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26화 (12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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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8: 불타는 배 (6)

Episode 38: 불타는 배 (6)

헬렌 카자크의 호리호리한 몸이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추락한다.

멀어서 그런지, 그녀가 회색빛 땅으로 곤두박질칠 때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왠지 땅에서는 파편이 튄 것 같지만.

“헬렌!”

“이준기,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조슈아!”

“샌프란시스코로 와라.”

샌프란시스코.

롬바르드 거리(Lombard Street) 입구에 있는 작은 카페.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는 환상적인 자리에서 헬렌과 이준기는 커피타임을 즐기고 있다.

“정말 예쁜 거리네.”

“돈 지랄이지.”

“하하, 역시 헬렌은 의외로 독설가라니까.”

“이 작은 카페 월세가 얼마나 할 것 같아?”

“글쎄···”

전파 방해라도 있는 것처럼 헬렌의 모습이 지직거리더니, 조슈아로 바뀐다.

“너, 이 풍경이 마음에 드냐?”

“조슈아! 헬렌은 어디 가고···”

“이따위 평화로운 모습···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지.”

“무슨 소리···!”

조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롬바르트 거리 꼭대기를 향해 손을 뻗는다.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건물들.

흙먼지 속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비명 지르는 소리,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펼쳐진다.

“어때? 멀리에서 쳐다보니까 그림 같지?”

“이 자식!”

“왜 그래? 네가 좋아하는 토머스 킨케이드(Thomas Kinkade) 그림 같지 않나?”

“너···”

“아! 킨케이드 그림이라면 불빛이 좀 있어야지.”

조슈아는 이준기를 바라보면서 뒤쪽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폐허가 되어 돌조각이 굴러다니는 롬바르드 거리를 향해 한 줌 불꽃이 날아간다.

여기저기를 튀어 다니면서 건물과 사람들에게 불을 붙이는 도깨비불.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더욱 커지고, 불바다가 된 거리는 마치 거대한 화톳불이라도 되는 양 경쾌하게 타오른다.

“하하하! 샌프란시스코 관광은 즐거운가?”

“조슈아 테일러!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왜긴 왜야··· 네놈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까지.”

“무슨 말을 들으라는 거냐!”

“내가 너에게, 아니 모든 구원자들에게 했던 명령··· 기억이 나지 않는단 말이냐? 유튜브나 찾아봐라. 내 연설 영상, 조회 수가 10억도 넘는다.”

“내가 왜 네 명령을 들어야 하지? 그리고, 네 주장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 그래? 네 주장은 말이 되고 말이지?”

“내 주장이라니?”

“네놈의 생각··· 그리고 행동 말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순간, 조슈아 테일러의 모습이 지직거리면서 사라지고 키라트 싱이 그 자리에 앉는다.

불바다가 된 롬바르드 거리의 모습 대신, 뭄바이의 혼잡한 시내가 나타난다.

초호화 호텔 바로 옆의 허름한 식당.

식당 문은 열려 있다.

식당 바로 옆을 달리는 포장도로의 끝부분은 마무리가 엉망이어서, 부서진 아스팔트 가루가 갓길의 흙과 섞여 바람에 날린다.

그렇게 흙먼지가 날리는 갓길 바로 옆에서 영업하는 식당 문은 열려 있다.

냉방이 되지 않으니까.

키라트 싱이 말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키··· 키라트? 내가 지금 인도에 와 있는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준기. 꿈이라도 꾼 거야?”

“그··· 그런가. 꿈이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하지만, 이건 꿈이 아냐. 초호화 호텔 바로 뒷길에는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산다. 넌 예전에, 저 호텔 창가에 서서 이 골목길을 본 적이 있지. 아니··· 사진을 찍었었지. 블로그에 올리려고.”

“그··· 그건···”

“재미있나, 우리 사는 모습이?”

“아니, 신기해서 찍은 건 사실이지만···”

“내 고향, 파티알라(Patiala)는 이것보다도 훨씬 열악하지.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다. 한번 오지 않겠어?”

