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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1: 런어웨이 트레인 (7)
Episode 41: 런어웨이 트레인 (7)
그들은 숙소를 찾아 낮 동안 잠을 청했다.
오후 3시경, 잠을 다 잔 바실리사가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이준기가 컴퓨터를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벌써 일어났어요?”
“바실리사! 설마, 저 때문에 깬 건 아니죠?”
“푹 잤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뭐 하세요?”
“뉴스 정리 중이에요. 요 며칠 못 해서 조금 밀렸네요.”
“옆에서 구경해도 되죠?”
“물론이죠.”
이준기가 미소를 지으며 바실리사에게 옆자리를 권했다.
둘은 함께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았다.
이준기는 빠른 속도로 뉴스 제목을 훑었다.
세상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내전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있었다.
- 동부 연합,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대대적인 반격 개시.
- 동부 연합 전력에 히스패닉 계열 구원자 대거 합류. ‘멕시코 개입설’ 사실인가?
- 막바지로 치닫는 중국 내전, 홍콩-선전으로 쫓긴 반군의 마지막 선택은?
- 홍콩, 선전에서 이어지는 피난 행렬. 경제 타격 불가피.
- 중국 정부, 올해 경제성장 목표치 또다시 하향 조정.
내전보다는 국경 분쟁이 진행 중인 지역이 훨씬 더 많았다.
아프리카처럼 국경선이 멋대로 그어진 곳들, 그리고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로 인해 인위적으로 민족 간 갈등이 만들어진 지역들이 중심이었다.
- 미얀마, 로힝야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로힝야족 반격에 방글라데시 구원자들 가담. 미얀마 정부 비난 성명.
- 캄보디아-태국 국경에서 산발적인 총격전 발생. 구원자들 개입 의혹.
- 남수단 사태 악화 일로. UN 총회 규탄 결의에도 불구하고 수단군 작전 지속.
- 빌바오에서 다시 폭력 사태 발생. 평화 집회로 시작하였으나 폭력 사태로 번져.
- 아르빌 폭탄 테러. 터키계 쿠르드족 배후 의심.
이준기의 뒤에 서서 컴퓨터를 바라보던 바실리사가 물었다.
“빌바오··· 미겔이 말했던 곳이죠?”
“네. 바스크 지방 중심 도시죠. 사흘 전 기사군요. 미겔, 마음이 복잡하겠는데요.”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카탈루냐도 독립한 마당에 바스크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예요. 바스크 쪽이 카탈루냐보다는 독립할 이유가 많죠. 박해도 많이 받았고, 그래서 무장 투쟁도 오래 했고요.”
“준기 씨는 역사에 꽤 빠삭하시군요.”
“글쎄요. 마니아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관심은 있죠.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부터 말이죠.”
이준기는 회상했다.
경찰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역사책을 보고는 했다.
역덕이라고까지는 말 못 해도, 역사 공부가 취미인 것은 맞다.
세계정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 다행이기는 하지만,
역사 상식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이 더 좋았을 것이다.
“거의 제목만 보고 넘기시네요. 지도에 표시만 해도 꽉 찰 것 같은데···이렇게 복잡한 게 정리가 돼요?”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해요. 대략적인 줄기만 파악하는 거죠.”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것만도 어려울 것 같아서 하는 얘기예요. 예를 들면, 아르빌 폭탄 테러는 뭐예요?”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조금 아시죠?”
“아뇨.”
이준기는 싱긋 웃었다.
“아니라는 대답, 단호하시네요. 조금은 들어보셨을 텐데. 쿠르드족은 중동지방에 사는 사람들인데,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네 개 나라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게 됐어요. 승전국들이 국경을 제멋대로 그어버렸기 때문이죠. 쿠르드족끼리 나라를 만들면 중동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나라가 됐을 거예요. 인구가 수천 만이거든요.”
“수천만 사람들을 서로 다른 나라에 살게 만들었다고요? 그건··· 지독하네요.”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고 있어요.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소수 민족의 설움을 겪으며 살고 있죠. 인종 청소 급의 대규모 살해 사건도 자주 일어나고요.”
“너무해요.”
“그래서 예전부터 쿠르디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 있는데, 이게 또 각 지역 쿠르드족에 따라 의견이 다 달라요. 예를 들면 예전에 쿠르디스탄이라는 나라가 있었을 때 수도는 아르빌이었거든요.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독립 국가 쿠르디스탄이 세워진다면 아르빌에 수도를 둬야겠죠. 아르빌은 지금 이라크 땅이에요. 그런데 쿠르드족 인구가 가장 많은 쪽은 터키랍니다. 그러니까 아르빌을 수도로 하면 이라크계 쿠르드족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불만이겠죠.”
