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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8: 불타는 배 (1)
Episode 38: 불타는 배 (1)
1월 19일 수요일 오전 10시 4분.
강남구 도곡동 한국 길드협회 사무실 대회의장.
회의를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았지만, 회의장은 열기가 넘쳐흘렀다.
서로 삿대질을 하면서 고성이 오가고 있어, 회의라기보다는 말싸움이라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
“이상덕 회장! 당장 협회장 선거를 실시하든지, 물러나시오!”
“협회장 선거 무기한 연기라니, 종신 독재라도 하겠다는 거요?”
“협회장 선거는 온라인으로 하면 되지! 차원문 때문에 선거 연기가 말이 됩니까?”
이상덕을 성토하는 말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한상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동안 세를 키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
그러나 이상덕 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광화문 차원문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국가 기능이 마비될 겁니다. 지금 협회장 선거가 중요합니까?”
“무기한 연기가 아니고 광화문 차원문 정리 때까지만이에요! 뭘 좀 알고 반대를 하시든가!”
“오늘 회의 주제에 집중합시다. 툭 하면 협회장 선거 얘깁니까?”
“단합된 모습을 보여줘도 시원찮을 판국에, 협회장 규탄 성명이라니, 부끄러운 줄 좀 아세요! 언론에서 욕하는 거, 안 들려요?”
한상태는 맞은 편에 앉은 이상덕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상태는 원래 이상덕에 대해 특별히 반감을 품지는 않았다.
인천 공항 차원문에서 굴욕을 당할 때까지는 말이다.
아무리 잘나도, 혼자로는 도저히 패거리를 당해낼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날 이후, 한상태는 자신의 세력을 모아왔다.
작은 길드의 마스터로 만족하는 생활을 때려치우고, ‘프라이드’라는 길드를 새로 창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범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사회자 신학길이 발언권을 넘기자, 김범규는 자기 자리의 마이크를 켜고 말했다.
“오늘 회의, 광화문 차원문 처리 문제를 위한 회의 맞습니다. 당장 공격대를 구성해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덕 지지자들쪽에서 옹호하는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김범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상덕은 원탁의 오른쪽 끝에 앉은 김범규를 쳐다보았다.
이상덕과 한상태로부터 등거리에 위치한 자리에 일부러 앉은 듯한 김범규.
최현, 나현우, 신다은 등 ‘브릴리언트’ 길드 측근들이 옆에 시위하듯 앉아 있다.
길드 내 랭킹 2위인 힐러 김나리만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김범규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협회장 선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오늘 회의에서 공격대가 구성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죠. 순서대로 합시다.”
김범규가 마이크를 껐다.
이상덕은 맞은 편의 한상태를 바라보았다.
한상태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합이라 이건가? 한상태와 김범규가? 그런다고 내가 뭐 밀릴 줄 아나?’
이상덕이 손을 번쩍 들었다.
사회자를 맡은 신학길 사무총장이 말했다.
“이상덕 협회장님! 협회장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이상덕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마이크를 켰다.
“이상덕 협회장입니다. 많은 분들이 협회장 선거 일정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계신 것 같군요.”
여기저기에서 불만에 찬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협회장 선거는 1월에 합니다. 1월 31일, 월요일. 바로 이곳에서 하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상덕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광화문 차원문을 정리합니다. 차원문 공략 일시는 1월 26일. 그러니까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금요일까지 2박 3일로 일정을 잡겠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주 수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차원문 정리하시고, 주말에 쉬시고, 이어지는 월요일에는 이곳에 다시 모여서 그토록 고대하시는 협회장 선거를 하시면 됩니다.”
이상덕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마이크를 껐다.
사람들이 동요하는 게 눈에 보였다.
좌우를 한 번 둘러보고, 한상태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한상태 회장님 말씀하시죠.”
“광화문 차원문은 아직 정찰대도 들어간 적이 없는데, 다음 주에 그냥 닥치고 들어가자는 겁니까?”
“정찰대 같은 것, 필요 없습니다. 신학길 총장, 자료 화면 부탁해요.”
신학길이 기기를 조작해서 스크린에 자료 화면을 띄웠다.
- 차원문 고유번호 13513. 랭크 A. ‘사대천왕’.
