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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2: 교차로 (6)
Episode 42: 교차로 (6)
“이리나!”
나무 뒤에 엄폐하고 움직이면서, 바실리사는 이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외쳤다.
이리나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바실리사! 배신자 처단의 날이 왔구나! 반가워 죽을 지경이다!”
“이리나! 배신자는 보리스다! 내가 아냐!”
“하하하! 여기까지 와서 발뺌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을 해봐! 내가 먼저 기습을 당했어! 툴라에서!”
“그런 얘기 들으려고 널 기다린 게 아니다! 보리스를 왜 죽였나?”
“정당방위였다! 보리스가 먼저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내 질문은 그게 아냐!”
이리나의 목소리가 울컥하는 느낌으로 잠겼다.
분이라도 삭히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던 이리나가 다시 외쳤다.
이번에는 목소리의 위치가 꽤 많이 이동했다.
바실리사와 마찬가지로 이리나도 여기저기 움직여 다니면서 외치고 있었다.
“보리스다! 너와 나를 푸가초프의 대의로 이끌었던 사람! 왜! 왜 죽였냐?”
잠시, 바실리사도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푸가초프, 그리고 보리스.
“그래서! 그래서 더 배신감이 컸다!”
“그래서 잔인하게 죽였냐?”
“즉사였어! 머리에 쐈단 말이다!”
이리나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묻어났다.
“그래! 머리에 쐈다고? 그리고··· 시체를 태워버렸냐?”
“아냐! 우린 그냥 현장을 벗어났다! 시체가 불타 있었다는 말이야?”
“현장 자체가 다 없어졌다! 건물이고 사람이고 불에 타서 전부 없어졌단 말이다!”
아브람이 현장을 확인하고 나서 불태운 것이지만, 바실리사도 이리나도 그런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이리나가 다시 외쳤다.
“죽여 주마, 바실리사! 덤벼라!”
“이리나! 우린 싸울 이유가 없어!”
말 대신, 이리나는 총으로 대답했다.
바실리사가 마지막 말을 했던 위치로, 총알 한 무더기가 날아왔다.
투두두두.
“이리나!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누가 누굴 죽인다는 거야!”
이리나가 다시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수풀 사이를 뛰면서, 바실리사가 다시 말했다.
“이리나! 나에게는 동료들이 있다! 넌 날 이기지 못해!”
“다 덤벼!”
“이야기를 해보면, 오해가 풀릴 거야!”
“전부 다 죽여주겠어!”
이를 악문 이리나의 외침에 이어, 부채꼴 모양으로 난사된 총알 스무 발 정도가 연속해서 날아왔다.
철컥, 철컥.
방아쇠가 반응하지 않자, 이리나는 주머니에서 여분의 탄창을 꺼냈다.
탄창을 교환하면서, 이리나는 주변에 외쳤다.
“뭣들 하는 거야! 공격해! 공격하라고!”
고용한 저격수는 모두 15명이나 된다.
구원자는 아니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출신의 전직 특수부대원들이다.
가진 돈을 전부 다 털어, 사벨리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 멍청한 녀석들아! 받은 돈 만큼 일을 하란 말야! 공격해!”
두 번이나 큰 소리로 외쳤으나, 반응이 없다.
분개해서 눈물을 흘리며, 이리나는 탄창을 새로 넣은 소총을 들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건너편을 향해 미친 듯이 총알을 난사했다.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선 그녀의 긴 그림자가 마구 떨렸다.
“바실리사!”
바실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실리사! 이 비겁한 년!”
탄창을 다시 비우고, 이리나는 나무 뒤로 숨었다.
비어버린 탄창을 떨어뜨리고, 그녀는 품속에서 새 탄창을 꺼냈다.
탄창 여러 개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런 젠장!”
짜증을 내며 그녀는 다시 품속을 뒤졌다.
손에 걸린 새 탄창을 꽉 쥐고, 그녀는 소총에 끼우려고 했다.
탄창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공중을 날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졌던 탄창들도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먼 거리에, 아침 해를 정면으로 받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를 향해, 탄창들이 두둥실 떠 날아가고 있었다.
*****
이리나는 군용 단검을 빼 들고 달려왔다.
남자와의 거리를 반 정도 좁혔을 때, 그녀는 정강이를 강하게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남자를 향해 날아가던 탄창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얼음 화살!”
땅에 누운 채로 이리나가 외쳤다.
