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22화 (12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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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8: 불타는 배 (2)

Episode 38: 불타는 배 (2)

초인종이 울렸다.

‘잘못 누른 거겠지.’

그러나 30초쯤 지나서 다시 울리는 초인종.

어두운 방을 나와, 어두운 조명이 비추는 거실 벽 인터폰 화면을 그녀는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다.

잠시 갈등했지만, 그녀는 인터폰에 대답했다.

“수연 씨··· 웬일이세요.”

“문 좀 열어줘요. 치킨 사 왔어요.”

치킨?

안 좋아한다.

그러나 길수연과 치킨의 조합이라니, 뭔가 어긋난다.

잠깐 피식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문아린은 즉각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두운 실내를 응시했다.

길수연이 인터폰 저편에서 다시 말했다.

“문 열어줘요. 추워 죽겠어요.”

“죄··· 죄송해요.”

문아린은 문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수연이 아파트 문 앞에서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었다.

숨을 몰아쉬는 길수연이 문밖에 서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온 모양이다.

14층인데.

“아린 씨, 오랜만이에요.”

“수연 씨, 어서 오세요. 밖에 서 계시게 해서 죄송해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 들어가도 되죠?”

“네··· 네.”

길수연이 테이블에 앉고, 문아린이 차를 내왔다.

고소한 치킨 냄새가 실내 공기를 채웠다.

“치킨, 안 드실래요?”

“배고프지 않아요.”

“뭘 좀 챙겨 드시기는 하는 거예요?”

“네···”

“녹차네요? 커피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커피··· 안 먹어요. 이제.”

문아린의 말과 함께 침묵이 내려앉았다.

길수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켰다.

“활동을 아예 그만두시는 건 아니죠?”

“모르겠어요.”

“어제 총회에도 안 나오셨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아··· 총회가 있었군요.”

“광화문 차원문, 그 얘기예요. 나름, 중요한 얘기가 나왔죠.”

“아, 광화문요. 돌아다닐 때 좀 불편하긴 하겠네요. 그런데, 그쪽은 더 갈 일도 없어요, 저는.”

광화문 근처에 살던 사람, 그 사람이 이제는 거기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아린 씨.”

“네···”

“저는··· 준기 씨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네?”

“아린 씨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준기 씨가 죽었다는 증거가 있나요?”

“···”

“준기 씨 실종되고 나서, 아린 씨는 한 번도 구원자 활동을 하지 않았죠. 준기 씨가 돌아오면, 아린 씨 그런 모습을 좋게 봐줄까요?”

“제발··· 수연 씨··· 그만··· 이제 가 주세요.”

“광화문 차원문 공략, 다음 주 수요일이에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제발··· 수연 씨, 저 혼자 있고 싶어요.”

“이상덕 회장이 엄포를 놨어요. 20명이 모이지 않으면 일본 구원자들을 불러들인다고.”

*****

햄버거 가게에서 아침 식사 중인 바실리사, 세르게이, 그리고 이준기,

스크램블 에그, 감자, 머핀, 그리고 커피가 나와 있다.

그냥 드립 커피지만, 열 시간이 넘게 도로를 달린 그들에게 따뜻한 검은 액체는 반가웠다.

바실리사가 말했다.

“밤 새우고 마시는 커피는 또 별맛이네요.”

“그러게요. 졸려 죽겠는데 커피는 또 잘 들어가네요.”

“이런 커피를 좋게 얘기하시다니, 놀라겠어요.”

“커피, 사실 잘 몰라요. 그냥 때에 따라 맛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그런 거죠. 그럴 때마다 맛있다 맛없다 솔직하게 말해버리니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같아요. 제가 커피 입맛이 까다롭다고.”

“그런 거군요.”

“커피, 맛있을 수도 있고 맛없을 수도 있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니까 커피가 맛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과거, 광주에서 문아린과 단둘이 마시던 커피가 생각났다.

원래라면 문을 열지 않는 시간에, 그들 단둘을 위해서 연 카페.

가을 햇살이 따뜻하다고 했더니 문아린은 웃었다.

‘우하하.’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까, 털털한 그 웃음소리가 생각났다.

