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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0: 승패가 갈리는 지점 (2)
Episode 40: 승패가 갈리는 지점 (2)
던전 안으로 새로운 사람이 진입했다는 메시지는 모두 열 번 출력되었다.
그들이 모두 입장한 다음, 키 작은 남자가 앞으로 나와 섰다.
그는 오두막 안의 사람들을 한 바퀴 죽 둘러보고 나서, 가식적인 웃음을 띄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 구원자 여러분. 저는 일본 구원자협회의 하시바 세이이치로라고 합니다. 인사드립니다.”
열 명이나 되는 일본인 구원자가 진입했다는 사실이 확정되는 순간.
이상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맞은편에 서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당황을 넘어 공황의 표정이 떠올랐다.
김나리, 나현우는 물론, 김범규까지도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상덕···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김범규는 한상태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거냐고, 질문보다는 원망에 가까운 말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그러나 한상태의 표정은 여유만만했다.
그 표정을 보고, 김범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상덕이 선 자리에서 앞으로 나가면서 하시바 일행에게 환영의 한마디를 했다.
“하시바 상. 먼 곳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 이상 적절할 수 없는, 아주 완벽한 타이밍에 등장해 주셨어요.”
“하하. 이상덕 회장님. 별말씀을.”
“이제, 지난 며칠 동안, 아니 그 전부터 오랫동안 준비했던 일을 하게 됐군요.”
“그렇습니까? 좋은 일이군요.”
“그럼요. 좋은 일이고 말고요. 오늘, 남은 우환을 정리해버리고 나면 양국 간 우호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끈끈해질 겁니다. 완벽한 동맹 관계죠. 자, 이제 일을 시작할까요? 불평이나 일삼는 분파주의자들을 깡그리··· 제거해버리죠.”
“하하하. 이상덕 회장, 조심스러운 성격이신가 했는데, 거리낌이 없으시군요?”
“던전 안입니다. 비밀회의실도 필요 없어요. 죽은 자는··· 말을 하지 못하니까요.”
“그렇습니까. 과연 던전 안에서 일어난 일은, 당사자들 외에는 알 길이 없죠.”
하시바 세이이치로가 말을 멈추고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눈에 경악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시바는 다시 이상덕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실 건지? 집단전투입니까?”
“집단전투라고요? 우리 쪽수가 저쪽의 두 배가 넘습니다. 이건 전투도 아니죠. 처단이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처단이라··· 그건 승부가 결정된 다음의 이야기 아닐까요?”
“하시바 상, 무슨 말씀이신지···”
“일대일 대결은 어떻습니까, 이상덕 회장. 일기토 말이오.”
“뭐···라고요?”
이상덕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상태가 맞은 편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아까부터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상덕. 너와 나의 일기토다.”
한상태의 여유만만한 표정을 보고 놀란 이상덕이 하시바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시바 상,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시겠소?”
“설명요? 간단합니다. 두 분이 일대일 대결을 벌여 승부를 정하는 겁니다.”
“하시바 상!”
“사무라이다운 방법이죠.”
“하시바 상! 무슨 얘기를 하는 거요? 약속한 대로, 아니··· 계약한 대로 진행하시오!”
“계약? 증거 있습니까?”
“뭐라고?”
“이틀 전에, 한상태 회장과 만났습니다. 이상덕 회장이 말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분이더군요. 합리적이고, 리더십 있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일본에 대한 우호적 감정도 이상덕 회장에 전혀 뒤지지 않더군요!”
“그, 그게 무슨 말이오?”
“한상태 회장이 약속했습니다. 협회장이 될 경우, 이상덕 회장과 일본 구원자협회가 진행하던 모든 사업을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뭐··· 뭣이!”
하시바와 이상덕의 대화는 일본어로 이루어졌지만, 일본어를 아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주변 사람들에게 실시간 전달되었다.
공격대원들의 얼굴에 다른 표정들이 엇갈렸다.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것이라 예상했던 한상태 측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개운한 느낌은 아니다.
한상태가 일본 측에 협조하기로 했다는 말 때문이다.
하시바의 말이 사실인지, 한상태에게 물으려고 김범규가 입을 열려는 순간.
한상태가 모두에게 말했다.
