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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0: 승패가 갈리는 지점 (4)
Episode 40: 승패가 갈리는 지점 (4)
길수연이 사라진 출입구를 바라보며, 야스다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빛의 방패에 맞아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던 하시바가 화난 소리로 외쳤다.
“뭐 하는 거냐, 이 멍청한 놈들! 이거, 해제해!”
일본인 힐러 두 명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하시바에게 ‘해제’를 시전했다.
빛의 방패 효과에서 풀린 하시바가 공중에서 뚝 떨어졌다.
지상에서 50센티미터도 안 되는 높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추락은 추락.
야스다가 다가가 하시바를 부축하려 했다.
하시바는 야스다의 손을 뿌리치면서 오두막 한가운데 지점으로 걸어갔다.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뒤, 하시바는 입을 뗐다.
“이거··· 체면을 구겼군요. 하지만 쇼는 계속되어야 하죠. 길수연 구원자에 대한 징계는··· 차기 한국 길드협회장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아이템 우선권 지명에 들어갑니다. 그 전에, 오늘 결투에 대한 베팅 현황을 다시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 이상덕(7): 오대영, 강명성, 변희영, 정두리, 박보도, 남경철, 유지호
- 한상태(10): 김범규, 김나리, 최현, 나현우, 장대한, 선우결, 신다은, 박건우, 김새로미, 한소미
“이상덕 회장에게 목숨을 맡긴 사람이 7명, 한상태 회장의 승리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 10명입니다. 더해서 17명에, 이상덕, 한상태 회장을 합하면 총 19명. 계산이 맞군요.”
한국인 구원자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의 대결 결과에 맡긴 꼴이니, 어쩌면 데스매치보다도 못한 상황.
다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특히 김나리.
‘길수연··· 혼자 도망가다니. 정말 짜증 나네. 혼자 살겠다 이거지···’
그러나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자 김나리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런 컨트롤··· 나라면 가능했을까? 달리면서 텔레키네시스를 쓰는 것도 모자라, 상대방이 기술을 쓰자마자 빛의 방패를 집어 던져서 맞히다니··· 언론은 길수연과 내가 라이벌이라고 떠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거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야스다가 그녀의 앞에 와서 섰다.
“김나리 힐러님은요? 누구 아이템이 갖고 싶으세요? 역시 힐러템을 드시려면 저쪽 힐러인 남경철 구원자를 지목하셔야겠죠?”
“네? 아··· 아이템 배분요.”
“현재 상황을 좀 말씀드려요? 한상태, 이상덕은 서로를 지목하도록 되어 있고, 다른 분들은 접근 금지입니다. 결투 상대방의 아이템을 빼앗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오대영 탱커와 김범규 탱커가 서로를 지목했고, 강명성, 변희영은 각각 최현과 나현우를 지목했어요. 그리고 그다음이 김나리 힐러님 차례예요.”
“지··· 지금 지목해야 해요?”
“공식 랭킹 순위대로 물어보고 있습니다. 아직 못 정하셨으면, 이따가 다시 올까요? 어차피 랭킹 순으로 정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 네. 이따가요.”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야스다는 옆 사람에게 이동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고, 김나리는 느끼고 있었다.
‘한상태. 레벨 40. 현재 이상덕보다 1레벨 낮지만, 설마 지지는 않겠지? 이상덕으로 했어야 했나? 목숨이 걸린 일인데, 길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상덕은 왠지 정치질이나 하는 사람처럼 보여서··· 하지만 인청 공항 던전에서 박충기를 때려잡던 모습을 생각하면··· 사실은 상당한 실력자일지도··· 아니, 그래도 한상태는 탱커니까 방어가 단단하지 않을까··· 아···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
차원문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이 모두 놀랐다.
최한식 중령도, 대통령 경호실장 차진철도 마찬가지였다.
하시바와 일본인 구원자들을 무사히 차원문에 입장시켰으므로, 차진철이 이곳에서 할 일은 이미 끝났다.
그러나 우쭐해 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게 훈계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아직 미적거리고 있었다.
최한식 중령이 차원문에서 나온 사람을 돌아보며 외쳤다.
“누, 누구냐?”
“길수연이라고 합니다.”
“기··· 길수연 힐러님?”
워낙 유명한 구원자라서, 차진철 정도를 제외하면 길수연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차원문에서 사람이 나오니 놀란 것뿐이다.