- 차원문 소멸 조건: 사대천왕 중 1명에게 승리.
- 차원문 소멸 보상: 에픽 아이템 2개 이상.
- 퇴각 페널티: 2레벨 강등.
잠깐 동안 화면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뭐야! 저건 그냥 차원문 정보잖아!”
“아니, 누가 광화문 차원문이 뭔지 모른다고 했소?”
“A등급 차원문이라고! 사대천왕이 뭔지, A등급 차원문이면 레벨이 얼마나 돼야 하는지,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나?”
이상덕이 마이크를 켜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아!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본론은 그게 아닙니다. 광화문 차원문, 살벌한 느낌이죠. 안 그렇습니까? A급인데요. 무섭죠.”
이상덕에게 우호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대천왕에 대한 정보가 있냐고 소리치신 분이 계신데요. 대답을 드리죠. 네,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왔다.
믿겠다는 사람들도, 안 믿겠다는 사람들도 비슷한 소리를 냈다.
“저를 보고, 친일파라고, 일본 협회랑 너무 친하게 지낸다고 뭐라고 하시던 분들 많죠. 아니, 탁 까놓고 말해서, 일본과 친하게 지내면 안 됩니까? 도움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게 이웃 아닙니까? 사대천왕. 정보 있습니다! 바로, 일본에 사대천왕 던전이 나타났기 때문이죠! 일본 협회, 전일협에서 정보를 잔뜩 받아왔습니다. 회의 끝나는 대로 공유하겠습니다.”
김범규가 물었다.
“그걸 회의 끝나고 공개해야 합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일에는 순서가 중요한 법입니다. 지금 당장 차원문 정보부터 공개하시죠!”
이상덕이 일어났다.
“뭐, 일어나실 것까지···”
“아니, 일어나야죠.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바로 1주일 뒤에, 어떻게 광화문 차원문을 공략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깁니다.”
이상덕이 신호를 하자, 신학길이 스크린의 자료 화면을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잠깐 동안, 사람들이 자료 화면에 집중하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바로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이상덕 지지자들조차, 이 자료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아니, 저건?”
“오오!”
“저, 저거! 정말입니까?”
한상태가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게 짚으며 일어났다.
“이봐요, 이상덕 회장!”
*****
한상태와 김범규는 회동 중이었다.
강남구 도곡동.
브릴리언트 사무실 빌딩 최상층의 회의실.
브릴리언트 길드는 사무실 빌딩 전체를 소유하고 있으니,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어떻게 할 겁니까, 한 회장님?”
“이상덕 그놈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 이건 외통수잖아. 도대체 받지 않을 수가 없네. 개 같은 녀석 같으니라고.”
“그럼, 이상덕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겁니까?”
“방법이 없잖아. 들어오든지, 아니면 아예 빠지라는 거니까.”
“멈추게 할 방법이 없을까요? 정부에 중재 부탁을 해보면 어때요?”
“정부? 정부가 협회 일에 간섭하는 것, 본 적 있어?”
“아뇨. 그런 적이 없기는 하죠. 하지만, 이번 건은 임팩트가···”
“방법 없어. 그냥 들어가는 수밖에.”
“제기랄···”
“김범규 회장은 몇이나 모을 수 있어? 열 명 꽉 채워야 돼.”
“우리 두 길드가 합쳐서 10명은 힘들 것 같은데요.”
“10명 대 10명으로 가야 돼! 숫자에서 밀리면 지난번 인천 공항 때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거야, 모르겠어?”
“그건 잘 알죠.”
“김 회장은 아이템 하나 먹었다, 그래서 괜찮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인천 공항 차원문 안에서 이상덕은 박충기와 전용택을 죽였다.
그의 장기 집권을 맹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보다 못한 한상태가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수의 횡포에 당하고만 있어야 했다.
이상덕의 협박에 물러서는 굴욕을 겪은 한상태와는 달리, 김범규는 ‘가시나무’라는 에픽 등급 흉갑을 얻는 횡재를 누렸다.
전설급 아이템, ‘사자의 서’를 차지하기 위해 이상덕이 농간을 부린 것이다.
정적을 제거하고 아이템까지 모두 꿀꺽하면 뒷감당이 되지 않을 테니, 중도파라고 할 수 있는 김범규를 끌어들여 아이템 배분에 참여시킨 것.
