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11화 (11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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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6: 모스크바의 이방인 (2)

Episode 36: 모스크바의 이방인 (2)

“보리스에게도, 이리나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이준기 씨에 관한 얘기도, 세르게이에 관한 얘기도.”

“점조직을 유지하는 거군요?”

“접촉점이 많아지면, 조직 전체가 위험해지니까요. 얘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세요?”

“아뇨. 바실리사의 방식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단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점조직을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보리스나 이리나에게 얘기하면, 그들로서도 부담을 느낄 거예요. 그건 이준기 씨나 세르게이도 마찬가지죠. 접점은 저 하나뿐인데, 상대방을 신뢰해도 좋은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본격적으로 전투에 돌입하게 되면, 그때 만나게 되겠군요.”

“아마 복면이라도 쓰고 나올 거예요. 정체를 들킬까 조마조마해 하는 게 레지스탕스의 습성이니까요. 저도 남장을 하고 다녔잖아요?”

세르게이가 끼어들었다.

“글쎄. 나는 바실리사가 남장을 한 걸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게 설득력이 있을까?”

“무슨 소리야?”

바실리사의 물음에 이준기가 대답했다.

“바실리사는 외모가 너무 튀어요. 원래 스파이라든가, 정체를 숨기려는 사람은 외모가 평범한 게 유리하죠. 아무튼 영화에 미남미녀 스파이가 나오다 보니까 사람들이 당연한 걸 잊어버린다니까요.”

“아···”

바실리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외모가 튄다고 해서 마피아와 맞서 싸우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바실리사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블라디보스토크의 일은 정리되었으니까. 이제 기차나 비행기를 탈 일도 없을 거고, 변장은 이제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바실리사가 그렇게 말했지만, 세르게이가 다시 딴지를 걸었다.

“그래도 문제가 될 것 같은데. 바실리사도 알 거 아냐? ‘아름다운 바실리사’. 전래 동화 말야.”

“이름이 바실리사인 걸 어쩌라는 거야?”

“이름을 제대로 맞게 지어도 문제가 되는군.”

이준기는 바실리사에게 ‘이르헬의 눈’을 사용했던 일을 떠올렸다.

바실리사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 중에는 ‘아름다운 바실리사의 해골 랜턴’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바실리사’가 무엇인지, 구글 검색을 했다.

그래서 대략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아름다운 바실리사?”

세르게이가 대답했다.

“응. 그런 전래동화가 있지. 신데렐라랑 비슷한 이야기인데. 러시아에서는 바실리사거든, 주인공 이름이.”

“그래? 정말 이름 제대로 지었군.”

바실리사가 가볍게 항의했다.

“놀리지 말아요, 이준기 씨.”

“놀리는 거 아녜요, 바실리사. 그래서, 세르게이,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데?”

“신데렐라 이야기지 뭐. 계모와 언니가 괴롭혀. 그런데 바실리사는 다 이겨내지. 친엄마가 죽으면서 물려준 인형이 다 해결해 주거든.”

“그거 아주 좋은 인형이군.”

“그래. 순 사기지. 그런데도 계모는 굴하지 않고 최후의 퀘스트를 주지. 숲속의 마녀한테서 불씨를 받아오라는.”

“흠.”

“마녀는 바실리사에게 말하지. 불씨를 얻으려면 심부름을 해야 한다고. 또 퀘스트지. 근데 그 퀘스트를 또 엄마의 유품 인형이 해결해 주지. 이거 완전히 사기지? 어떻게 생각해, 알료샤?”

“동화가 그렇지, 뭐.”

“암튼 퀘스트를 완료하고 마녀한테 갔지. 그랬더니 마녀가 퀘스트 보상이라고 해골 랜턴을 주는 거야. 그걸 받아 가지고 왔더니, 해골 랜턴이 계모랑 언니를 한 방에 죽여버렸다는 이야기.”

“그게 끝이야? 신데렐라라며?”

“그러고 나서 왕자인지 뭔지랑 결혼하는 거야. 유리구두 사건 같은 건 없고, 계모가 죽은 다음에 바실리사는 옷감을 짜서 팔았는데, 그 옷감이 너무 좋아서 왕자가 바실리사를 찾아와 청혼한다는 거지. 웃기지?”

“동화니까.”

구글 검색으로 알게 된 내용과 같은 얘기였다.

악인을 태워죽이는, 해골 랜턴.

*****

1월 15일 토요일, 아침 10시.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차원문 공격대 기자회견이다.

이준기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지만, 장소를 생각하면 생소하기 그지없다.

“뭡니까, 이거?”

“모스크바 마피아 서열 5위, 이반 클리츠비치네요. 모스크바 시민들을 위해서 여기 차원문을 정리한다는 거죠. 갑자기 웬 기자회견이람.”

“기자회견이라··· 마피아가요.”

