 사정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수상하죠?”
“말 못 할 사정이야 사람마다 다 있겠지만··· 준기 씨는 그런 사정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던 바실리사가 이준기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니, 아니··· 됐어요. 우리 규칙 하나 정할까요? 말 못 할 사정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걸로.”
하지만 이제는 설명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바실리사, 세르게이와는 이미 한 팀이고, 미겔도 결국 한 팀이 될 것이니까.
이준기는 마음먹은 대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성흔이라는 거 있잖아요.”
이준기가 말을 꺼내자, 세르게이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어떤 성흔은 남들에게 내보이기 곤란한 것들도 있습니다. 제가 그래요.”
바실리사가 말했다.
“역시··· 성흔이었군요!”
“제 성흔은 좀 복잡해요. 그런데 그냥 정보를 얻는 형태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세르게이가 끼어들었다.
“내 스킬 트리가 어떻고 아이템은 뭘 가지고 있는지, 다 아는 게 혹시 성흔 아닐까 생각은 했는데··· 성흔이라는 걸 본 적도 없고, 내가 워낙 뭐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잠자코 있었지.”
“배려해줘서 고마워, 세르게이. 사실, 전략적으로 그런 것도 있었지.”
“무슨 말이야?”
“처음에 만났을 때 말야. 세르게이같이 실력 있는 구원자에게 얕보이면 곤란하니까, 뭔가 엄청난 숨겨진 힘이 있는 것처럼 에둘러 말한 거거든.”
“하하하. 그건 좀 거짓말 같은데.”
100% 거짓말은 아니다.
적이라면 기를 죽여야 하고, 아군이라면 기를 살려주는 게 좋다.
당시의 세르게이는 적에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신비한 미지의 힘이 있어 보이도록 하는 게 전략의 일부였다.
세르게이와의 대화가 끝나자, 바실리사가 논평했다.
“정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면, 준기 씨 성흔은 정말 대단하네요. 그거, 적에게도 통하는 거죠? 예를 들면 오크 주술사의 마나가 얼마나 남았는지.”
“이론적으로는 그래요.”
“이론적으로?”
“사정거리가 5미터 밖에 안 됩니다. 게다가 정신 집중도 해야 하죠.”
“아···”
“오크 주술사에게 5미터 거리로 접근해서 정신 집중을 하느니, 그냥 때려잡고 말죠.”
“하긴···”
“게다가, 적 마법사의 마나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계산하면 알 수 있으니까요. 그쪽이 훨씬 좋은 방법이죠.”
세르게이가 끼어들었다.
“에? 그게 더 좋은 방법이라고? 수학이?”
“수학이 아니고, 산수인데.”
“아니, 아무튼 계산해야 한다며?”
“세르게이, 공대생 아니었어?”
“공대라고 다 계산 잘하는 거 아니다. 편견은 좋지 않아.”
“하하하.”
미겔이 물었다.
“그래서, 이준기 씨. 저쪽 방에 뭐가 있는지 보인다는 겁니까?”
“아뇨. 보이는 건 아니고, 대략 느낌이 와요. 거기에 제가 미리 공부한 내용을 조합하면, 거의 결론이 나오죠.”
본격적인 거짓말 부분이다.
던전 포맷이나 몬스터에 관한 지식은 그저, 그가 80레벨까지 오르며 쌓아 올린 실전 지식일 뿐이다.
그러나, 죽는 대신 과거로 돌아온 그 사건을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성흔을 신비한 능력이라고 한다면, 미래에 대한 기억을 지닌 채 과거로 돌아온 그의 ‘운명’을 성흔의 일부라고 얼버무린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눈앞의 상대에 대한 정보를 읽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인데, 그것도 제 성흔의 일부입니다.”
“그 성흔··· 이름이 있겠죠?”
“’이르헬의 눈’입니다.”
“제 성흔 이름과 형식이 같네요. 량차오의 망치. 이르헬의 눈. 아무개의 무엇.”
미겔의 말대로, 대개의 성흔이 그런 식으로 작명되어 있다.
일반명사로 되어 있는 성흔에 비해 고유명사가 포함된 성흔이 더 상위 능력인 경우가 많다.
헬렌 카자크의 ‘라로쉬의 변칙’, 프리실라 세딘티의 ‘자캉의 눈속임’, 그리고 무엇보다··· 조슈아 테일러의 ‘카인의 징표’.
물론 예외는 있다.
바실리사 엘리셰프의 ‘포켓 유니버스’처럼, 일반명사 작명이지만 엄청난 성능을 보이는 것이 있고, 이준기에게 선택지로 주어졌던 ‘느뤼엘의 흡수’처럼 고유명사가 들어감에도 성능이 별로인 것도 있다.
“아무튼, 부럽네요.”
미겔은 깍지를 낀 두 손을 머리 뒤에 대며 뒤로 눕는 시늉을 했다.
세르게이가 말했다.
“그 대사는 제가 해야 하는 것 아녜요? 여기 앉은 네 명 중에는, 성흔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거, 잊지 마시라고요.”
“아··· 죄송해요.”
즉흥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세르게이는 믿는 것이 확실했다.
바실리사도 믿어주는 느낌이었다.
조금 유보하는 듯한 표정이 보이는 듯했지만, 이준기는 그것이 그저 바실리사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미겔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셋 중에서 가장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역시 동료였던 키라트(Keerat)라면 그냥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말 일을, 미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워낙 심성이 착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순수하다고나 할까.
미겔이 지나가듯 말했다.
“이준기 씨가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