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36화 (13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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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9: 디스 민즈 워 (9)

Episode 39: 디스 민즈 워 (9)

바실리사와 세르게이.

그들은 키예프 남서쪽 시가지를 걸었다.

쌀쌀한 바람이 이따금 불었지만, 공기 자체는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세르게이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활발한 농부··· 라고 했던가?”

바실리사가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아하하! 활발한 농부? 그게 뭐야?”

“그··· 지금 찾는 거. 무슨 농부였잖아.”

“세르게이··· 나 웃기려고 그런 건 아니지? 암튼 웃게 해줘서 고마워.”

“아냐. 나 진지한데. 건망증인가··· 이름이 생각이 잘 안 나서.”

“즐거운··· ‘즐거운 농부’야.”

“이 근처가 맞는 거야? 벌써 한 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한 시간은 무슨··· 아직 30분도 안 됐어.”

“그래?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지?”

“조금만 더 찾아보자. 어차피 산책 나온 거 아니었어? 산책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추울 줄 몰랐어. 정확한 위치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고, 원래부터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해. 이 부근이라고만 알고 있는 거야.”

“주소를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이런 사태가 올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그 이름만 외우고 있었어.”

“이름을 잘못 기억하는 걸 수도 있잖아? 자신 있어?”

“슈만의 즐거운 농부. 내가 좋아하는 곡이야. 그걸 잘못 기억할 리가.”

“슈만? 아··· 슈만.”

슈만을 정말로 알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바실리사는 가만히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작은 간판들의 글씨를 확인하면서, 바실리사는 저도 모르게 ‘즐거운 농부’의 음계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거야? 즐거운 농부?”

“뭐라고? 아··· 그래. 맞아. 내가 콧소리를 내고 있었네.”

“좋은 곡이네.”

“즐거운 곡이지.”

‘슈만은 자살했지만.’

거의 말할 뻔했지만, 바실리사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켰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들을 불렀다.

“이봐요, 아가씨?”

“네?”

돌아보니, 그들을 불러 세운 사람은 코사크 모자를 푹 눌러 쓴 중년 남자였다.

“실례지만··· 조금 전에 흥얼거리신 그 곡, 로베르트 슈만의 <즐거운 농부> 맞죠?”

*****

“누추하지만, 앉아요.”

남자는 낡은 소파에 널려 있던 옷가지들을 치우면서 말했다.

그는 총총히 부엌으로 가서 따뜻한 차와 간식거리들을 내왔다.

지저분한 커피 테이블 위에 찻주전자, 찻잔, 그리고 간식거리들까지 올려놓으니 좁은 테이블이 더 좁아 보였다.

바실리사가 남자에게 말했다.

“정말, 하늘이 도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집안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그 음조가 들려와서 말이에요. 아가씨가 때마침 이 근처를 지나면서 콧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우린 절대 만나지 못했겠죠.”

“즐거운 농부라는 게 있기는 했던 건가요?”

“바로 지난달까지만 해도요. 이제는 없죠. 뿔뿔이 흩어졌죠.”

“요즘 상황 때문이겠죠?”

남자는 대답을 하기 전에 잠깐 뜸을 들였다.

“딱히··· 전쟁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네? 그렇다면···”

“장사도 수지가 맞지 않으면 접는 거죠. 이 짓도 마찬가지고.”

“수지가 안 맞아서라고요?”

“하하, 아가씨. 내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듣지는 말아요. 사람은 늙어가면서 세상에 대해 이런저런 편견을 갖게 되는 법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좀 쉽게 얘기해 주세요.”

“즐거운 농부와 푸가초프. 사이 좋은 형제 조직이었죠. 우리가 훨씬 작은 조직이었기는 하지만요. 그랬지만, 지금 보시다시피, 즐거운 농부는 이제 없어요. 더는 존재하지 않아요. 아지트로 쓰던 술집도 접었고, 그곳을 드나들던 정의감에 넘치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죠.”

“사라졌다는 건···”

“몇은 죽고, 몇은 그만두고 잠적했고요··· 또 몇은··· 배신했죠.”

“배신요?”

“수지가 맞지 않으니 어쩔 수 없어요. 생각해 봐요. 구원자로 각성해서 막강한 능력을 손에 넣었는데, 그걸 갖고 겨우 레지스탕스나 하라고요? 하하하.”

