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35화 (13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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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9: 디스 민즈 워 (8)

Episode 39: 디스 민즈 워 (8)

1월 23일 일요일.

오늘은 순번에 따라 이준기가 오전 정찰에 나섰다.

집주인 할아버지도 아침 산책을 나가서 집에 없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하기에 딱 좋은 상황.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세르게이가 다소 침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칭퉁 야우라는 변수 때문인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벌써 며칠째, 우리··· 도망만 다니고 있잖아.”

“도망이라고?”

바실리사가 대놓고 항의 조로 말했다.

그래도 세르게이는 요지부동이었다.

“도망이 아니면 이게 뭐야. 가는 곳마다 정의의 심판을 내리던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외진 곳 아파트에 숨어 있잖아.”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글쎄.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밖에 나가면 때려잡을 녀석들은 널려 있을 거야. 그런데도 우리는 방구석 신세인 거지.”

“원래 계획이 틀어졌으니 어쩔 수 없잖아. 보리스가 배신을 하는 바람에, 푸가초프 쪽에서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직접 정보를 모아야 하는 상황이고. 그래서 지금 그걸 하고 있는 거잖아. 준기 씨가 놀러 나갔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 아냐. 그게 아니고.”

“속 시원하게 말을 해봐. 너의 그 ‘대장’도 옆에 없으니.”

“모르겠어 정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하지만 말야, 예전 같았다면···”

“그래, 예전이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예전에는, 너도 알겠지만, 바실리사, 적이 얼마나 강한지··· 그런 건 신경 안 썼단 말야. 누가 우리 앞을 가로막든, 결국은 우리가 이겼지. 우린 한 번도 주춤한 적이 없었어. 그냥 탱크처럼 밀고 다녔다고.”

‘태··· 탱크?’

바실리사는 말문이 막혔다.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유치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세르게이의 이런 점 때문에 바실리사는 그를 마치 철이 덜 든 남동생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바실리사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더 많지만, 아직도 사춘기가 다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사고방식.

그러니까 세르게이의 말은, 탱크처럼 밀고 다니다가 갑자기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우울하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게다가 갑자기 우두커니 서 있게 된 이유는 칭퉁 야우라는 장애물 때문이고.

남동생을 어르는 누나처럼 느껴져서 왠지 싫지만, 바실리사는 말했다.

“세르게이. 그렇게 답답하다면 잠깐 바람이라도 쐬는 건 어때?”

“무슨 소리야? 산책 다녀오라고?”

“그래. 나가서 조금 걷다 보면 약한 사람 괴롭히는 깡패 정도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혼내주고 와.”

“그래?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냐니?”

“대장이··· 아니 알료샤가 싫어하지 않겠냐는 거지.”

“으이구··· 준기 씨가 무슨 골목대장이냐?”

“그··· 그래도··· 내가 말썽이라도 일으킨다면.”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내가 같이 나가 주지.”

“에··· 정말?”

“들러볼 데가 있어. 어제 오후 정찰 때 찾아봤는데, 아직 못 찾아서.”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세르게이가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뭔가 할 일이 있구나! 그럼 내가 도와줄게.”

“좋아, 세르게이. 날 좀 도와줘.”

*****

같은 날, 1월 23일.

일요일에 이상덕은 사무실에 출근해야 했다.

신학길이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정부에서 긴급 공문이 내려왔다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이상덕은 대기하고 있던 신학길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오늘 처리해야 하는 공문이, 오늘 내려왔다고?”

“네, 협회장님. 오늘 0시부로 긴급명령이 발령됐다고, 당장 처리하라는 지시입니다.”

“기··· 긴급명령?”

“헌법 제76조 2항에 따른 것이랍니다.”

“야··· 이 멍··· 후우··· 신학길 총장. 내가 지금 긴급명령의 법적 근거에 관해 물었소?”

“아··· 아닙니다, 협회장님.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 헌법 제76조에 의한 긴급명령이 무슨 내용인지, 그게 왜 협회로 왔는지 말해봐요.”

“허··· 헌법 제76조 제2항에 따라···”

“그래, 알았으니까 빨리!”

“대통령은 현재 광화문에 발생한 차원문이 국가적 안위에 관계되는 중대한 교전 상태라고 판단, 대한민국 구원자 순위 20위 이내에 포함되는 구원자 전원에게 아래와 같이 긴급명령을 발동한다.”

“아, 그래. 광화문. 계속 읽어봐요.”