실종됐다는 뉴스를 보고 걱정을 하고 있겠지.

너무 많이 맘고생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바실리사가 물었다.

“차원문··· 찾아야죠?”

“네. 차원문 안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누가 침입할 수도 있으니 불침번은 서야겠지만요.”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어서요. 다른 나라니까 당연한 거지만.”

“알아볼 방법이 있을 겁니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좋겠죠.”

“주민들요···”

세르게이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난 잠깐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

커피 주전자를 들고 돌아다니는 종업원에게 물어서 세르게이는 화장실을 찾아갔다.

가게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화장실도 그다지 청결해 보이지는 않았다.

소변기 세 개가 있고, 가운데 소변기를 한 남자가 쓰고 있었다.

세르게이는 가까운 쪽의 소변기를 썼다.

‘우크라이나까지 왔구나, 결국.’

볼일을 보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면서, 그는 물끄러미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서, 옆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에 가운데 소변기를 쓰던 남자.

가죽 재킷, 문신, 그리고 짧게 자른 머리.

표준 깡패 규격에 딱 맞게, 뒷골목에서 갓 출고한 듯한 그 모습을 보자, 세르게이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야!”

세르게이는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았다.

옆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야, 너!”

제법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세르게이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손의 물을 세면대 안에 두 번 털었다.

주변을 찾아보았지만 종이 타월이나 건조기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혼잣말을 했다.

“하긴, 이런 변두리 식당 화장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옆 사람은 이제 제대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가 세르게이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나?”

“그래, 이 새꺄.”

“나 알아? 그런 식으로 남을 부르는 건 너무 친근하다는 거, 몰라?”

“뭐가 어째 ? 이 자식이···”

다짜고짜 날아온 주먹이었지만, 말 품새로 이미 예측했던 것.

세르게이는 몸을 뒤로 젖혀 여유롭게 피했다.

“이봐, 싸우고 싶은 거야?”

“이 미샤 님을 화나게 하고 살아남는 놈은 없다.”

미샤··· 세르게이가 사할린에서 수하로 부리던 떡대의 이름이다.

“깡패들은 미샤라는 이름을 좋아하나···”

“뭐가 어째?”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건 안 되지만···”

“뭐? 약한 사람?”

“나도 방어는 해야 하니까, 딱 필요한 만큼만 혼내줄게.”

미샤의 펀치가 다시 날아왔지만, 세르게이는 또 가볍게 옆으로 비켜섰다.

세르게이는 경쾌하게, 춤이라도 추는 듯이 미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미샤의 몸이 부웅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반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바닥에 일자로 누웠다.

미샤의 얼굴이 화장실 바닥에 처박혔다.

세르게이가 물었다.

“괜찮지?”

“너, 이 새끼. 죽인다. 퉷!”

미샤가 일어나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세르게이에게서 거리를 약간 벌리고, 미샤는 권투 자세를 취했다.

한 발은 앞으로, 한 발은 뒤로.

“역시, 코피 정도는 나게 해 줘야 하나?”

“이 새끼··· 기습 한 번 성공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냐?”

“화장실 바닥··· 더러운데. 한 번 더 키스하고 싶은 거야?”

“이 새끼··· 너 러시아 놈이지?”

“응? 어떻게 알았어?”

“깝죽거리는 게 딱 러시아 놈이네. 요즘 러시아 놈들이 너무 판치고 다니는데, 한 달 정도 병원 신세 지게 해주마.”

“난 말야, 너 같이 약한 녀석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냥 꿀밤 한 대 정도로 끝내자.”

“죽엇!”

미샤가 빠르게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이건 좀 봐줄 만한데. 아까보다 훨씬 나아.”

스트레이트를 거둬들이면서, 미샤는 자세를 추슬렀다.

“중학교 때부터 해온 권투다. 넌 오늘 죽었다. 알겠냐?”

“중학교 때부터라면··· 한 2, 3년 한 거야?”

“뭐가 어째?”

“너 지금 고딩 정도밖에 안 돼 보이니까. 아니면 그냥 철이 덜 든 건가?”

“참 잘도 나불거리는구나. 당장 주둥이를 닫게 해주마.”