순간 아이템에 눈이 멀어 실수를 한 것인데, 그때 일을 지적하는 한상태가 김범규는 불편했다.
“여··· 열 명! 만들면 되잖습니까. 우리 길드에서 6명 책임지겠습니다!”
“좋아, 김 회장. 내가 4명 모아올 테니까. 그렇게 하면 우리도 10명이니 이상덕에게 밀리지 않겠지.”
“6명 가능합니다! 저랑, 김나리 힐러, 최현, 나현우··· 거기에다가 신다은, 김새로미까지 하면. 30레벨 대로 6명 가능해요!”
“좋아, 좋아. 든든하구만.”
“회장님 쪽은요? 회장님과 한소미, 장대한, 그리고 또 누가 있죠?”
“기파랑 길드 박건우 데려올게.”
“박건우요? 기파랑 길드라면, 길수연 힐러 있는 곳이잖아요? 길수연은 예전에 이상덕 길드 소속이었는데.”
“길수연, 이상덕이랑 사이 안 좋은 거 몰라? 그래서 찢어진 거잖아.”
“박건우는요? 그 사람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할 만합니까?”
“박건우, 원래 문경새재 소속이었으니까, 우리 편에 가담해 줄 거야.”
“그럼 됐군요. 일본 놈들이 우리 땅 밟게 할 수는 없죠.”
“당연하지. 이게 무슨··· 왜놈들하고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치던 조선 말기도 아니고···”
*****
이상덕은 신학길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준기 그 녀석을 너무 빨리 제거했나? 이렇게 위험한 차원문이 생길 줄은 몰랐어. 인천 공항 차원문 정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
“하지만, 회장님··· 오히려 잘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회장님이 그렇게 딱 말씀하시니까 저쪽은 거의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더군요.”
“하하하! 하긴 그랬지. 한상태 그 녀석 표정 볼만 하더군.”
“그러게 말입니다.”
“박충기 그 녀석을 제거해서 모든 우환이 없어졌나 했더니 한상태 이놈이···”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김범규 그 자식은 또 뭐야?”
“저도 뭐가 뭔지···”
“한상태와 김범규라··· 놈들의 동맹이 오래갈 리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단, 지금 당장 지들이 뭘 어쩌겠어?”
“그러믄입쇼.”
“다음 주 수요일까지 딱 7일 남았어. 그 사이에 탑랭커 10명을 어디에서 데려오겠어? 한상태, 김범규, 최현 이 정도는 모아올 수 있겠지. 하지만 거기서 끝이야. 내가 분명히 말했으니까. 그리고 다들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고.”
“그럼요. 광화문 차원문 정리는 국가적 과제니까요.”
“모자라는 인원은 전부, 일본에서 지원해주는 병력으로 꾸린다. 더 이상 명료한 방법이 어디 있나? 하하하!”
“정말 협회장님 지략은 최고십니다.”
“그리고 선거 방식 변경, 그건 어떻게 생각해?”
“지금 벌써 설문조사 들어갔습니다. 방송국 포함해서 제3자가 진행하는 설문조사니까 공정성 시비 걸 사람도 없고요. 무엇보다 선거 방식이 더 공정해지는 게 누가 봐도 명백하니까, 반대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렇지?”
“그럼요, 협회장님. 협회 총회 투표 결과 50%, 설문조사 50%. 얼마나 공정합니까?”
“차원문 정리 바로 다음 주에 하는 설문조사인데, 공격대장인 내 표가 적게 나올 수가 없지. 안 그래?”
“물론입니다.”
“그 부분이 사실 제일 중요한데 말야. 신학길이, 이리 좀 와봐.”
“네?”
“큰 소리로 할 말이 아니어서 그래. 하지만 신 총장은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니까.”
“네··· 회장님, 아니··· 협회장님.”
신학길이 다가오자, 이상덕은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신학길이 놀라면서 이상덕에게서 떨어졌다.
“네? 그게 정말입니까, 협회장님?”
“당연하지. 난, 공익을 제일 중요시하는 사람이야.”
“정말 철저하시군요, 협회장님. 그런 건··· 생각도 못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