“이제 모두 아셨겠죠? 오늘 저는 이상덕 회장과 일기토를 벌일 겁니다. 오늘 결투에 입회하는 것은 여러분뿐이 아닙니다. 하시바 상과 일본 구원자분들이 공평하게 중립적인 입장에서 입회할 것입니다.”
분노로 불타오르는 눈으로, 이상덕이 한상태에게 외쳤다.
“한상태! 이게 네놈의 계략이냐!”
“계략이라니, 이상덕 회장. 당신이 꾸민 것이 계략이고, 나는 그저 더러운 계략을 봉쇄한 것뿐이지.”
“뭐가 어째?”
“일본인 열 명을 끌어들여 우리를 학살하려고 한 것, 그건 분명 계략이라고 불러야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식의 책략을 꾸미지 않았다. 나는, 하시바 상에게 공평한 심판의 역할을 부탁한 것뿐이야.”
이상덕이 하시바에게 따져 물었다.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하시바 상! 원래 계약대로 이행하세요!”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소. 계약이란 게 어디 있소?”
“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는 이상덕 회장이죠. 한상태 회장에 대해서 온갖 나쁜 말을 해서 나를 기만했잖소? 한상태 회장이 저렇게나 일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왜 나에게 하지 않으셨소?”
“한상태는 왜 만난 거냐? 한상태는 네놈이 한국에 들어와 있는 것도 몰랐을 텐데.”
“내가 찾아갔소. 양쪽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는 것이 순서인 것 같아서.”
“이··· 더러운 쪽바리 새끼. 생긴 대로 노는구나, 원숭이 놈아.”
“하하하. 이상덕 회장 수준은 딱 중학생이군요. 그런 도발은 중학교 때 이미 물리게 들었소.”
*****
문아린은 거실에 쳐져 있던 짙은 커튼을 열었다.
겨울 햇살이 환하게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위치한 차원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10시 30분.
아직 광화문 차원문 공격대 출정식이 한창일 때다.
지역신문 기자가 몇 와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길드 차원의 브리핑 정도로 꾸며진 가벼운 출정식이 진행 중이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공격대장인 박현성 딜러.
과거 문아린과 같은 길드, 신선자 소속이었으나 이제는 서울연합 소속이다.
돈만 모으면 서울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니 놀랄 것은 없다.
그러나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공격대는 서울연합 멤버들로 구성되었다.
이곳 개포동은 원래 브릴리언트 길드의 관할이다.
그런데 브릴리언트 김범규 회장은 서울연합에 이 던전을 넘겼다.
물론, 그 사실을 문아린은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아는 얼굴, 박현성이 공격대에 포함된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중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공격대 명단이 나와 있었다.
- 개포동 차원문 공격대 명단.
- 공격대장: 박현성. 서울연합. 25레벨.
- 탱커: 김창수 서울연합. 23레벨.
- 힐러: 권숙희. 서울연합. 21레벨.
- 딜러: 한지아(서울연합, 24레벨), 강찬성(서울연합, 21레벨).
기사에 첨부된 사진을 보니, 강찬성이라는 사람은 아무리 적게 봐줘도 70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을 하니, 괜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공격대원들 레벨이 C등급 던전에 나쁘지 않군. 괜찮겠지.’
저도 모르게 공격대장 입장에서 상황을 저울질을 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니 우스웠다.
문아린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뭐, 이제 그런 것은 아무 상관 없지만.’
아파트는 부동산 중개업소에 이미 매물로 내놓은 상황.
이준기가 없는 서울을 빨리 뜨고 싶은 마음뿐이다.
무슨 일을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생업이라 생각하고 개업했던 커피숍은 동생 문아영에게 계속 맡기기로 했다.
사람들을 상대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구원자 문아린을 알아보고 여러 가지로 귀찮게 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커피에 대해 생각만 해도 떠오르는 어떤 사람 때문이다.
컴퓨터를 켠 김에, 문아린은 이준기의 블로그에 가 보았다.
원래도 글이 별로 없는 그의 블로그.
방명록에만 글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팬카페 활동도 전혀 하지 않고, 소셜 네트워크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인터넷상에서 이준기와 세상의 접점은 글도 몇 개 없는 이 블로그뿐이다.