“아니, 키라트. 난··· 그 사진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볼 여지가 있구나. 미안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행동보다는, 그 행동을 유발한 동기를 너는 언제나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지. 그렇지 않나? 하지만 모든 행동을 설명하고 다닐 수는 없잖아?”

“그, 그래. 그렇지.”

“게다가 이런 말도 있지. 말보다는 행동이 더 크게 말한다.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말 따위보다는, 행동 그 자체가 더 큰 진실을 담고 있는 거야.”

“그··· 그런···”

“행동 그 단계에서 모든 것이 끝난 거다. 말로 하는 정당화 따위, 의미 없어. 처음부터 행동을 잘했어야지.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더 많이 했어야지. 그렇지 않아?’

“그래. 맞아.”

“조슈아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한다면 어떨까? 정당화가 되기는 할까? 만약 정말 그럴싸한 변명을 가져다 댄다면? 그렇다고 그의 살육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물론, 그건 아니지.”

“나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남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그대로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네가 조슈아에 맞서는 우리의 리더가 되려면.”

“리··· 리더라니. 난 그럴 자격이···”

“하하하! 과연 그렇구나. 네놈이 과연 그럴 자격이 있나?”

“키··· 키라트!”

이준기의 눈앞에서 키라트 싱이 다시 조슈아 테일러의 모습으로 바뀐다.

입가에는 상큼한 미소를 띤 채 이준기에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는 조슈아 테일러.

“이봐, 이준기 씨. VPN 같은 걸 쓴다고, 내가 당신 위치를 모를 것 같아요?”

“조슈아!”

“나는 언제나 당신 근처에 있습니다. 절대로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요.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하라는 격언을 언제나 새기며 살고 있죠.”

“왜 그런 일을 하는 거지? 넌, 누구보다도 유능한 구원자인데!”

“유능한 구원자이기 때문이죠. 이런 세상···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 것 같아요? 생각해 봤어요?”

“무슨 얘기냐?”

“그건 이준기 씨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기후변화, 미세먼지, 원자력 발전소 사고, 태평양을 떠다니는 신비의 쓰레기 섬···”

“그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 너의 방식이라는 거냐?”

“저는, 인류의 발명품 중에 가장 잘못된 것이 인권이라는 개념이라고 봐요. 인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다들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거죠. 무책임하게.”

“그··· 그런···”

“애초에 무슨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뿐인 이 행성을 그렇게 험하게 다루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네가 인류를 통제하겠다는 거냐?”

“통제 따위 관심 없어요. 저는 그저, 방종한 인류를 혼내주고 싶은 겁니다. 마침 좋은 기회 아닙니까? 우리는 구원자잖아요. 그럴 힘이 있어요.”

“구원자들도··· 인간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요?”

조슈아의 모습이 지직거리면서 이번에는 길수연이 나타난다.

장소는 해운대.

아니, 해운대 차원문 안쪽의 그 던전이다.

바로 왼쪽에 불지옥 호수가 불타고 있는데, 하필 그 천 길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둘은 피크닉이라도 하는 자세로 앉아 있다.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길수연. 그녀가 입을 연다.

“준기 씨, 여기 생각나요?”

“해운대··· 차원문. 오크 전쟁기지. 그렇죠?”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차원문 유형까지 기억하고 계시다니 대단해요. 전 언제나 준기 씨의 그런 능력에 대해 감탄해 왔죠.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알고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시시콜콜한 디테일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하고 말이죠.”

“그, 그건···”

“아뇨.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왠지 알 것 같으니까.”

“네?”

“그런데 말이죠, 여긴 해운대 차원문이 아녜요. 적어도 저에게는.”

“아··· 다른 차원문이군요? 오크 전쟁기지 포맷의 다른 차원문.”

“아뇨. 그런 게 아니고요. 제가 준기 씨와 함께한 던전이 몇 개나 되겠어요. 준기 씨가 맞아요. 이 던전은 바로 그 던전이죠. 우리가 처음 함께했던 그 던전. 이 차원문 바깥에는 해운대 백사장이 펼쳐져 있죠. 그건 사실이에요.”

“네··· 그렇다면?”

“준기 씨에게 이곳은 그저 또 하나의 던전, 오크 전쟁기지 포맷의 던전이겠지만, 저에게는 나린이가 죽은 장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죠.”