“상기에 해당되는 구원자들은 2022년 1월 26일 수요일에 예정된 광화문 차원문 공격대에 참가할 의무를 진다.”

“뭐? 의무?”

“공격대 불참 사유는 아래에 한한다. 첫째, 구원자 본인이 사망하였거나 의식불명 또는 장해 1급의 중상해를 입은 경우. 둘째, 직계존비속 사망에 따른 장례 절차를 위해 휴가가 필요한 경우.”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말···”

“계··· 계속 읽을까요?”

“내용이 또 있어?”

“네. 불참 사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셋째, 공격대장 또는 한국 길드협회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해당 구원자를 공격대에서 반드시 제외시켜야 한다고 판단하는 경우. 단, 이 경우에는 공격대장 또는 길드협회장 본인이 직접 대통령에게 사유를 설명하여야 한다.”

“하!”

이상덕은 잠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분을 삭히는 모양이라고, 회장실 창문이 큰 곳으로 이사 와서 다행이라고, 신학길은 생각했다.

충분히 열이 식었는지, 이상덕은 돌아서서 신학길에게 물었다.

“이거, 뭐야? 한상태 작품?”

“한상태가 어제 청와대에 보고 들어갔다는 얘기는 있었습니다만···”

“그럼 한상태 작품이네. 한상태는 그렇게 뛰어다니는데, 우리 신학길 총장님은 그냥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는 거고.”

“저··· 저는 어제 하시바 상과 회의를 하느라···”

“회의, 하루 종일 했나? 그리고 거기엔 나도 있었어!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소··· 송구합니다.”

“며칠 동안 용써서, 한상태 팀을 좀 깨놨나 했더니··· 다시 원점이네. 10대10 가겠는데, 이거? 공평한 게임을 하게 됐어. 축하할 일이네?”

“죄··· 죄송합니다, 협회장님.”

“후우··· 이거 정말 환장할 노릇이구만. 누굴 공격대에서 빼고 싶으면 내가 직접 들어가서 설명해야 한다고? 한상태 이 새끼는 저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빼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라고? 대통령한테?”

“회··· 회장님···”

“길수연 이 년이라도 중립을 지켜야 하는데··· 그러면 대략 10대9로 갈 수 있고, 하시바, 그 원숭이 놈이 데려오는 쪽바리들도 있으니까.”

“자··· 잘 될 겁니다, 협회장님.”

“잘 되긴 뭐가 잘 돼? 신학길 너는 길수연··· 아니 길수연은 됐고, 하시바 그놈한테 가서 상황 설명이나 해. 원래 예상했던 범위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원래 협의했던 대로 해달라고 말야.”

“알겠습니다.”

“빨리, 당장 튀어 가라고!”

“네, 넵.”

*****

김나리도 나름 충격에 빠졌다.

정치싸움에 휘말려 죽기는 싫어서, 그래서 마침 개포동에 나타난 차원문을 핑계로 광화문 공격대에서 빠지려던 것인데, 막판에 계획이 틀어졌다.

‘내가 왜, 김범규 회장이 시키는 대로 한상태 편에 서서 이상덕과 싸워야 하는 거지? 길드 멤버는 길마한테 절대복종해야 하는 존재인가?’

거실을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궁리를 하던 김나리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이 상황, 예전의 길수연과 마찬가지 아닌가? 길수연은 이상덕 길드 소속이었지만 길마 말을 오지게 안 듣는 것으로 유명했었지. 지금 나와 김범규 회장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김나리는 길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연 씨, 저 김나리예요.”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요. 협회에서 연락받으셨을 거 아녜요. 뉴스에도 나왔고. 긴급명령 말예요.”

“아, 긴급명령요. 그런데 그게 왜요?”

“전, 광화문 공격대에 들어가기 싫어요. 인천 공항 때처럼 싸움 날 거라고요.”

“설마, 몬스터들과 싸우는 도중에 싸움이 나겠어요? 전 던전 클리어하고, 상자 열기 전에 나오려고요.”

“수연 씨는 정말 느긋하시네요. 지난번에 인천 공항에서 직접 보셨잖아요! 이상덕이라면 몬스터와 싸우는 도중에라도 동료에게 칼 겨눌 사람이에요. 안 그렇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설마 그렇게까지···”

“예전에 같은 길드셨잖아요. 이상덕을 그렇게 몰라요?”