- 전체 보기(11)
열한 개뿐인 그의 글은 이미 천 번도 넘게 읽은 것 같다.
전부 짧은 글들이라 읽는 데 시간이 들지도 않는다.
방명록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 방명록(65,535)
방명록에는 비밀글도 많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문아린은 방명록 글쓰기를 클릭했다.
이준기가 실종되고 나서, 세 번째로 글을 남긴다.
- 오빠, 나야. 아린이. 세상에 오빠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 아니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연락이 없으니 내가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빠는 남달라 보였지. 오빠처럼 구원자 활동에 열심인 사람은 본 적이 없어. 마치, 천직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루하루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것인지, 목숨은 어디에 맡겨두고라도 온 것인지··· 겁도 없이 차원문에 뛰어들던 오빠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어.
- 그런데, 던전 안에서도 아니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실종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 바깥 구경을 하겠다고 비행기 문을 열었다고? 그게 말이 돼? 이상덕 협회장이 무슨 흉계라도 꾸민 거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오빠가 사라져서 이상덕 협회장이 좋을 게 뭐가 있겠어?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오사카에서 일도 있기는 하지만, 이제 오빠는 협회 용병인데. 그래서 일본인들 역시 오빠를 죽이려고 할 동기가 없잖아? 아니, 이런 생각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 실종이라니. 가해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굴 마음 놓고 미워할 수도 없으니 너무 힘들어. 처음에는 이상덕 협회장을 엄청 미워했지. 하지만 의미가 없더라고. 그다음에는 최정윤 매니저를 원망해 봤어. 왜 그렇게 스케줄을 빡빡하게 짰을까. 하지만 역시 의미가 없었지. 최정윤 매니저가 아니었더라도 오빠는 그렇게 스케줄을 짰을 테니까.
- 오빠는 궁금해 하지도 않겠지만, 나는 며칠 전에 구원자 일을 그만뒀어. 홀가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아.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 왜 그런 걸까?
- 지난주에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차원문이 하나 생겼어. 브릴리언트 김나리 힐러가, 아이들이 뛰어노는 아파트 놀이터에 생긴 차원문이니, 빨리 해치워야 한다고 하면서 나한테 같이 하자고 제안하더라고.
- 조금, 흔들렸어. 사실, 차원문이 생기는 그 순간, 나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거든.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그 앞에 차원문이 스르르 생기는 거야. 아이들은 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김나리 구원자의 제안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어.
- 그런데··· 이제 무슨 상관이람. 나는 더 이상 구원자가 아니야. 광화문에 A등급 차원문이 생겼는데, 정부에서 랭킹 20위권 구원자 전원을 징집한다고 했어. 내가 지금 어디 가서 한 사람 몫을 할 수나 있을까. 오히려 사람들 발목이나 잡겠지.
- 그래서 구원자 그만두겠다고 했지. 내 바로 뒷순위에 있던 유지호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 대신 광화문에 끌려갔어. 자책하는 건 아냐. 그게 무슨 상관이야? 구원자라는 건 원래 그런 직업이야. 유지호라는 그 사람도 가기 싫으면 나처럼 구원자 은퇴하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미안해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
- 도대체 이렇게 하소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빠는 정말 사라진 거야?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제발··· 대답 좀 해줘.
- 가끔 카페인이 당겨. 하지만 커피라는 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내게 이제 커피라는 건 준기 오빠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서. 그래서 커피 생각이 나면 잠을 자려고 하지. 그런데 잠이 안 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다가 일어나고는 해.
- 커피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어도 문제이기는 하지. 꿈에 오빠라도 나오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상하게 오빠는 내 꿈에 나오지 않더라. 꿈에라도 나오면, 슬퍼서 눈물이 나오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오빠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 텐데.
- 이 글, 누가 읽을까 봐 창피하다. 비밀글로 적고 있으니 나와 오빠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빠가 읽더라도 나는 창피할 것 같아.
- 그래도, 오빠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어. 창피하더라도 내 글을 읽고 비웃어줬으면 좋겠어.
- 길수연 힐러가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어. 길수연 구원자는 오빠가 죽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면서, 살아 있을 거라고 말해줬어. 하지만··· 그건 말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