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13화 (11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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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6: 모스크바의 이방인 (4)

Episode 36: 모스크바의 이방인 (4)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오크 사냥꾼이 무기를 손에서 놓으면서 뒤로 쓰러졌다.

오크의 머리를 타격한 양손 둔기, ‘퍼시벌의 평온’이 공기를 가르고 반원의 나머지를 그렸다.

무기를 바닥으로 내려놓으면서, 세르게이가 우렁차게 외쳤다.

“이걸로 끝! 100마리째!”

던전 클리어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이준기에게는 한글로, 바실리사와 세르게이에게는 키릴 문자로.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1시간 내에 차원문이 소멸합니다.

-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 최소 레어급 아이템 1개가 보장됩니다.

닥치는 대로 오크를 사냥하다 보니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던전을 클리어했다.

가장 레벨이 낮은 세르게이라도 오크 두세 마리 정도는 충분히 솔로잉이 가능한 수준.

모스크바 마피아 10인을 상대로 했던 것보다 더 일방적인 학살.

머릿수가 많아서 시간이 더 걸렸을 뿐이다.

보상 상자에서는 레어 등급의 바지는 세르게이의 몫이 되었다.

이준기도 바실리사도 더 나은 바지를 가지고 있어서 양보한 것이다.

“던전 클리어 기자회견, 8시라고 했죠?”

“네. 보리스가 그렇게 얘기했어요.”

“빨리 나가면 적어도 기자들은 피하겠군요.”

“하지만, 목격자가 아주 없지는 않을 거예요.”

“사람들이 많은 관광지라서?”

“아니, 그것보다는··· 아까 들어올 때 시선을 끌기 위해서 총격 사건을 만들었잖아요?”

“그랬죠.”

“그거 때문에 아마 경찰이 한둘이라도 있을 것 같아요. 러시아가 엉망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한다고요.”

“그러니까··· 차원문 통제 차원에서?”

“아뇨. 민원 대응 차원에서요. 총격 사건이 난 곳이니 잠깐이라도 순찰이 강화되는 거죠.”

“그렇다면, 나갈 때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겠군요.”

“그냥 냅다 뛰면 되지 않을까요? 아마, 쫓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경찰도 구원자가 위험하다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까요.”

과연 그랬다.

치안 유지 같은 거창한 어젠다보다는 제 한 몸 지키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러시아 경찰이다.

차원문에서 불쑥 나타났다면 구원자가 틀림없는데, 구원자를 상대로 추격전을 벌일 경찰은 러시아에 없었다.

차원문을 나서자, 세 명의 경찰이 차원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한 명은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둘은 서서 이야기 중이었다.

경찰이 지키고 있으니, 차원문 근처에 얼쩡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차원문 옆에 스르르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담배를 피우며 차원문을 바라보던 경찰이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경찰 두 명도 곧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다.

“뭐, 뭐냐!”

“다, 당신들 뭐야?”

하지만 그뿐이었다.

산개해서 세 방향으로 뛰는 그들을, 경찰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경찰 한 명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으려는 것을, 옆의 경찰이 말렸다.

말리면서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차원문에서 나왔잖아! 구원자라고! 총 쐈다가, 쟤들이 우릴 쫓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러시아에도 언론은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 숙소에 모인 그들은 다 같이 뉴스를 청취했다.

세르게이가 잔뜩 사 온 간식거리를 먹으며 그들은 휴대폰 동영상을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반 클리츠비치를 포함해서 구원자 열 명 정도가 던전 안에서 살해됐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초유의 사태입니다. 모스크바 자경단 대표 드미트리 밀라나비치 씨는, 이번 사건을 중대 사태로 규정하고, 범인들을 찾아내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고 조금 전 공식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바실리사가 해설을 곁들였다.

“자경단이라는 것은, 도시별로 있는 구원자 단체예요. 허울뿐인 단체이고, 사실은 각 지역 마피아가 뒤에서 조종하는 단체죠. 차원문 정리할 때 보통 자경단 명의로 하거든요. 모스크바 자경단 대표라는 드미트리 밀라나비치도 그냥 마피아 조무래기에 불과하고요. 구원자도 아니고, 마피아 서열도 아주 낮은, 그냥 바지사장 같은 거죠.”