“자신감은 좋아. 한 방 먹고도 기죽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야.”

“죽어라!”

미샤가 스트레이트로 원, 투를 먹였다.

물론, 공중에.

미샤는 연속 동작으로 한 발자국을 다가온 다음, 어퍼컷을 날렸다.

세르게이는 가볍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봐, 이봐. 권투 했다고 하지 않았어? 상대방을 한 번도 맞추지 못했는데 마무리 일격이야?”

세르게이는 미샤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 팔을 그대로 잡아당기면서 뒷걸음질 쳤다.

미샤는 다시 한 번 바닥으로 길게 누웠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엎어진 그의 얼굴은 화장실 바닥에 꽤 많은 면적을 접촉하고 있었다.

“또 덤빌 거야?”

“잘못했습니다, 형님.”

화장실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미샤가 대답했다.

*****

“안녕하세요, 미샤라고 합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세르게이가 웬 남자를 데려와 인사를 시켰다.

미샤는 자기소개를 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어색하게 두 사람이 인사를 받자, 세르게이는 바실리사와 이준기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우락부락한 남자를 바실리사 옆에 앉게 할 수는 없고··· 내가 바실리사 옆에 앉아야겠다. 미샤, 넌 대장 옆에 앉아.”

세르게이는 미샤에게 이준기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자기는 바실리사 옆에 앉았다.

이준기가 말했다.

“미샤? 혹시 넌 괴롭히고 싶은 사람 이름을 미샤라고 부르는 버릇이라도 있는 거야?”

“아, 아냐, 대장. 그냥 우연하게 이 사람 이름도 미샤더라고. 맞지?”

“네··· 네, 맞습니다. 미하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난데없이 우리와 합석을 하는 거지?”

“이 마을 사람인데, 우리에게 관광 안내를 해주겠다고 해서.”

바실리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관광 안내요?”

“네, 관광 안내. 요즘 도시마다 명물로 자리 잡은 그 희끄무레한 거 있잖아요.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도는 그거··· 어딨는지 안답니다.”

“아하.”

*****

“이건··· 교회?”

“수··· 수도원입니다.”

“아, 수도원!”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이준기에게 수도원이란 개념은 그냥 개념일 뿐이다.

머리를 이상한 모양으로 깎고, 칙칙한 색깔의 원피스를 입은 남자들이 줄지어서 이동하는 그런 곳.

<장미의 이름>이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에서 읽은 적은 있지만, 여전히 개념의 영역에 있는 단어.

바실리사가 이준기에게 말했다.

“준기 씨,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좋아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알료샤가 살던 그런 곳이죠, 여기.”

“아, 네. 그렇지 않아도 그 책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장미의 이름>도.”

“<장미의 이름>요? 그건 살인 사건 얘기잖아요? 중세이기도 하고, 너무 어두운 분위기인데요, 그건.”

“지금처럼 햇살 눈부신 아침에는 영 안 어울리는 얘기네요, 정말.”

“여긴 저도 처음이에요. 건물이 예쁘네요.”

“관광지··· 라고 봐야 하는 거죠? 지금은 시간이 너무 일러서 그런지 관광객이 보이지 않지만.”

미샤가 말했다.

“그··· 그것도 그렇지만··· 차원문이 있잖아요.”

“아, 하긴 그렇군. 여기에 우리가 온 이유가 그거였지. 잠깐 관광객이라고 착각했네.”

관광 안내문에 도착했다.

안내문은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그리고 영어로 되어 있었다.

“오오, 이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네요?”

“그렇네요. 저도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대장. 나야 뭐 모르는 거 천지지만.”

이준기는 영어 설명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 1051년 지어졌고··· 우와 오래됐네. 성 소피아 성당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성 소피아 성당이 이 근처에 있다는 거야? 이거 되게 유명한 거네? 현재 수도사들이 실제로 살고 있다···고? 아니 그럼 그 사람들은 지금도 여기에 있는 건가? 차원문이 열려 있는데? 지하 동굴이 유명하다. 지하 동굴···?”

쭈뼛거리면서 미샤가 이준기와 시선을 마주치려 했다.

이준기가 그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거··· 거기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하 동굴에, 차원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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