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27화 (12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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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8: 불타는 배 (7)

Episode 38: 불타는 배 (7)

“괜찮아요, 준기 씨?”

땀에 흠뻑 젖은 이준기가 고개를 들고 눈을 뜬다.

바실리사가 바닥에 쓰러진 그를 안아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

이준기의 손아귀에 통증이 느껴진다.

이준기는 손을 눈앞으로 가져와 손바닥을 편다.

브릴리언트 컷으로 세공된 다이아몬드.

너무 꽉 쥔 손아귀를 다이아몬드의 꼭짓점들이 찌르고 있었다.

“끝났어요. 던전 클리어 했어요!”

이준기는 바닥을 손으로 짚고 일어나 앉는다.

계단을 올라와 13층 홀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세르게이가 보인다.

“대장!”

“세르게이.”

“우리가 해냈어! 싸우는 도중에, 정령이 스르르 사라지더라고! 그러더니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메시지가 나왔어!”

바실리사도 말한다.

“네. 제가 싸우는 사이에, 준기 씨가 보석 상자를 열었잖아요. 그리고 그 순간, 제가 싸우던 상대가 사라졌어요. 유령 같은 모습의 그 마법사가··· 갑자기 공중분해 됐다고요.”

“다치지 않았어요, 바실리사?”

“네, 괜찮아요. 처음 보는 상대라서 조금 겁먹긴 했어요. 하지만··· 이제 끝났어요!”

“다행이에요. 그리고 수고했어요, 바실리사도, 세르게이도.”

바실리사와 세르게이의 대답.

“아냐, 대장이 제일 수고했지.”

“맞아요. 준기 씨가 제일 힘겨운 싸움을 했죠. 이렇게 땀범벅이 되다니···”

각오는 했던 것이지만, 보석이 보여주는 환상은 그를 완전히 탈진시켰다.

검은색 절망의 오라가 보석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이준기는 조슈아를 만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믿음 대로,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조슈아 테일러와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다.

절망의 쓴맛을 입안에 가득 남긴, 조슈아 테일러와의 첫 만남.

바실리사가 물었다.

“꿈···을 꾼 거예요?”

“꿈··· 그런가요. 그렇게 긴 꿈을···”

“순식간이었어요, 저희에게는.”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네요.”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건지, 얘기해 주지 않을래요?”

이준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녜요, 바실리사. 개꿈일 뿐인데. 그저, 던전 클리어를 위한 시련일 뿐이었다고요. 아무 의미도 없는.”

“도대체 무슨 악몽을 꾸었길래 그렇게 땀을 비 오듯 흘렸는지, 안타까워서 그래요.”

“그냥···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온 나쁜 기억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서 영화처럼 본 것뿐이에요. 그냥··· 부끄러운 기억들이죠.”

“아··· 그렇다면 말하지 마세요. 물어봐서 죄송해요.”

“아녜요. 바실리사.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

탑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저녁 7시 40분.

던전 입구에서 탑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포함해서, 클리어까지 걸린 시간은 70분 정도.

‘이 정도라면, 훌륭한 동료들이다. 조슈아 테일러에 맞서 싸워줄 수 있을까.’

- 해골왕의 면갑.

- 투구. 에픽 등급.

- 착용 효과: 암흑 저항 +50. 물리 저항 +10.

- 발동 효과: 정면에서 받는 공격을 일정 확률로 빗나가게 합니다.

투구 아이템은 전부 레어 등급이라서 누가 갖게 되더라도 업그레이드가 되는 상황.

그러나 이준기와 바실리사는 입을 모아 세르게이에게 양보했다.

발동 효과는 상당히 쓸만하지만, 해골 모양의 면갑이라니.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세르게이가 어색한 듯 웃으며 아이템을 접수했다.

이준기와 바실리사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성능은 별로지만 그냥 선글라스가 낫지.’

‘머리띠 대신 해골가면 쓸 뻔했네. 휴우.’

“어때, 대장? 어때요, 바실리사?”

세르게이는 가면을 쓰고 팀원들에게 물었다.

정면에서 공격하는 상대가 왜 일정 확률로 착용자를 빗맞히게 되는지, 알 만한 비주얼.

혐오스러운 정도가 지나치니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이준기는 세르게이의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의 옆으로 가서 등을 두드렸다.

“세르게이, 오늘 정말 잘해줬어!”

“고마워, 대장!”

*****

러시아식 요리 전문이라는 허름한 식당에서 셋은 저녁을 먹었다.