뉴스가 이어졌다.

“경찰은 오후 3시경 차원문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추적 중입니다. 남자 두 명, 여자 한 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차원문을 경비하던 경찰을 제압하고 도망쳤습니다. 경찰 중 한 명은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중상이라는 게, 혹시 엉덩방아 찧은 거?’

“차원문이 있던 장소는 관광지로 유명한 아르바트 거리입니다. 그래서 목격자가 많이 있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세 명이었고, 젊은이들이었어요. 모두 다른 방향으로 뛰어서 달아나더라고요.”

“여자가 굉장한 미인이었습니다. 짧은 금발 머리였는데, 정말 잘 뛰더라고요.”

“한 명은 아시아계였습니다. 키는 셋 중에서 제일 컸고요.”

세르게이가 옆에 앉은 이준기의 머리끝을 쳐다보았다.

“오늘 사망한 구원자들은 모두 모스크바 자경단 소속이었습니다. 공격대장은 이반 클리츠비치, 아르바트 거리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라고 합니다. 그를 알던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죽었다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직접 이들의 말을 들어보시죠.”

“아까운 사람이 죽었네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들었습니다. 동네 청소 같은 봉사활동도 많이 했었고.”

“그런 좋은 사람을 죽이다니. 흉악범 녀석들을 반드시 잡아서 감옥에 보내야 해요.”

세르게이가 한 마디 했다.

“와아, 저거 연기 부자연스러운 거 봐라. 그··· 그런 조··· 좋은 사람을 주··· 죽이다니···”

뉴스는 계속되었다.

“경찰 역시 이번 사건을 공권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범인들을 체포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타샤 카플론스카야 모스크바 경찰청장의 말을 직접 듣겠습니다.”

“이번 사건은 공권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모스크바 자경단과 긴밀히 협조, 빠른 시일 내에 범인들을 잡아 법정에 세우겠습니다.”

바실리사가 말했다.

“예상대로 수배자가 되었네요. 이제, 러시아를 뜨는 건가요?”

이준기는 한참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러시아 아이스크림, 정말 맛있네요.”

아이스크림콘의 마지막 고깔 부분을 입에 털어 넣고, 이준기가 말을 덧붙였다.

“모스크바에서 할 일이 하나 더 있어요.”

*****

“아니, 정말 이거예요? 할 일이라는 게?”

“그럼요. 제가 <메트로 2033> 광팬이거든요.”

일행은 러시아 지하철을 타고, 순례를 시작했다.

“여기가 베데엔하(VDNKh) 역이군요. 주인공이 처음에 살던 곳이죠. 돼지 농장이랑 버섯 재배가 유명하죠. 지하철역 위쪽에 대형 전시회 시설이 있다고···”

“베데엔하가 그 전시회장 이름이에요. ‘국민경제 성과 박람회장’이던가?”

“아, 그렇군요. 잠깐 내려서 구경을 좀 해도 되겠죠?”

“물론이죠. 지하철 관광이라니 좀 생소하긴 하지만, 제가 일일 관광 가이드를 할게요.”

세르게이가 말했다.

“대장, 아무래도 나는 여기에서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아. 우리, 뉴스에도 나왔는데 세 명이서 몰려다니면 아무래도 눈에 띌 테고···”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럼 저녁때 숙소에서 봐.”

“그래. 혹시 모르니까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는지도 알아볼게.”

“그래. 수고해.”

세르게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승강장 근처를 돌아보던 이준기가 말했다.

“바로 여기에서, 아르티옴의 모험이 시작된 거죠···”

“밖으로는 안 나가 봐요? 매표소 있는 역사 쪽요.”

“아르티옴과 사람들이 살던 곳은 여기 지하니까요. 승강장과 철도가 있는 이곳.”

“하긴, 지하로 깊숙이 내려와야겠죠. 핵전쟁이 났다는 배경이라면.”

“정말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인데, 이렇게 배경이 되는 곳에 오니 감개무량하네요.”