“···”

“죄송해요, 수연 씨. 제가 말이 심했죠. 사실··· 전화 드린 건 뭘 좀 물어보려고요.”

“말씀하세요.”

“예전에 수연 씨는 이상덕 길마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하신 거예요?”

“어떻게 하긴요. 명령이 부당하다 싶으면 거부한 거죠.”

“제가··· 지금 그래야 하는 상황이에요. 김범규 회장이 한상태 편을 들면, 우리 길드 전원이 한상태 쪽을 지지해야 하는 상황이라서요. 그렇게 되면, 이상덕의 적이 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 던전 안에서 죽게 되겠죠.”

“그건··· 나리 씨 뜻대로 하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네?”

“브릴리언트 길드 전체가 한상태 회장의 편에 선다고 하더라도, 나리 씨는 그렇지 않다고 의사를 분명히 표시하면 되잖아요?”

“싸우는 와중에, 그게 잘 전달이 될까요?”

“그럼, 싸우기 전에 그런 의사를 미리 전달하세요.”

전화를 하는 도중에, 김나리는 깨달았다.

왜 길수연은 되고 자기는 안 되는지.

그건, 그동안 쌓아 올린 평판,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이다.

길수연이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믿는다.

그녀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하지만 김나리의 선언은··· 그렇게 확고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

그 시간, 한상태는 브릴리언트 사무실에서 김범규를 만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브릴리언트 길드로 날아온 청와대의 공문, 그리고 협회에서 날아온 협조 문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상태는 누가 봐도 의기양양한 모습.

반면 김범규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대통령님, 우리나라 문제를 왜놈들에게 맡기시겠다는 겁니까? 충무공 동상 바로 앞에 있는 차원문입니다. 왜놈들이 거길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순신 장군이 무슨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했더니, 수긍을 하시더군.”

“한 회장님, 정말 못 하시는 게 없네요.”

“그거, 칭찬이지?”

“그럼요. 저도 형님같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네요.”

“이 정도까지 했는데, 김 회장. 이제 내 편에 확실하게 서는 거지?”

김범규는 일부러 한숨을 한 번 쉬고 대답했다.

“그럼요, 한 회장님. 원래부터 저는 형님 편이었으니까요.”

“정말 고마워, 김 회장. 우리, 힘을 합쳐서 이상덕 독재를 끝내자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박충기 회장 살아 있을 때 그쪽 편을 들 걸 그랬어요.”

“글쎄··· 박충기라고 이상덕과 뭐 달랐을까?”

‘한상태 너는 그럼 이상덕과 뭐 얼마나 다르냐?’

그렇게 말하고 싶은 김범규.

그러나 때가 아직 이르다.

누가 뭐래도 한상태는 여전히 한국 최고의 탱커다.

그를 이용해서 이상덕을 제거하고 나면, 그 이후의 논공행상은 김범규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

한상태에게는 없는, 조직의 힘이 김범규에게는 있으니까.

“맞습니다. 형님. 우리 힘으로, 한 회장님과 저의 힘으로 이상덕 독재를 끝내자고요.”

“그래. 그러자구. 역사가 우리를 기억할 거야.”

*****

난데없이 일요일에, 구원자들은 집에까지 찾아온 협회 직원들을 만나야 했다.

그건 1월 23일 현재까지도 랭킹 20위를 지키고 있던 문아린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한 달 동안 차원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순위가 충분히 내려가지 않은 것이다.

집에까지 찾아온 여자 직원의 설명을 말없이 듣고 나서, 문아린은 조용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아린 구원자님. 여기에 서명 부탁드릴게요.”

“전, 이번 공격대에서 빠지겠습니다.”

“네? 그건 안됩니다, 문아린 구원자님. 지금까지 설명해 드렸다시피, 이건 대통령의 긴급명령···”

“협회에서도 탈퇴할게요.”

“협회 문제가 아니고요···”

“구원자로서도 은퇴하겠습니다.”

협회 직원은 말문이 막혔다.

신학길 총장의 지시는 서류에 서명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서명을 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지시는 없었다.

멍하니 있는 직원에게 문아린이 다시 말했다.

“구원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어요. 정부 지원금도 받지 않을 것이고, 협회에서도 탈퇴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더 이상 구원자가 아닌 거죠. 제 다음 순위에 계신 분이 랭킹 20위가 되시겠네요. 바로 이 순간부터요.”

“아···”

“죄송해요. 일을 번거롭게 해드려서. 필요한 서류는 나중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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