“호··· 혼자 나오신 겁니까? 무슨 일입니까?”
“비상 상황입니다. 구원자들을 모아서 지금이라도 차원문 안으로 진입해야 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 길수연도 확신할 수 없었다.
던전 안에서 흔하게 벌어지던 멱살잡이나 패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상황.
말리기는 해야겠는데, 차원문 안으로 진입이 가능한 것은 구원자들뿐이다.
문제는, 상위랭커들이 지금 전원 그 패싸움에 얽혀 있다는 것.
“무슨 말씀이신지···”
“구원자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싸우려고 하고 있어요··· 아니, 그보다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합니다.”
“이··· 일본인 구원자들은요?”
“그들을 왜 들여보내신 거죠?”
“대··· 대통령 지시였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최한식은 차진철을 슬쩍 보았다.
차진철은 최한식의 시선을 피했다.
최한식은 다시 길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그 사람들··· 일본 사람들은요? 싸움을 말리지는 않았나요?”
“그 사람들이 오히려 부추겼어요.”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싸움을 말리기는 해야겠는데, 구원자들을 지금 당장 모아야 합니다.”
“구··· 구원자 관련 일이라면 육군에서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다는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차진철이 갑자기 길수연의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 저와 함께 갑시다.”
아가씨라는 말이 황당했지만, 길수연은 해야 할 질문을 했다.
“어딜 가겠다는 거죠? 그리고 누구시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진철이오. 경호실장 권위로 구원자들을 모아주겠소.”
“네? 그게 가능해요?”
“청와대에서 소집한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니오? 나한테 그 정도 권한은 있단 말이오.”
길수연은 잠깐 생각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지만, 지금은 도움이 된다면 조막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다.
더구나 차진철의 도움 제의를 받아들일지 말지, 그걸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알았어요. 그럼 저와 함께 길드협회 사무실로 가시죠. 아니, 전화를 할까요?”
“일단 이동하면서 전화를 합시다. 어차피 사무실에 가야는 할 것 아니오.”
“하긴 그렇겠군요. 그럼 지금 당장.”
“최 중령, 내 차 대기 시켜.”
“네, 알겠습니다.”
곧바로 청와대 마크를 단 방탄 차량이 나타났다.
경호실장이 방탄 차량을 맘대로 사용해도 되는 건지 조금 의심이 들었지만, 길수연은 우선 차에 올라탔다.
그녀에 이어 차에 오른 차진철이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길드협회 사무실로.”
*****
“연락이 왔어.”
이준기가 세르게이에게 말했다.
“무슨 연락?”
“사샤. 사샤 마르코비츠.”
“아하. 무슨 일이래?”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다.”
“뭔데? 빨리 좀 말해봐.”
“일본···”
“일본?”
“일본 야쿠자가 사할린을 접수했다는군.”
“뭐어?”
“프로코포프가 연락을 끊었는지, 그건 사샤가 알 수 없는 내용이지. 하지만 프로코포프와 연락이 끊긴 것이 이달 중순 정도잖아? 그즈음에 일본 야쿠자들이 사할린을 접수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고, 그렇게 알려왔어.”
“그런··· 그런데 연락은 왜 늦은 거야? 사샤 말야.”
“스팸메일로 들어가 있었다는군.”
“헐.”
“그러니까, 1월 15일경 프로코포프와 연락이 끊긴 거지?”
“그래, 맞아.”
“사샤는 물론 마르코비츠 씨도 번영회를 야쿠자가 장악하고 있는지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는지는 알 턱이 없지. 너처럼 상인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마피아라면 모를까···”
“아··· 그런 얘기는 왜 또 해. 무안하게.”
“널 무안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사과하지. 난, 상황을 정리해보려고 하는 거야.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나도 깡패 영화에서나 본 것이지만, 시장 상인들의 눈에 보이는 존재라면 폭력 조직의 말단 정도 아니겠어?”
“그렇지.”
“야쿠자는 나와바리가 필요한 거지, 일본 깡패를 사할린에 취직시키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니까, 상인들이 갑자기 야쿠자를 길에서 마주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 그들 입장에서 바뀐 것은 사라졌던 상가 번영회가 다시 생긴 것 정도겠지.”
“그래. 그렇겠지.”