“아하··· 그래서 아르빌 폭탄 테러의 배후가 같은 쿠르드족이라는 거군요?”
“네, 맞아요. 요즘 폭탄 테러는 구원자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추적이 어렵죠.”
“고마워요, 준기 씨. 역사 공부, 재미있네요. 슬픈 역사이기는 하지만.”
“다음은 우크라이나 뉴스를 챙겨보죠. 조금 전까지 직접 현장을 보고 오기는 했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알아봐야겠고, 언론이 어떤 식으로 왜곡해서 보도하는지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둘은 다시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분쟁 소식으로 가득 찬 세계 뉴스 섹션에서도, 우크라이나 내전은 맨 윗줄에 나오는 핵심 이슈였다.
규모도 크고, 가장 많은 나라들이 개입되어 있는 전쟁이므로 당연했다.
- ‘제2차 유로마이단’, 걷잡을 수 없는 흐름. 우크라이나는 현재 국가 기능 마비.
- 우크라이나 민병대, 경찰 당국의 공식 성명을 무시하고 자체 성명 발표. ‘우크라이나 경찰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 또다시 문화재 파손. 정부군과 반군은 서로 상대방 비난.
- 우크라이나 반군, 세바스토폴 장악. 친러시아 세력, 크림반도 탈환 눈앞.
- 키예프는 지금 불바다. 낮에도 외출은 꿈도 못 꿔.
이준기가 넘기는 뉴스 화면을 바라보던 바실리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우하하. 죄송해요. 자꾸 방해해서··· 하지만 뉴스 제목이 너무 웃기네요. 낮에도 외출은 꿈도 못 꾼다니.”
“그러게 말예요. 과장법이 조금 심하네요.”
“뉴스니까 어쩔 수는 없다고 쳐도 말이죠.”
“클릭 유도를 하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키예프는 그럭저럭 안전해’ 이렇게 제목을 뽑으면 누가 클릭하겠어요?”
“이제 정말 방해는 그만할게요. 저는 저쪽 방으로 사라지겠습니다.”
“아녜요, 바실리사. 저도 이제 쉬려는 참이었어요.”
이준기는 컴퓨터를 닫고, 일어섰다.
가방에서 원두를 꺼내며, 그는 바실리사에게 물었다.
“커피, 마실 거죠?”
“물론이죠.”
이준기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뉴스가 하나 있었다.
바실리사가 방에서 나오기 전에 확인했던 한국 뉴스.
- 랭킹 20위 문아린, 구원자 은퇴.
*****
해가 서쪽으로 한참 기울어진 다음에야 미겔과 세르게이가 일어났다.
바실리사와 이준기가 부엌에서 함께 요리를 하고 있었다.
‘뭐야··· 마치 신혼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세르게이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질투와 소외감이 적절하게 뒤섞인 듯한 감정일까.
‘이렇게 되면, 내가 둘 사이를 방해라도 하는 것 같잖아.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본 적이 없네. 대장은···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까? 바실리사가 예쁘기는 하지만 조금 선머슴 같은 데가 있어서···’
바실리사와 이준기가 테이블로 식사를 날랐다.
러시아식 수프, 보르시(Borscht)와 팬케이크가 나왔다.
그리고, 사각형의 플라스틱 상자 네 개와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주전자도 놓였다.
세르게이가 외쳤다.
“어! 도시락(Доширак)!”
러시아에서 유명하다고는 들었지만, 이준기는 이제야 처음으로 만나보는 것.
러시아어로 ‘도시락’이라고 쓰인 라면 포장이 왠지 반가웠다.
세르게이는 신이 나서 바실리사에게 물었다.
“마요네즈랑 프랑크 소시지도 있지?”
“물론이지.”
바실리사는 테이블 위에 프랑크 소시지, 마요네즈, 그리고 빵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빵으로 먹어도 되고, 팬케이크로 먹어도 되고.”
“웬일로 요리를 다 한 거야?”
“요리라고까지 할 것도 아니잖아?”
“보르시에, 팬케이크도 만들었으니까.”
“그냥··· 오랜만에 한번 해봤어.”
자신을 쳐다보는 세르게이와 미겔에게 이준기가 서둘러 말했다.
“저는··· 바실리사가 시키는 대로 양파 썰고, 물 끓이고··· 뭐 그런 것만 했어요.”
바실리사가 이준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근, 감자도 썰었잖아요.”
