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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8: 불타는 배 (5)
Episode 38: 불타는 배 (5)
악몽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바실리사는 물론 세르게이도 보석함을 자기가 열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이준기의 고집이 제일 셌다.
‘블라디미르 아쉬코프가 그렇게 도발을 했지만, 바실리사는 마피아에게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말하지 않았지. 바실리사가 보석함을 연다면, 그녀가 그렇게까지 마음속에 봉인한 그 기억이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절대로, 그녀에게 그런 고통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준기는 바실리사에 이어 세르게이를 쳐다보았다.
‘세르게이 역시 마음 아픈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동생이 죽은 것도 그렇고, 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도 있지. 게다가 세르게이는 바실리사보다 멘탈이 약하다. 보석함 열기에 실패하면 다시 1층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세르게이의 멘탈이 깨진 상태로 다시 도전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래서 이준기는 스스로 멍에를 짊어지기로 했다.
이것은 애초부터 리더의 역할이다.
팀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사람이라면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셋은 탑의 입구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이준기가 둘에게 말했다.
“자, 이제 문을 열겠습니다. 빠르게 갑니다. 몬스터 잡는 속도가 엇갈리면 리젠되는 몬스터를 다시 잡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데, 그건 대단한 페널티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예전에는 몬스터 잡는 시간을 재면서 해보기도 했는데, 별 실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맘 편하게 하세요. 준비됐나요?”
“그런데, 준기 씨. 정말 괜찮아요, 보석함? 제가 열어도 되거든요.”
“바실리사, 고맙지만 그건 그냥 제가 할게요. 그렇게 결정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준기 씨가 너무 많은 걸 혼자 하는 것 같아서요.”
“아녜요.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악몽도 꿔본 사람이 더 잘 꾸는 거죠.”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예요?”
“싱거운 농담이었습니다. 사실, 악몽이라고는 했지만 별거 아니에요. 제가 경험자니까 제가 처리한다고 하는 겁니다. 부담 가지실 필요 조금도 없어요.”
“좋아요. 그렇게까지 얘기하신다면···”
“자, 그럼 갑니다. 준비되신 거죠?”
*****
서울 모처의 고급 호텔.
보안이 철저한 비밀 회의실에서 신학길, 이상덕과 하시바 세이이치로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재 한국 상위 랭커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하시바 세이이치로는 수동적으로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시시콜콜한 질문을 쏟아붓는 하시바.
신학길은 종종 정보가 부족하다고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는 상황에 닥쳤다.
“그래요? 한상태, 김범규에 이어 김나리도 미혼이다. 이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부모는 인질로 가치가 많이 떨어져요. 인질은 역시 애새끼가 제법인데, 한국 구원자들은 왜 이렇게 결혼을 안 합니까?”
결혼 얘기가 나오자, 이상덕은 하고 싶은 말을 툭 던졌다.
“4년 연속 합계출산율 0점대를 기록하는 한국에 뭘 바라십니까?”
“합계출산율이 0점대라고요? 합계출산율··· 그거 정상이라면 2 정도는 나와야 하는 거죠?”
“2.3이라고 하더라고요. 영아 내지 유아사망률 고려해서.”
“그런데 그게 0점대라고 하시는 거군요?”
“네. 작년, 그러니까 2021년에 0.8대까지 떨어졌죠.”
“일본도 출산율이 저조해서 걱정인데, 한국은 더 하군요.”
“우리가 후발대이기는 하지만, 뭐든지 일본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경향이 좀 있죠.”
“좋은 것 말고, 나쁜 것까지 그러실 필요가 있나요.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하시바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잡담은 그 정도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최현··· 이자는 가족이 있습니까?”
“최현,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위에 있는 나현우. 이 두 사람만이 기혼자입니다. 여기 이 목록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요.”
“애도 있나요?”
“최현은 딸이 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현우는 아들 하나.”
“집 주소, 전부 가지고 계시죠?”
“그렇긴 한데, 나현우는 아마 기러기 아빠일 겁니다.”
“기러기··· 아빠···”
“아내와 아들은 지금 캐나다에 있어요.”
“뭐, 상관없습니다. 캐나다 주소를 주세요. 나현우가 어디 살든 그건 제 알 바 아니니.”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그나마 조금 일찍 오길 잘했네요. 아직까지 그런 정보를 확보하지 않고 있다니···”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습니다.”