그녀에게 탄창들이 마치 돌팔매처첨 날아들었다.
스킬 시전을 방해받은 그녀는 옆으로 구르면서 다른 스킬을 펼쳤다.
“물 보호막!”
거대한 물방울이 그녀를 감쌌다.
돌팔매처럼 날아들던 탄창들이 물방울에 처박혔다.
“휴우.”
일단 공격을 막은 이리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자신을 공격했던 탄창들은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아.”
가볍게 탄성을 지르던 그녀의 손을 향해 거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쥐고 있던 군용 단검이 멀리 수풀 속으로 날아갔다.
발차기의 주체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목으로 칼날이 다가왔다.
“이리나.”
바실리사의 목소리.
“바··· 바실리사!”
*****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목숨을 걸고, 저기 저년과 결투를 하는 것.”
이준기를 표독스럽게 쳐다보면서 이리나가 말했다.
이준기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오른편에 선 바실리사가 말했다.
“이리나.”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걸 알려주고 싶어.”
“집어치워! 보리스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내가 죽든가, 네가 죽든가. 내게 남은 길은 그것 하나뿐이다.”
뒤편에서 보고 있던 세르게이가 끼어들었다.
“이봐, 아가씨. 나도 그 현장에 있었어. 보리스가 배신한 게 맞다고. 직접 그렇게 얘기했어.”
“베신? 누굴 배신했다는 거야?”
“그야··· 바실리사, 그리고 푸가초프를 배신한 거지.”
“하하하! 누가 누굴 배신했다고? 바실리사를 푸가초프에 입회시킨 게 보리스다! 그런데 보리스가 배신했다고?”
바실리사가 대답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야. 보리스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 세르게이는 죽을 뻔했지.”
“그건 너희 사정이야. 그따위 시시콜콜한 걸 나한테 얘기할 필요가 없잖아.”
“그런가··· 하지만 그가 죽을 뻔했던 건 사실이야. 보리스가 우리 모두를 죽이려 했다고.”
“그럼 죽어! 죽었어야지! 왜 네가 살아 있지?”
듣다 못 한 미겔이 끼어들었다.
“이봐요, 보로비예프 씨. 그게 말이 됩니까? 보리스가 죽이려고 하면 죽어야 한다고요?”
“넌 뭐야? 닥쳐!”
“하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군요.”
이리나는 다시 목청껏 악을 썼다.
“내가 원하는 건, 저년이다! 결투를 하자!”
이번에는 이준기가 대화에 나섰다.
“이리나. 우리가 오늘 여기에 올 거라는 것. 어떻게 알게 된 거지?”
“푸가초프의 정보망을 우습게 보지 마라.”
“푸가초프가 바실리사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뒤쫓고 있다는 말인가?”
“당연하잖아.”
“푸가초프는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거지?”
“내가 왜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 하지?”
바실리사가 대답했다.
“이리나.”
“바···실리사!”
“질문에 대답해준다면, 네가 원하는 결투에 응하겠다.”
“저··· 정말이지?”
달콤한 복수의 환상이라도 본 것인지, 이리나의 눈에 눈물이 작게 맺혔다.
이준기와 세르게이가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바실리사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그들을 저지했다.
이준기과 바실리사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바실리사는 고개를 돌려 이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할게.”
“좋아. 대답하겠다.”
“푸가초프가··· 나를 배신자로 판단한 거야? 제발 사실대로 말해줘.”
“그래.”
“무슨··· 근거로?”
“보리스의 마지막 일정은 널 만나는 거였어! 그리고 그 후에 죽었지. 근거가 더 필요해?”
“넌, 보리스의 공식 접촉점이 아니잖아. 어떻게 그의 일정을 알게 된 거지?”
“그래. 나와 보리스는 공식 접촉점이 아니지. 그래도 우리는 늘 연락을 취해 왔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이리나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씩 웃었다.
“날 만나러 포돌스크로 오기 전에··· 보리스가 너에게 한 마지막 말이 뭐였는지, 얘기해줄 수 있어?”
“너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포돌스크의 ‘나폴레옹’이라는 술집에서 만난다는 얘기였다.”
“그 술집, 원래 우리 조직에서 사용하던 곳이야?”
“알 게 뭐야.”
“나는 그 술집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묻는 거야. 내가 주로 극동 관구에서 활동해서 그런 건가 해서··· 넌 모스크바에서 주로 활동했으니 아는 데인가 해서 묻는 거야.”