누추한 분위기의 식당이었지만, 식사는 맛있었다.

세르게이가 만족한 고양이처럼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대로 된 러시아식 식사는 오랜만이네. 정말 잘 먹었다.”

“고마워, 세르게이. 식당 간판만 보고 좋은 곳을 용케 알아냈네.”

“요행이지 뭐.”

“운이 좋은 사람 옆에 있으면 이렇게 덕을 보게 되는 거지.”

“저녁은 먹었고, 이제 어떡하지?”

“숙소 찾아야지. 다시 밤에 잠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정상 패턴으로 돌아가자고.”

“숙소··· 구글로 좀 찾아볼까?”

“그래. 그러자.”

세르게이는 휴대폰 앱을 열고 호텔을 검색했다.

“키예프에 좋은 호텔 많군. 하얏트, 인터컨티넨털, 페어몬트도 있네? 별로 비싸지도 않고. 뭐, 숙박료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기는 하지만.”

“유명 체인에 소속된 호텔이라면, 러시아 쪽이든 우크라이나 쪽이든 마피아의 레이더 안에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 그건 그렇겠네. 그렇다면 동네 모텔 같은 곳으로 가야겠군.”

“문제는, 그런 곳이 요즘 있냐는 거지. 작은 호텔들도 베스트웨스턴이든 홀리데이인이든 프랜차이즈에 가입되어 있을 테니.”

“그렇다면··· 공유 숙박?”

“복불복이기는 한데, 일단 마피아가 거기까지 손을 뻗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그래, 알았어.”

공유 숙박 앱을 두드려 세르게이는 적당한 숙소를 물색해 냈다.

“호스트 사진이 중요하지. 가족 중 다른 사람의 사진을 쓰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호스트 본인 사진은 포함시키는 것이 의무라고 들었어. 호스트로는 역시 할머니가 좋지 않겠어?”

“그렇겠지.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우리가 단독으로 쓰는 형태보다는, 호스트와 공간을 공유하는 방식이 조금 더 안전할 거고.”

바실리사가 한 마디 했다.

“세르게이, 제법인데? 원래 그렇게 머리가 좋았던 거야, 아니면···”

“물론 대장, 그러니까 알료샤, 그리고 바실리사와 함께 다니다 보니 머리를 굴려야 하는 상황이 많아져서 그런 거지.”

“칭찬인지 악담인지 모르겠군.”

“긴장감이 좀 있어야 뭐든지 진지해지는 거 아냐? 이런 걸 좋은 스트레스라고 하던가?”

“그래서··· 좋은 물건은 찾았어?”

“이거 어때? 할머니 한 분이 혼자 사는 아파트인데, 방 두 개, 화장실 하나. 물론 화장실은 우리끼리만 쓰는 거고.”

“키예프에도 화장실 두 개인 아파트가 꽤 있나 봐?”

“연금생활자겠지.”

“왠지 비꼬는 느낌인데?”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부러워서.”

*****

그들은 걸어서 이동했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주위를 관찰하면서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내전 중이나 다름없다는 시가지는 조용했다.

간혹 부서진 건물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폭력이 현재진행형이라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라면, 길거리에 사람들의 통행이 많지 않다는 것.

“원래 이렇게 한적한가, 키예프는?”

“나도 그 생각을 하던 중이야, 대장. 겨울이라 춥기도 하지만, 아직 열 시도 되지 않았는데, 사람이 너무 없어. 자정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군. 바실리사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람이 바글거릴 이유야 없겠지만, 지나치게 조용하군.”

식당에서 숙소까지는 보통 사람들의 걷는 속도로 15분 정도의 거리.

구원자라는 정체를 들켜서 좋을 것이 없으므로 그들은 천천히 걸었다.

멀리서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골목 안쪽에서 갑자기 군복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며 그들을 제지했다.

둘 중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쪽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잠깐, 멈춰라.”

이준기가 먼저 걸음을 멈추고, 세르게이와 바실리사가 그의 뒤에서 차례로 멈췄다.

모르는 사람이 다가올 경우, 바실리사가 응대하기로 결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바실리사가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무슨 일이죠?”

“왜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지, 밝혀라.”

“무슨 말이죠? 이 시간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말인가요?”

“그걸 몰랐다고 얘기하는 거냐? 설마··· 여행객인가?”

“네, 맞아요.”

“어디에서 왔냐?”

“저는 벨라루스, 여기 이 사람은 한국, 그리고 이 사람은··· 리투아니아에서 왔어요.”

“다국적 여행객이라고?”