“전쟁이라는 건, 승패가 모든 걸 말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방법을 계산에 넣고 있어야죠.”
“명심하겠습니다.”
“리스트 아래쪽 사람들도 전부 다 미혼이라는 거죠? 신다은, 김새로미, 한소미, 문아린··· 여자분들은 나이대도 어린 쪽이니 그렇다고 치고, 장대한 이 사람도?”
“장대한 역시 미혼입니다. 그 사람 사진 보시면 아시겠지만···”
신학길은 말꼬리를 흐렸다.
우락부락한 인상에 몸집까지 거대한 장대한.
금전 감각도 시원치 않아서 돈도 못 모았다고 한다.
미혼인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나···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외모가 콤플렉스임에 분명한 하시바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한편, 이상덕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대한과 하시바 세이이치로, 거꾸리와 장다리.
한 팀으로 짜면 재미있는 만담 콤비가 되지 않을까.
“좋아요. 애인 따위는 인질로서 가치가 전혀 없으니, 가족이 없다면 다음은 돈이죠. 돈 문제 있는 구원자들 많죠?”
“네··· 아마도···”
“아마도? 협회에서 회원들 재정 상황은 체크 안 합니까?”
“프라이버시 문제인데 그걸 어떻게 체크합니까?”
신학길은 이번에야말로 맞받아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협회에서 회원들 재정 상황을 체크하라니, 제정신인가.
“협회가 그걸 왜 체크 안 합니까? 당연히 체크해야죠!”
“네?”
“회원들 재정 상태가 안 좋으면 결국 협회에 문제가 생깁니다. 당연히 체크해야 합니다. 상조회에 회비 내지 않는 회원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체크 안 한다고요?”
“협회는··· 상조회가 아니잖아요.”
“신 총장님도 물러터지셨군요. 협회는 하나의 가족··· 같은 겁니다. 가장은 가족 구성원들의 모든 걸 알아야죠. 돈 문제 있는 구원자, 누굽니까?”
“그··· 글쎄요. 오대영이나 변희영이 씀씀이가 큰 건 알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 편이잖아요!”
“네, 네. 그렇습니다. 저쪽은 글쎄···”
“나현우, 기러기 아빠라고 했죠? 그렇다면 거의 확정적으로 돈에 쪼들리고 있겠군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글쎄요···”
“학자금, 사업자금··· 이런 것들보다는 역시 도박이 좋은데. 도박에 빠진 놈, 없어요?”
신학길은 생각했다.
도박이라면 예전에 해운대에서 사망한 장혁수 같은 놈이 유명했지.
사업 말아먹고 큰 빚을 져서 노예 생활을 한다던 김형채도 죽은 지 오래다.
“알아보겠습니다.”
“빨리 알아보셔야 하겠네요. 수요일이면 이제 나흘 정도밖에 안 남았죠? 주말에 접촉하기가 쉬울지 어떤지도 모르겠고.”
*****
바실리사가 1층의 오크 주술사를 상대하는 동안, 세르게이와 이준기는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했다.
바실리사 다음 순서는 이준기.
2층 몬스터는 오우거 마법사.
이준기는 세르게이에게 화이팅을 외치고 뛰어나갔다.
오우거 마법사가 지팡이를 높이 들면서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3층으로 통하는 계단 통로가 열렸다.
이준기의 뒷모습을 한번 쳐다보고, 세르게이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3층에 도착하자, 놀 검투사가 홀 중앙에 서 있었다.
‘놀이라··· 타이탄 테라코타를 쓰면 쉽게 잡겠지만··· 앞으로도 최소 네 개 층을 정리해야 하니 첫판에는 스킬을 아껴야겠군.’
세르게이는 양손둔기, ‘퍼시벌의 평온’을 쥐고 달려 나갔다.
놀 검사는 허리춤에서 긴 카타나를 꺼내들었다.
두 개의 무기가 공중에서 만나 잠깐 대치했다.
힘 스탯이 우세한 세르게이의 둔기가 놀 검투사의 카타나를 찍어눌렀다.
쾅!
둔기의 궤적을 바닥으로 흘려 내리고, 놀 검투사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옆으로 비켜섰다.
평균 키가 3미터라는 놀.
180센티미터인 세르게이는 그러나 놀 검투사의 키가 자신의 두 배는 된다고 느꼈다.