“모르던 곳이다.”
“그렇다면, 보리스가 나를 그런 장소로 부른 것이 이상하지도 않아?”
“보리스는 간부급이었어. 평 조직원인 우리가 모르는 장소를 알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 이상해?”
이준기가 끼어들었다.
“이런 말이 있지. 같은 현상을 몇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가장 간단한 설명이 제일 나은 거라고.”
이리나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격언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내 무기의 이름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그게 여기서 왜 나오냐고?”
“당신의 복잡한 설명보다는, 그냥 보리스가 배신자인 편이 훨씬 간단한 설명이라는 얘기지. 보리스가 바실리사를 죽이려고, 모스크바 마피아의 사업장 한 곳으로 그녀를 끌어들인 거라는.”
“우··· 웃기지 마!”
“게다가, 죽기 전에 보리스는 모든 걸 자백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배신자는 보리스였어. 당신이 바실리사에게 복수심을 불태울 이유가 없어. 분노의 대상이 잘못됐다고.”
“아냐! 아냐!”
이리나는 눈을 감은 채로 연신 소리를 내질렀다.
바실리사가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흠칫하며 이리나가 눈을 떴다.
어깨에 바실리사의 손이 올라온 것을 보고 그녀는 경기를 일으켰다.
“바실리사! 이 나쁜 년!”
“이리나. 제발 내 말을 좀 들어봐.”
“필요 없어! 나와 결투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지금 당장 하자!”
“이리나. 우리끼리 싸울 이유가 없어. 제발, 푸가초프에 내 결백을 밝혀줘. 그리고, 우리 함께 마피아에 맞서 싸우자.”
이리나가 눈을 치켜뜨고 바실리사를 노려보았다.
잠깐 눈을 깜빡이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리스가 죽었어! 푸가초프는 개한테나 줘버려!”
“이리나···”
“푸가초프 따위, 나에게 한 푼 가치도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억울하게 죽어간 보리스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뿐이야.”
“도대체 왜···”
“보리스는 내게 아버지나 마찬가지야! 아버지의 원수인 너를 죽이는 것··· 나에게 삶의 목표라고는 그것뿐이야!”
“보리스는 내게도···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어. 하지만···”
“그런데 너는 아버지를 죽였군?”
“보리스가 먼저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그럼 죽어! 네가 죽었어야지! 왜 보리스가 죽어!”
세르게이가 혀를 찼다.
“후우···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보리스가 신이라도 되는 거야?”
이리나가 세르게이를 흘겨보며 외쳤다.
“닥쳐! 네가 뭘 알아!”
이준기가 이리나를 향해 말했다.
“이리나··· 당신의 다른 접촉점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나? 바실리사 말고도 공식 접촉점이 하나는 더 있었겠지?”
“사벨리 아이바조프스키. 전화번호도 지금 당장 찍어주지.”
곧바로 대답을 해버리는 그녀에게 모두 조금 놀랐다.
전화번호를 받아든 이준기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사벨리에게 전화를 해도 좋다는 거야?”
“어차피 받지 않을 거야. 모르는 번호라면.”
“당신 전화를 빼앗을 수도 있어.”
“전화는 지금 가지고 있지도 않아. 내가 그렇게 허술해 보여?”
“그런데도 사벨리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준 이유는 뭐지?”
“푸가초프··· 내겐 아무 의미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런 거다. 이제 알겠어?”
“그래. 조직이라는 것··· 아무 의미 없을 수도 있지. 하지만 동료라면? 그건 좀 다르지 않을까?”
“그래, 동료! 동료 보리스가 죽었다! 그것도 동료라고 믿었던 저 여자에게!”
“바실리사는 당신에게 동료가 아니었나?”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지?”
“성급한 행동으로 후회할 일 만들지 말았으면 해. 배신자는 보리스인데 왜 당신과 바실리사가 싸워야 해?”
“보리스가 죽었으니까! 바실리사가, 저년이 보리스를 죽였으니까!”
쪼그려 앉아 이리나와 눈을 맞추던 이준기가 일어섰다.
여전히 쪼그려 앉은 바실리사가 이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그것뿐이야? 복수하는 것? 보리스가 이걸 원할까?”
“당연하잖아! 보리스는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할 거야! 네가··· 네가 살아있으니까!”
이리나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흘러내렸다.
바실리사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좋아, 이리나. 결투를 받아들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