“예전에 서유럽을 배낭 여행하다가 만난 사이예요. 다국적으로 함께 여행을 다니면 안 된다는 규정이라도 있나요?”

세르게이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미녀가 대화를 담당하는 것이 저쪽의 경계를 풀 것 같아서 바실리사를 내세운 것인데.

지금 말하는 투를 보면 일부러 싸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둘을 떼어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세르게이가 앞으로 나서서 바실리사 대신 말했다.

“아··· 그런 뜻이 아니고요···”

그러나 상대방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언짢다는 듯한 표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무례하게 들렸다면 내가 사과하지. 좀 특이한 것 같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아무튼, 키예프에는 도대체 왜 왔나?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라는 말도 못 들었나?”

상대방은 분명히 바실리사에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므로, 세르게이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바실리사가 상대방의 질문을 되받았다.

“전쟁 중이라고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사실상 전쟁 중이야. 뉴스에 나올 텐데.”

“글쎄요. 국제 뉴스는 별로 신경 써서 보는 편이 아니라서.”

“그래? 이곳 전쟁은 구원자들이 벌이는 전쟁이야. 뉴스에 크게 난다고 들었는데. 다른 나라 뉴스에서도 말야.”

“몰랐군요. 거리가 이렇게 조용한데, 전쟁 중이라고요?”

“전쟁 중이라서, 거리가 이렇게 조용한 거다.”

“숙소가 요 앞이에요. 여기에서 도보 5분 거리 정도 될 텐데···”

“신분증은?”

“그걸 들고 다녀야 하나요? 숙소에 있어요.”

“숙소? 호텔 프런트에서 이 시간에 나다니지 말라고 안 했단 말야?”

“공유 숙박 숙소라서요. 호스트는 그냥 할머닌데··· 아무 말 안 하시던데요.”

“왜 나온 건데?”

“배고파서요. 저녁은 먹어야 하잖아요?”

“내일부터는 저녁도 일찍 먹고, 9시 이후에는 바깥에 나오지 말아.”

“알겠어요. 그런데, 그거 명령인가요?”

“명령이다.”

“당신, 경찰은 아니잖아요? 군인이에요?”

“민병대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크라이나에 경찰 같은 건 이미 없어. 아니, 뭐, 형식적으로 경찰이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경찰 역할을 실제로 하는 것은 민병대다. 어느 쪽 민병대냐에 따라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할 거다. 나를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무슨 얘기예요?”

“난 우크라이나 민병대 츠바코프 대위다. 러시아 놈들이었다면, 일단 너희들 지갑부터 털었겠지.”

바실리사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준기는 그녀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키예프에 와서, 이제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는 대학생 배낭 여행객.

거기에 바실리사의 미모라면.

“대위님, 그럼 우린 어떡하죠?”

“우크라이나 여행이라니, 너무 무모해. 돌아가는 걸 권장한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는걸요. 숙박비도 이미 다 결제해서 취소할 수도 없다고요···”

“며칠이나 있을 건데?”

“4박이에요.”

“대낮에만 돌아다니고, 어두워진 다음에는 숙소에서 나오지 마.”

“키예프 거리 한복판에서 총격전이라도 벌어진다는 건가요?”

“그래.”

“정말요?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이 근처에서도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 키예프에서 총격전은 거의 없다는 거야. 지난 연말에 크림반도··· 그러니까 상황이 조금 바뀌어서 러시아 녀석들이 키예프에서 거의 나가버렸거든. 다른 지역에 공세를 집중하고 있지.”

“그럼 당분간은 안전하겠군요? 우리가 여행 중인 동안에는.”

“아니. 장담할 수 없다. 총격전이 거의 없다고 했지 아예 없다고는 말 안 했어. 지난주였던가? 산발적인 총격전이 있었지. 그때도 이 근처는 아니었지만.”

“어디였죠?”

“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지? 외국인이라면서?”

“총격전 난 곳은 가지 말아야죠.”

“하긴 그렇군. 지난주에 총격전이 발생했던 곳은, 강 건너 남동쪽이다. 보리스필··· 그러니까 공항 쪽이군.”

“키예프 시내는 아니군요?”

“그래. 키예프 시내는 아니지. 행정구역으로 따지자면 말야. 하지만 그게 그거지. 게다가 공항 근처다. 귀국할 때는 비행기로 나가나?”

“아니, 기차로요.”

“그렇담 다행이군. 행운을 빈다.”

“고마워요, 대위님.”

“조금 안타깝군. 평화로울 때 방문했다면, 키예프는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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