“아··· 그런가. 아무튼 저는 써는 기계라고나 할까. 기계로 대체 가능한 그런 단순 노동만 제공했습니다!”
“하하하! 그렇게까지 자신을 비하할 건 없잖아요.”
세르게이와 바실리사가 한마디씩 했다.
“대장이 요리까지 잘하면, 으으··· 그건 좀 짜증 나지.”
“아하하! 그게 정답이네, 세르게이!”
멋쩍어하는 이준기를 바라보며 세르게이와 바실리사가 웃었다.
어느새 테이블 곁으로 다가온 미겔이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가정식이군요. 러시아 요리는 저도 좋아합니다.”
세르게이는 손바닥을 비비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라면 수프를 넣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프랑크 소시지를 한 움큼 집어넣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나서, 세르게이는 마지막으로···
“으으으··· 그건···”
이준기가 세르게이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정색을 했다.
세르게이는 하던 일을 마치고 나서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어? 왜 그래, 대장?”
“마··· 마요네즈?”
“아! 도시락이 원래 한국산이지. 마요네즈가 이상해?”
“그··· 글쎄.”
“일단 먹어보면 그런 표정은 싹 들어갈걸?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대장 것도 내가 만들어주지.”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자라는 좌우명을 가진 이준기.
조금 자신이 없기는 했지만, 세르게이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프랑크 소시지는 상관없지만, 마요네즈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 이거 맛있네!”
이준기는 딱 한 입을 먹어보고 나서 포크로 라면을 폭풍 흡입했다.
라면 국물과 마요네즈가 묘하게 잘 어울렸다.
“역시, 새로운 길은 개척하라고 있는 것이지. 이건 정말 훌륭한 발명인걸.”
“러시아 사람들이 괜히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고.”
*****
점심 겸 저녁을 먹으며 그들은 향후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크라이나에 할 일이 남아 있어요. 저는 다시 국경을 넘겠습니다.”
미겔이 그렇게 말하자, 세르게이가 반응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저들도 이제 미겔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을 텐데.”
“걸어가면 됩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제 차원문 건에 대해서 보고도 하셔야 하는 거죠?”
“휴대폰으로 메시지는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만나서 협의할 일도 있고요.”
“이제 지부 레벨에서 벗어나시는 건가요? 우크라이나 민병대 본부에 입성하시는?”
“그건 그쪽에서 결정할 일이죠. 어떻게 될지···”
이준기가 말했다.
“휴대전화는 여러 개 쓰시죠?”
“네. 보안 앱을 쓰고는 있지만, 100%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전화가 딱 한 개입니다. 전화번호 찍어드릴게요.”
이준기가 내민 손에 미겔은 전화 하나를 쥐여주었다.
이준기는 자기 번호를 찍었다.
“전화를 하셔도, 저는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제가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네···”
“저와 연락이 필요하신 경우에는, 문자를 주세요. 제가 전화를 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보안이 될까요?”
“보안 시스템은 이제부터 말씀드릴게요. 원시적인 시스템이지만, 몇 개를 조합하면 보안은 그럭저럭 지켜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날짜를 네 자리로 해서, 그러니까 오늘은 2022년 1월 24일이니까, 0124죠. 거기에 9876을 더해주세요. 각 자리끼리만 더하고, 10이 넘는 부분은 버려주세요. 그러니까 오늘이라면···”
“9990이 되겠군요.”
“네. 정확합니다.”
“그 네 자리 숫자를 문자로 보내라는 말씀이죠?”
“네. 그렇게 문자를 넣어주시면, 제가 확인하고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제 전화에 찍힌 발신 번호로 말이죠. 휴대폰이든 공중전화든.”
“알겠습니다.”
“신호가 가면 세 번을 기다리시고, 네 번째 울리는 도중에 받으세요.”
“네.”
“그 외의 경우라면 저는 전화를 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세 번까지 보내고, 네 번째 신호 도중에 받을 것.”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네 번째 신호 도중에 전화를 받지 못하게 되면, 해당 연락 건은 취소입니다. 무효화되는 거죠. 그래도 연락이 필요한 경우라면 다시 문자를 보내주세요. 다만, 다른 전화를 사용하셔야 합니다. 같은 전화번호에서 두 번 문자를 받게 되면, 저는 그걸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고 잠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연락에 실패할 경우, 다른 전화를 사용할 것.”
“그렇습니다.”
이준기는 활짝 웃어 보였다.
“미겔, 만나 뵈어서 정말 반가웠어요. 언젠가 같은 공격대 멤버로서, 함께할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이준기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