“아··· 성나린 탱커···”

“왜 나린이가 죽게 놔둔 거죠, 준기 씨? 모든 걸 아는 준기 씨라면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나요?”

“그··· 그건···”

“생각해 봤어요. 왜 나린이가 죽었을까. 장혁수··· 그 애송이가 겁먹고 뛰어다니다가 몬스터들을 애드 시켜서? 그건··· 표면적인 원인일 뿐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준기 씨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불 정령들 근처에 오크 무리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도 아셨을 것 아녜요? 불 정령들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풀링해서 잡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건··· 한상태 탱커가··· 아니··· 무엇보다 그 당시 상황이···”

“준기 씨도 탱커였잖아요? 저는 알아요.”

“제, 제가요?”

“불 정령들 탱킹은 수십 번도 더 해보셨겠죠. 그런데 도대체 왜? 저레벨에 어떻게든 고레벨 던전에 들어와서 광렙을 하려고 그랬던 건가요? 빨리 고레벨이 되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나요? 사람이 죽어도 될 만큼?”

“수연씨···”

“준기 씨는 비겁해요. 정말 동료들을 걱정한다면, 모든 이야기를 했었어야 해요. 준기 씨가 탱커였다는 것, 레벨을 초월하는 던전 경험이 있다는 것, 그리고 80레벨에 이른 2023년의 미래로부터 돌아왔다는 것.”

“네? 그··· 그걸 어떻게···”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길수연의 목소리가 남자 목소리로 바뀌었다.

샌프란시스코 모스콘 센터(Moscone Center).

제6차 세계 구원자포럼 기조연설이다.

소위 ‘샌프란시스코 선언’으로 불리는 바로 그 연설.

연단 위에 조슈아 테일러가 서 있고, 방청석에는 이준기가 홀로 앉아 있다.

어두운 회의장 안에는 단 한 개의 조명만이 켜진 채로 조슈아를 비추고 있다.

연설 중인 히틀러를 향해 위에서 내리꽂는 한줄기 스포트라이트처럼.

“조슈아!”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느냐고? 당연하지 않나? 바로 내가, 조슈아 테일러가 네놈의 심장에 칼날을 꽂아 넣었으니까.”

“여, 여긴···”

“마음에 드나? 나라는 인간, 조슈아 테일러라는 존재가 인간 이준기에게는 과연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을까? 나름대로 연구를 좀 해봤지. 그래서 얻은 결론이다. 아마도, 네가 나에 대해서 가진 맨 처음 이미지는 이것이겠지. 구원자들이 지배하는 세상. 그걸 주장하는 내 연설 말이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 너도 알 텐데?”

“말이 안 된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오히려 그 반대다. 구원자라는 존재가 왜 갑자기 생겨났을까? 중학교 때 진화론 배우지 않았나?”

“그런 진화론은 배운 기억이 없다.”

“아냐. 넌 배웠다. 진화론은 원래 그런 것이지. 원래 다윈이 말했던 것. 그건, 인간이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다윈을 그렇게 싫어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도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게 하지 마라. 인간과 원숭이가 같고 또 다르듯이, 구원자와 일반인은 같고 또 다르다. 같다면, 동물이라는 범주에서 같은 것이고, 다르다면, 종이 다른 것이지.”

“궤변이다.”

“구원자는 일반인과 종이 다르다. 우린 다른 종이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 구원자들이 인간들을 가축 삼고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가축이라는 말, 너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마라. 가축이 되면, 멸종의 공포에서 멀리멀리 벗어날 수 있으니까. 인류는 우리의 가축이 되어, 영원히 번영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

“집어치워라, 그따위 개소리.”

“나를 거역하겠다는 건가?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뭐라고?”

“다시 보여주지.”

어두운 회의실에 홀로 켜져 있던 조명이 꺼진다.

그리고 다시 그곳.

조슈아 테일러의 결계 안이다.

검은 하늘을 떠다니는 여남은 개의 흙 섬.

그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헬렌 카자크가 또다시 수직 낙하한다.

“헬렌!”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이준기는 그녀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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