그들은 차를 타고 다음 역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바실리사를 흘끗흘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바실리사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냥 미인이라서 보는 거겠지. 바실리사도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준기는 가는 곳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키타이 고로드! 아르티옴이 엄청 비싼 음식을 먹었던 그곳! 바빌론이라고 할 정도로 마도로 묘사되던 곳인데, 그냥 역이네요. 하하.”

“오, 여기가 트베르스카야! 네오나치들한테 죽을 뻔했죠.”

“파벨레츠카야! 한자동맹이 있던 곳이죠. 한자동맹이니까 당연히 상업 세력이고요. 으··· 여기서도 아르티옴 정말 고생했죠.”

레닌 기념 도서관 역에 도착했다.

“오오, 이곳이야말로! 인류문명 최후의 보루, 폴리스!”

“폴리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폴리스(Polis)요. 이 근처 네 개 역이 모여서 한 덩어리가 되는데, 그걸 폴리스라고 부르죠. <메트로 2033> 세계관에서는 가장 큰 세력이자, 가장 강력한 세력이죠. 도서관이 그 핵심이고.”

“아, 도서관!”

“도서관으로 책을 가지러 나가는 용사들이 있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지식을 가지러 가는 모험가들!”

“이준기 씨가 그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이준기는 예전에 모스크바에 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전쟁의 한가운데, 모스크바와 그 일대를 조슈아 테일러에게 바치려고 했던 마피아.

정보를 미리 포착하고 환영식을 급습했던 이준기와 일행.

조슈아는 없었다.

정보가 미리 새어 나갔다고 볼 수는 없었다.

기습 정보가 새어 나갔다면 오히려 그걸 반기며 덤벼들었을 조슈아다.

조슈아 테일러가 그런 환영식을 싫어하는 성격일 뿐.

이준기의 공격대는 러시아 마피아와 총격전을 벌였다.

무수한 마피아들이 죽었다.

구원자 마피아도, 일반인 마피아도, 이준기와 동료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전쟁만을 벌이고 황급히 떠나야 했다.

<메트로 2033>의 성지, 모스크바 지하철을 둘러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반나절에 불과하기는 해도, 관광객 코스프레를 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다니, 상전벽해다.

“자, 이제··· 관광은 충분히 한 것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바실리사.”

“뭘요. 이준기 씨 이야기를 들으며 보니까, 모스크바 지하철역들도 볼 만하네요.”

“모스크바 마피아는 지하철역에도 자주 와보겠죠?”

“당연하죠. 이렇게 좋은 장사 터가 어디 또 있겠어요.”

“여기, 레닌 기념 도서관 역이라면, 눈에 좀 띄나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낙서를 좀 하려고요.”

그렇게 말하고, 이준기는 주머니에서 라카를 꺼냈다.

“바실리사, 오늘 저녁에 숙소에서 만나요. 저는 낙서를 좀 하고 따로 가겠습니다.”

“사람들 눈이 많은데 괜찮겠어요?”

이준기는 머리에 쓰고 있던 비니를 조금 더 내리 당겨서 썼다.

눈썹이 가릴 때까지.

그리고 눈을 치켜떠 보였다.

“어때요? 충분히 불량해 보이죠?”

“네에?”

“누가 깡패한테 이래라저래라하겠어요. 짧은 글입니다. 메시지 하나만 남기고 자리를 뜰게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바실리사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을 하고 이준기로부터 멀어졌다.

바실리사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이준기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필 섬식 승강장이네. 벽에 낙서하기는 어렵겠는데··· 그래도 벽에 해야 하나?’

이준기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준기와 눈이 마주친 몇 명이 시선을 돌렸다.

이준기는 큰 소리로 가래 끓는 소리를 낸 다음,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철로 아래쪽으로 점프했다.

“저, 저거!”

“사람이!”

이준기는 라카 스프레이로 벽에 크게 글씨를 썼다.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나서서 말리거나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짧은 메모를 남기고, 이준기는 철로에서 승강장 위로 크게 점프를 했다.

“오오오!”

“손도 안 대고 뛰어 올라오네?”

“구, 구원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이준기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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