무기를 들고 근거리에서 맞서니 위압감이 남달랐다.
‘말로만 듣던 놀··· 대장이 시키는 대로 공부를 좀 하기는 했지만 효과가 있을까?’
호리호리한 체격, 긴 팔다리에서 나오는 리치의 우월함이 놀 종족의 장점.
반면, 골격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
특히 두개골 충격에 약하기 때문에 ‘타이탄 테라코타’와 같이 기절시키는 부가효과를 가진 스킬은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겨우 첫 번째 몹이다. 스킬은 아껴야지.’
몇 차례 더 무기가 맞붙었다.
이준기의 조언에 따라 최대한 방어적으로 적을 상대하던 세르게이.
드디어 빈틈을 노려 적의 허리를 강타하는 데 성공했다.
휘청거리는 상대.
세르게이는 연이은 동작으로 놀 검투사의 무릎을 때렸다.
다리를 맞고 바닥에 쓰러진 적을 향해 ‘퍼시벌의 평온’이 날아들었다.
3미터 공중에 있어 손도 대보지 못했던 머리가 이제 타격 가능한 높이로 내려왔다.
뒤쪽의 계단으로 사람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실리사가 1층을 클리어한 모양이다.
*****
11층에서는 불 정령을 만났다.
해운대에서만 해도 정말 강한 상대였지만, 이제는 화염 오라를 씹고 타격이 가능한 수준이다.
불 정령의 피가 반 정도 빠졌을 때, 12층으로 올라가는 세르게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정령의 불꽃이 거의 꺼져가는 상황에서도 계단실에서 다른 사람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10층 정리가 조금 늦어지나 보다. 약간 페이스를 늦춰야···’
죽어가는 불 정령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는 이준기.
사그라져가던 불꽃이 조금씩 다시 타오르면서 불 정령이 생명력을 회복해갔다.
‘상관없다. 보석함에는 스킬이 필요 없으니, 바실리사가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오면, 맹공이다.’
드디어 계단실을 오르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준기는 방향을 전환하여 계단실 쪽을 바라보았다.
“바실리사!”
“준기 씨! 이제 13층 올라가요!”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12층···
그리고 13층.
이준기는 ‘귀검’을 발동하고 정령에게 화력을 집중했다.
이내 펑크난 물풍선 모양이 된 불 정령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준기는 계단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한 번에 두 계단씩,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12층.
세르게이가 대지의 정령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대진운이 좋다.
계속해서 둔기가 유리한 상대를 만나고 있다.
13층.
꼭대기 층이다.
유리 돔으로 덮힌 천장을 통해 밤하늘의 별자리를 볼 수 있었다.
지구에서 보이는 별자리는 아니지만, 별이 가득한 밤하늘.
지구에서보다 훨씬 높은 각도로 보이는 은하의 띠 부분, 그러니까 은하수가 한여름의 황도라도 보여주는 것처럼 하늘 한가운데를 가르고 있었다.
유리 돔 안쪽으로 비치는 우주의 웅장함에 감탄하는 것은 그만두고, 이준기는 빠른 속도로 홀 건너편의 선반을 향해 달렸다.
홀 중앙에는 바실리사가 이그니 마법사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쉽지 않은 전투다.
서둘러야 한다.
이그니 마법사의 화염구가 마치 스크류볼와 같은 궤적을 그리며 바실리사에게 날아들었다.
빠른 속도로 오른쪽 뒤를 향해 움직였지만, 불길은 그녀를 따라왔다.
바실리사의 방패에 화염구가 직격했다.
그녀의 몸이 뒤로 밀리면서 쓰러지는 것이 기둥 사이로 보였다.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이준기는 거리를 유지한 채 홀을 가로질러 달렸다.
이그니 마법사와 싸우는 것은 바실리사의 몫이다.
이준기의 몫은 홀 건너편에 있다.
이준기가 자기 몫을 제대로 해내면, 시련은 끝난다.
바실리사도 힘겨운 전투를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
이준기의 눈앞에 목표물, 즉 보석함이 나타났다.
계단에서 가장 먼 쪽의 벽, 선반 위에 놓인 자그마한 놋쇠 상자다.
대리석 선반에 놓인 그 상자에서는 실같이 가느다란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검은색··· 절망.’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이준기는 직감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달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선반 바로 앞에 도착한 이준기.
놋쇠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혔다.
검은색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이준기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