우크라이나의 레지스탕스 조직, ‘즐거운 농부’.

러시아의 푸가초프와는 형제 조직이다.

키예프 남서쪽 쉬르마(Shyrma) 지역에 ‘즐거운 농부’라는 작은 간판을 단 술집이 아지트라고 들었다.

바실리사는 딱 그 정도의 정보만을 예전에 들었던 것인데, 혹시나 해서 찾아와 본 것이다.

이리나와의 연락이 끊기고, 푸가초프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

어떻게든 푸가초프와 다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무모하게 나선 일이지만, 천운에 천운이 겹쳐 결국 즐거운 농부를 찾기는 했다.

하지만 조직 전체가 사라졌다니, 이래서는 의미가 없다.

점조직으로 유지되는 푸가초프에서 바실리사와 연락을 주고받던 것은 단 두 명.

보리스와 이리나.

조직을 배신하고 바실리사를 적에게 넘기려고 했던 보리스는 처단했다.

왠지 모르지만, 비슷한 시기 이리나와의 연락도 두절되었다.

이리나도 보리스와 마찬가지로 조직을 배신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여러 차례 해보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낮았다.

보리스와 이리나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바실리사와의 접점 두 명이 모두 배신자라면, 우연도 너무 심한 우연 아닌가.

“보리스··· 보리스 라비노비치라고 혹시 아세요? 푸가초프 소속 구원자.”

“아뇨.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이리나 보로비예프는요?”

“그 이름도 금시초문이군요. 미안하지만, 아가씨, 저는 뭐 레벨도 낮고 조무래기였어요. 우리 조직은 크지도 않았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레벨이 낮은 쪽에 속했어요. 게다가 우리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다른 조직 일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고요. 푸가초프가 우리 형제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거의 말뿐이었죠. 도움을 받은 적은 있어도 도움을 준 적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럴 형편이 아니었으니까요.”

“네···”

“푸가초프가 우리 조직의 열 배는 될 겁니다. 우리 조직이 아직 건재하던 때를 기준으로 해서요. 우린 푸가초프처럼 무슨 체계를 갖춘 조직도 아니고, 마음이 맞는 몇 명이 마피아 짓거리나 하는 구원자들, 그리고 그걸 그냥 놔두는 정권에 대항해서 싸우려고 모인 것뿐이에요. 그냥··· 친구들 몇이 모인 거라고요.”

“아···”

“그대로 그냥 놔뒀더라면 이렇게 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조직을 좀 키워보겠다고 근본도 모르는 녀석들을 들이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구원자가 우리 조직에 들어와서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마피아에 들어가면 당장에 부를 거머쥘 수 있는데··· 누가 우리 조직에 들어오겠어요? 마피아에 우리 조직을 팔아먹으려는 녀석들이나 들어오겠죠.”

“그래서··· 그렇게 된 거군요.”

“실상은 저도 잘 몰라요. 어느 날 이렇게 박살이 나 있더군요. 친구가 죽어가면서 저에게 메시지를 남겨서, 저는 살아남았죠. 하지만 제가 살아남은 진짜 이유는, 제가 저레벨이기 때문일 겁니다. 굳이 저까지 잡아 죽일 이유가 없는 거죠. 위협이 되지도 않으니까.”

바실리사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도, 정의에 대한 사명감도 보이지 않았다.

어지러운 집안의 모습이, 이 남자의 현재 심리상태를 표현해주는 것 같았다.

바실리사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저··· 구원자님.”

“루슬란이에요.”

“아, 루슬란 씨. 제 이름은 바실리사입니다.”

“바실리사··· 예쁜 아가씨에게 맞는 예쁜 이름이군요. ‘아름다운 바실리사.’ 그 동화처럼요.”

“어렸을 적부터 자주 놀림을 받아서··· 그 동화 별로 안 좋아해요.”

“하하. 놀린 게 아니라 부러워서 그런 거 아닐까요? 바실리사 구원자님은 정말 미인이시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이제 일어나볼게요.”

“가시게요? 이렇게 어렵게 찾아주셨는데, 도움을 드릴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녜요, 루슬란 씨. 그래도 만나뵈어서 반가웠습니다.”

“주소라도 알려주세요. 뭔가 알게 되면, 연락 드리죠.”

“주소 같은 건 없어요. 이제 키예프에 볼일도 없으니 우크라이나를 뜰까 해요.”

