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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2: 교차로 (4)
Episode 42: 교차로 (4)
파벨 아킨페프(Pavel Akinfeev).
우크라이나 민병대에서 키예프 서부를 총괄하는 간부다.
그의 지부에도 유럽 출신의 구원자들, 소위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미겔 산체스가 그중 하나다.
1월 25일 저녁, 미겔이 지부에 나타났을 때, 그는 적지 않게 놀랐다.
살아남았다니.
“미겔! 살아 있었구나!”
“파벨, 돌아왔습니다.”
“이니고는?”
“작전 중에··· 사망했습니다.”
“그럴 수가··· 정말 유감이네.”
“어쩔 수 없죠. 전쟁이니까요.”
애도의 의미인지,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 파벨은 물었다.
“차원문 10831, 봉쇄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어제,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보고는 받으셨습니까?”
“14km 떨어진 우리 측 초소에서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다. 차원문이 사라졌고, 총격전의 흔적이 있었다고 하더군.”
“얘기가 좀 깁니다.”
“괜찮다. 정보가 중요하니까.”
미겔은 이야기했다.
차원문을 지키다가 기습을 당한 일부터 시작해서, 차원문 안으로의 도주, 러시아 마피아들과의 싸움, 그리고 바실리사 일행에 의한 구조까지.
이준기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그가 부탁했기 때문이다.
“바··· 바실리사 엘리셰프? 그 이름이 맞나?”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녀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서 러시아 침략자 놈들에 대항해 싸워줬다고?”
“네. 그녀의 일행 세 명 전부가요.”
“나머지 둘의 신원도 확인했나?”
“네. 세르게이 로스코비츠, 그리고 알료샤 스즈키입니다.”
“스즈키?”
“일본계 러시아인입니다.”
“셋 전부, 러시아인이라고?”
“네.”
“그런데 러시아에 맞서 싸웠다?”
“러시아가 아니라, 마피아에 맞서 싸우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 그런 건가?”
언뜻 들으면 무슨 말장난인가 싶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벨은 미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알았어. 정말 수고했네, 미겔. 지금은 일단 쉬라고.”
“감사합니다.”
“따뜻한 물은 8시부터 9시까지만 나올 거야. 그때 샤워라도 하게.”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사라지는 미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파벨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쭙잖은 정의감.
그것이 저들을 우크라이나까지 오게 하는 힘이다.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가듯, 자기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이 먼 곳까지 온다.
아니, 화톳불에 날아드는 부나방 쪽이 더 정확한 비유일까.
고맙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참전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라는 대국과 싸움을 지속할 수 있다.
그렇게 싸움이 지속되기 때문에, 퇴역 군인 파벨도 남 부럽지 않은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 위기로 조기 예편을 강요받았던 그에게, 이번 전쟁은 기회다.
대놓고 떠들 수 있을 만큼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현실은 현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폴란드나 리투아니아까지는 몰라도, 잘 사는 서유럽에서 마치 순례 여행이라도 온 듯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파벨은 고까운 생각이 가슴속에서 고개를 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구원자도 아니고 전쟁 경험도 전혀 없는 일반인 봉사자들이 무용담이랍시고 지껄여 대는 헛소리를 듣고 있자면, 부아가 치밀어 찬물이라도 마셔야 했다.
지금 옆방에서 바로 그런 ‘무용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주일 전에 도착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다.
출신국은 폴란드, 프랑스, 그리고 오스트리아라고 들었다.
총을 잡아본 적도 없는 일반인 자원봉사자들.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부류다.
그러나 자원봉사를 자청하고 몰려드는 그들을 내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실제로 도움이 되는 봉사 인력까지 끊길 가능성이 있다고, 상부에서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겔과 대화가 끝나고 나니, 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젊은이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다시금 문을 건너 이쪽으로 들려왔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쳤지. 나도 내가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니까!”
“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정말 대단해!”
“이렇게 차곡차곡 경험치를 쌓아가는 거 아니겠어?”
정말 부아가 치미려고 한다.
‘정찰’이라는 이름으로 시내에 구경 나갔다가 어디에서 총소리라도 듣고 부리나케 도망 온 모양이다.
‘경험치라니, 이게 너희들에게는 FPS 게임으로 보이는 거냐.’
그들의 잡담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된 임무를 받지 않아서 조금 실망했었는데 말야. 오늘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오히려 그게 다행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맞아, 맞아. 난 네 얘기만 들어도 무섭다. 집 생각이 다 나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물론이지. 큰 뜻을 품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
“그래. 우린 정의를 실현하려고 머나먼 타국 땅까지 온 거니까.”