“즉, 마르코포프는 야쿠자에 제압당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상가 번영회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가 되는 것이고. 사샤 귀에까지 들리게 된 소문은 이 정도겠지. 상가 번영회가 다시 생겨서 회비를 납부하게 됐다. 그런데 왜? 일본에서 온 야쿠자가 프로코포프에게 시켰다는 말이 있다. 이 정도.”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아. 프로코포프의 연락이 갑자기 끊겼는데, 유즈노사할린스크 상가에 번영회가 다시 생겼다. 그리고 일본 야쿠자가 사할린을 접수했다는 소문이 있다. 모두 연결하면 그 그림이 완성되는 거지. 그런데, 도대체 왜지? 일본 야쿠자가 왜 사할린에?”
“사할린이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고.”
“어떻게 감히, 총을 들고 돌아다니는 러시아 마피아를 상대로 전쟁을 할 생각을 했냐는 거지.”
“그래, 맞아. 바로 그 부분이 의아한 부분인데, 사실 해답은 간단한 걸지도 몰라.”
“구원자말야?”
“그래, 구원자. 총은 구하기 어렵지만, 러시아 마피아에 대항할 만한 무기인 구원자라는 것이 생긴 거지. 무기 조달 측면에서는 야쿠자가 마피아에 밀리겠지만, 구원자 조달 측면에서는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 거지?”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구원자들이 서로 반목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지만, 러시아처럼 사분오열되어 있는 케이스는 흔치 않지. 그런데 때마침 그런 정보를 접한 거지. 극동 마피아가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그··· 그렇다는 건···”
“내 책임이라는 얘기지. 호랑이를 몰아냈더니 다른 포식자가 들어선 거야. 마피아를 야쿠자로 교체한 것뿐이라고.”
세르게이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준기가 했던 일은 옳은 일이었다.
게다가 세르게이는 이준기 덕분에 갱생한 삶을 살고 있다.
반면, 이준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미래의 역사와는 다른 전개다.
원래대로라면, 사할린은커녕 현재 점령하고 있는 댜오위다오, 즉 센카쿠 제도도 중국에 빼앗기고 위축되어야 하는 것이 일본의 운명.
내전을 겪지 않고, 한국과의 전쟁에서도 우세를 보여,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가 폭삭 망하는 것이 일본의 진로였는데.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정반대의 경로를 밟고 있다.
이준기의 노력으로 여러 차례 한국 침공 시도가 좌절된 일본이, 오히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성공을 거두었다니.
*****
같은 시각, 광화문 차원문 안쪽에서는 드디어 결투가 시작되었다.
하시바가 모두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결투 당사자 두 사람에게라면, 결투에 규칙은 없습니다. 진정한 전투죠. 하지만 나머지 분들은 중립을 지키셔야 합니다. 자기편이 불리하다고 해서 스킬을 쓴다든가 결투에 난입하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저와 야스다, 그리고 우리 일본 구원자들이 엄정하게 감독하겠습니다.”
김나리는 생각했다.
한국인 구원자 20명이 힘을 합쳐, 쪽바리 녀석들을 제압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한갓 백일몽에 불과하다.
여기 20명이 힘을 합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원래부터 분열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서로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고 일본인들을 끌어들인 이상덕과 한상태.
그들이 서로 힘을 합칠 가능성은 당연히 없고, 그들과 긴밀하게 연결된 오대영이나 김범규도 마찬가지다.
하시바가 말을 이었다.
“모두 이 점,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의 본게임, 이상덕과 한상태, 한상태와 이상덕의 일기토를 시작하겠습니다. 야스다 상, 두 사람의 각오를 들어볼까요?”
일본인들은 한국인 구원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피의 사투를 제대로 즐기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야스다가 이상덕에게 물었다.
“각오 한 말씀 해주시죠.”
“내가 이길 경우, 약속을 지켜라.”
“물론입니다. 숙적, 한상태에게 하실 말씀은?”
“없다. 이기면 그만이야.”
야스다는 폴짝거리며 맞은편에 선 한상태에게 다가갔다.
“한상태 구원자님, 오늘 대결에 임하는 각오는?”
“멋지게 이겨드리죠.”
“하하. 멋진 각오십니다. 상대에게 하실 말씀은?”
“이상덕! 너의 악행도 오늘 여기에서 끝이다.”
“멋진 한 마디입니다. 그럼, 화이팅해주세요.”
야스다가 물러났다.
하시바가 앞으로 나서서 양편에 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정면을 향하다가 내리면서 말했다.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