“버··· 벌써요? 그렇게 급하게?”

“집도 절도 없는 이곳에서 제가 뭘 하겠어요.”

“어디로 가는지라도 말해봐요. 뭔가 제가 도울 일이라도···”

“글쎄요. 아직 어디로 갈지 정하지를 못했네요.”

루슬란은 왠지 접촉선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바실리사는 이미 레지스탕스 생활을 끝낸 그를 관여시키고 싶지 않았다.

둘은 인사를 하고 문을 나왔다.

2층에 자리한 루슬란의 낡은 집.

계단을 내려와 거리로 나온 뒤, 바실리사는 안타까운 기분을 담은 눈빛으로 낡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세르게이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해.”

*****

커피숍, 잡화점, 식당, 다시 커피숍.

바실리사는 세르게이가 이끄는 대로 키예프의 골목을 누볐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리나라는 그 여자, 만나본 적 있어?”

“그래. 물론이지.”

“머리 색깔이··· 오렌지색?”

“엇. 그걸 어떻게···”

“루슬란 씨··· 머리색이 검은색이었잖아. 그런데 아파트에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있었어. 그것도 긴··· 여자 머리카락.”

“이리나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냥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하지만 루슬란의 아파트에 누군가가 숨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수상한 거잖아?”

“그렇지.”

“이만하면 미행은 따돌렸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숙소로 돌아가는 건 곤란해.”

“준기 씨는? 오후에 돌아올 텐데.”

“메신저로 연락하지 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이렇게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걸까.”

“글쎄. 추측이지만, 그냥 말해본다면··· 푸가초프는 지금 널 배신자로 생각하는 것 아닐까? 보리스가 아니라 너를.”

“뭐라고?”

“미치고 팔짝 뛸 얘기이기는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봐. 보리스가 죽고 너는 연락 두절.”

“연락은 내가 두절한 게 아니고, 이리나가··· 아!”

“그래. 너에게 접촉점은 이리나뿐. 하지만 이리나에게는 너 말고도 접촉 대상이 최소 하나는 더 있겠지. 이리나가 그쪽에 대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그건 이리나 자유지.”

“하지만 왜?”

“보리스와 이리나가 서로를 모른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그··· 그런가?”

보리스와 이리나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한 것은 사실이다.

그 둘 모두, 바실리사의 다른 접촉점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묻지도 않겠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서로를 모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보리스는 조직 내의 여러 사람들과 접점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세르게이의 시선이 느껴지자, 바실리사는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아니. 별거는 아니지만, 바실리사,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무슨 얘기지?”

“이런 얘기 하면, 화낼지도 몰라서 조금 그렇기는 한데.”

“뜸 들이지 마.”

“이제, 우리 셋. 모두 똑같은 운명인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왠지 기쁜걸.”

그렇게 말하고 세르게이는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이봐, 세르게이!”

“사정은 다 다르지만, 모두 조직에서 나와 쫓기는 상황이잖아. 나는 극동 마피아와 모스크바 마피아의 적이 된 지 오래고, 알료샤도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지. 그리고 이제 너도···”

“그게··· 재미있어?”

“재미있지. 나는 분명히 자원해서 마피아가 되기는 했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생각했지. 먼저 하늘나라로 간 내 동생, 두냐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잠깐잠깐 지나가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양심의 한구석이 찔렸다?”

“그래. 그렇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그래서 그냥 마피아 양아치 짓이나 하고 있는데 알료샤를 만났지. 처음에 코피 엄청 터지기는 했지만. 알료샤에게 엄청 얻어맞고 나서, 그러니까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시작한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지금 생활에 만족해. 알료샤가, 날 구원해준 거라고. 난 이제 하늘나라에 가서 두냐를 만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니, 아직은 조금 부끄러울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내 동생 두냐를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만날 거야.”

동생을 생각하는지, 세르게이의 얼굴에는 선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세르게이가 말을 이었다.

“바실리사, 너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야. 내가 마피아 짓이나 하고 다닐 때, 너는 사람들을 구하고 다녔으니까. 조직이 너를 버렸는지도 모르고, 이리나가 너를 모함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 네가 하는 일은 여전히 그대로야. 푸가초프라는 깃발이 없어도, 너는 충분히 훌륭한 삶을 살고 있어. 구원자라는 특권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대신 사람들을 구하고,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고 있지.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농부, 즐거운 바실리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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