귀를 막을 수도 없는 노릇.
파벨은 텔레비전을 켰다.
연일, 전쟁 소식으로 뉴스는 한 시간을 다 채운다.
‘정의? 너희들에게는 어쭙잖은 젊은 날의 로망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생활이다.’
좋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생활’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평생 운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오던 그에게 큰 행운이 찾아왔다.
아직까지는 서로 흩어져 있는 점들.
그 점들을 하나로 이어 도형을 완성하면, 뭔가 큰 보상이 뒤따를 것 같은 느낌이다.
바실리사 엘리셰프, 미겔 산체스, 그리고··· 그 사람.
*****
러시아 국경이 멀지 않은 곳.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접경지대.
벨라루스 쪽에서 군용 차량 한 대가 다가와 검문소에 섰다.
꾸벅거리며 졸던 보초병은 선임병의 호통 소리에 퍼뜩 깼다.
보초병은 총총히 뛰어나가고, 선임병은 다시 웅크린 채 쪽잠을 청했다.
낡아 빠진 지프 차량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차량이라니.
아니, 이런 시간이 아니더라도 차량 통행이 별로 없는 길이다.
우크라이나 번호판을 단 군용차량이니, 별문제는 없다.
그냥 지나가면 될 일을, 굳이 검문까지 해야 하다니.
단잠을 깬 짜증으로 자꾸 구겨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펴고, 보초병은 차량을 향해 경례를 했다.
운전석 창문이 열리자, 보초병은 정해진 인사말을 기계적으로 읊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름과 소속을 말씀해 주십시오.”
“우크라이나 민병대 소속, 파벨 아킨페프 중령이오.”
과연, 중령 정도는 할 만한 나이의 노병이었다.
그런데 중령이 운전을 하다니.
다른 사람들은 한참 나이가 어린 젊은이들인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일행분들은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원봉사자들이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자원봉사자, 그러니까 유럽 각국에서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말한다.
중령이 직접 운전해서 모셔오는 걸 보면, 구원자들인 모양이다.
“잠시만··· 얼굴만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직접 모셔가는 분들인데.”
“절차라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중령님.”
중령이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보다는 선임병의 호통이 더 무섭다.
보초병은 플래시를 비추어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킨페프 중령 옆자리에 여자가 앉았고, 뒷자리에는 남자 둘이 있었다.
보초병은 한 사람씩 플래시를 비추어 살펴보다가 중령 앞자리의 여자에게 한 번 더 불빛을 비추었다.
그저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초록빛 눈동자에 빨려들 것만 같다.
패션모델이나 영화배우라도 될 것 같은, 굉장한 미인이다.
“아앗! 불빛을 그렇게 정면으로 비추시면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확인 차원에서··· 그런데 러시아어를 아주 잘하시는군요?”
“벨라루스 출신이에요.”
목소리도 예쁘다.
정말, 이런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는구나.
젊은 병사가 버릇이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중령은 창문을 올렸다.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보초병은 멀어지는 지프 자동차를 향해 경례를 했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아직 복구가 덜 된 길 위로, 요정을 실은 자동차는 덜컹거리며 멀어져갔다.
자동차의 불빛이 마침내 사라지자, 보초병은 초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헐레벌떡 왠지 들뜬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선임병이 말했다.
“뭐야? 문제라도 있었던 건 아니지?”
“네. 민병대 중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응?”
“여자가 같이 타고 있었습니다. 벨라루스 출신 자원봉사자. 아마, 구원자인 것 같습니다.”
“예뻤어?”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어요.”
선임병이 흥미를 보였다.
“정말? 구원자라고 했지? 헬렌 카자크나 프리실라 세딘티 정도 된다는 얘기야?”
“더, 더 예쁜 것 같아요.”
“그래?”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그런 짓 하다가 화염구 맞는다.”
*****
접선 장소에 도착했다.
3국 접경 지역의 우크라이나 쪽 소도시, 크라프초프카.
가로등 몇 개만이 지키는 어두운 새벽.
희미하게 불이 켜진 건물의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나왔다.
“알료샤!”
“미겔!”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미겔은 이준기를 부둥켜안았다.
익숙지 않은 인사법이지만, 이준기는 미겔을 꽉 안으며 화답했다.
생사를 같이했던, 아니 같이하게 될, 전우다.
‘바스크라고 해도, 결국 스페인 문화군.’
세르게이, 바실리사에 이어 아킨페프 중령까지, 미겔은 같은 방법으로 인사했다.
포옹을 풀면서, 파벨이 미겔에게 말했다.
“미겔··· 이건 못 보던 인사법이군. 미겔이 스페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걸.”
“하하, 중령님. 목숨을 구해줬던 친구들이라 반가워서··· 제가 좀 오버한 건가요?”
“오버는 무슨. 아주 좋구만.”
“안으로 들어가시죠.”
미겔이 문을 열려는 그 순간,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울부짖으며 골목에서 큰길로 나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우와아아! 제··· 제발! 사··· 살려주세요!”
모두들 놀라면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계속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말을 더듬었다.
“포··· 폭탄이··· 살려··· 제발···”
폭탄이라는 말에 그들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사람은 한 발 더 앞으로 나오면서 간신히 말을 짜냈다.
“다··· 당신들이··· 날 구··· 구해줄 거라고··· 제··· 제발!”
가로등 밑에 서서, 그는 재킷 앞섶을 펼쳐 보였다.
그는 마치 방탄조끼처럼 폭탄 띠를 두르고 있었다.
폭탄 더미 위에는 글씨가 새겨진 A4 용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투명 테이프로 덕지덕지 도배하지 않았다면, 눈물과 땀으로 글자가 다 씻겨 내려갔을 것이다.
- 바실리사 엘리셰프. 그라옌코로 와라. 그때까지 한 명씩 죽이겠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글자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동안, 폭탄 띠를 두른 그 사람은 부들부들 떨었다.
이 추운 날씨에,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다··· 당신들이 구··· 구할 수 있다고···!”
파벨이 외쳤다.
“우··· 우린 폭발물 전문가가 아냐!”
세르게이와 바실리사도 당황해서 외쳤다.
“어··· 어떻게 하지?”
“건드리면 폭발하는 거죠?”
세르게이가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이준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폭발물 제거는 해본 적이 없는데···”
폭탄 띠를 사람이 절망스럽게 외쳤다.
“저··· 저는 그럼 어··· 어떻게!”
이준기가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다.
“모두, 물러서 주세요. 멀리!”
사람들이 물러섰다.
“그리고 당신! 저와 함께 마을 바깥으로 나가요. 여긴 너무 위험해요!”
“어··· 언제 터··· 터질지 모르는데··· 어딜 가라고요?”
“다른 사람들까지 다칠지 모르잖아요! 제발, 저와 함께 저쪽으로, 천천히.”
“아··· 아··· 사··· 살려줘!”
진땀 나는 순간이 계속되었다.
한참을 걸어서 그들은 마을 외곽으로 이동했다.
겨우 200미터 정도를, 그들은 5분에 걸쳐서 이동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저··· 저요? 아··· 알렉스.”
“알렉스, 제 말 잘 들으세요.”
“네··· 네!”
“저는 지금부터, 염력을 이용해서 폭탄 띠를 당신으로부터 떼어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멀리에 있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급하게 움직이거나 하시면 안 됩니다.”
“네?”
“죄송하지만, 저는 폭탄 제거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러시아 마피아가 당신을 왜 우리에게 보냈는지 모르지만···”
“다··· 당신들이! 나··· 날! 구··· 구해줄 거라고!”
“침착하세요. 저는··· 조금 떨어진 저쪽에서, 폭탄 띠 제거를 시도하겠습니다.”
“아··· 안 돼요! 가··· 가까이에서 보··· 보면서 해도 되··· 될까 마··· 말까 한데!”
이준기가 멀어지려 하자, 그는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이준기를 따라오려 했다.
“제발!”
“아··· 안돼!”
이준기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알렉스의 몸이 살짝 공중에 뜬 상태로 뒤로 움직였다.
“어··· 어?”
“제발! 허둥대지 마세요!”
“으아아아!”
알렉스는 공중에 뜬 채로 허둥대며 뒤로 움직였다.
어두운 새벽, 공중에 뜬 채로, 자신의 의지에 거슬러, 보이지도 않는 뒤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분명 공포스러운 경험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까지 다치게 할 수 있는 폭탄이다.
지시를 따르지 않는 알렉스를, 이준기는 통제해야 했다.
“제··· 제발!”
알렉스의 울부짖음에 귀를 닫고, 이준기는 집중했다.
알렉스의 몸을 뒤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폭탄 띠를 몸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폭탄 띠가 덜컥거리는 소리에, 알렉스는 이성을 잃었다.
“으아아아! 나··· 나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