“이반 클리츠비치가 마피아라는 건 누구나 알겠지만, 다들 모른 척하는 이 분위기는 정말 우습네요. 러시아에는 길드도 협회도 없으니까요. 지금 이 공격대도 모스크바 자경단에서 기획한 거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자회견도 그렇지만 차원문을 정리한다는 것도 놀랍군요.”

“차원문은 계속해서 생기니까, 정리는 해야죠. 게다가 레벨업도 해야 하고. 여기 차원문 정리를 구실로 상인들에게 또 얼마나 뜯어냈을지, 그게 궁금하네요. 여긴 상점가니까요.”

아침 10시에 시작된 기자회견은 30분이나 끌었다.

기자회견 후, 구원자들은 한 사람씩 거창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차원문에 진입했다.

구원자들이 전부 사라진 후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차원문 근처에서 머물렀다.

주로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차원문을 만져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대개의 차원문은 삼엄한 경비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는 게 불가능하다.

차원문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을 수 있다니, 러시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오오, 이게 차원문이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위험하지 않은 것, 맞지?”

“조금 전에 구원자들이 들어갔잖아. 구원자가 진입한 차원문에서는 절대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다고.”

“차원문을 군대가 둘러싸지 않는다니, 러시아도 참.”

세르게이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이러다가는 못 들어가겠는걸. 사람들이 떠나지를 않네.”

바실리사가 말했다.

“그냥 조용히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이준기가 말했다.

“나도 조용한 쪽이 좋은데.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차원문 근처의 커피숍에서, 그들은 30분이나 더 기다렸다.

11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각.

바실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왔어요.”

그들은 카페에서 나와 차원문 쪽으로 이동했다.

관광객 차림새를 한 그들은 다른 구경꾼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바바리코트를 입고 중절모까지 쓴 거구의 사내가 차원문 근처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차원문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저 사람, 뭐지? 엄청 우락부락하게 생겼네.”

“코트 안에 기관총이라도 들고 있을 인상이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듣기라도 했다는 듯이, 사내는 멈춰 섰다.

사내가 어깨를 들썩이자, 그의 어깨에서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탕!

“뭐, 뭐지? 총소리?”

“뭐죠?”

“혹시 저 사람이···”

사람들은 보았다.

거구의 사내가 하늘을 향해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그가 기관총의 총구를 내려 사람들을 향해 들었다.

혼비백산해서 흩어지면서,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

“보리스예요?”

“아뇨. 이리나한테 부탁해서 돈 주고 고용한 사람이에요.”

“그렇군요. 보리스인 줄 알았어요. 덩치가 엄청 크던데.”

“그렇게 사람들 눈에 띄는 일을 직접 하다뇨. 우리 조직 사람들이 얼마나 몸조심을 하는데요.”

“하긴, 당연한 건데 저도 참.”

그들은 차원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총격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내달리는 사이에, 차원문 안쪽으로 진입한 것이다.

놀라서 도망치는 것처럼 하다가 차원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사람은 없을 것이다.

11시 44분.

모스크바 마피아 구원자들이 차원문 안으로 들어온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이준기가 바실리사에게 물었다.

“이반 클리츠비치. 몇 레벨이죠?”

“42레벨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높죠.”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저레벨이라는 거죠?”

“네. 오늘 공격대의 주목적은 저레벨 조직원들의 레벨업이니까요.”

“저레벨이라면 얼마나?”

“오늘 멤버들은 20레벨 초중반 정도입니다.”

“아··· 그게 저레벨이군요?”

“직접 보시면 왜 저레벨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약한 사람들 상대로 깡패짓이나 할 줄 알지, 버스만 타고 다녀서 개념이 없어요.”

“그렇군요. 생각보다 쉽겠는데요.”

이준기는 상태창을 통해 차원문 정보를 확인했다.

- 차원문 고유번호 10551. 랭크 C. ‘북쪽 황무지’.

- 차원문 소멸 조건: 오크 침략자 100마리 처치.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아이템 1개 이상.

- 퇴각 페널티: 1레벨 강등. 20% 확률로 장착템 1개 랜덤 소멸.

무작정 오크를 잡으면 되는, 가장 직관적인 소멸 조건을 가진 차원문이다.

42레벨이나 되는 이반에게는 힘 하나 안 들이고 혼자서 쓸어버릴 수도 있는 던전.

“이반은 어떤 성격이죠? 자신이 직접 사냥을 할까요, 아니면 부하들에게 명령만 내릴까요?”

“글쎄요. 어느 쪽일지 잘 모르겠네요. 마피아 간부야 다 거만하니까.”

바실리사가 모호한 대답을 하자, 세르게이가 나섰다.

“이반 클리츠비치라면, 아마 직접 사냥에 나설 겁니다. 과시하고 싶어할 걸요.”

이준기가 물었다.

“만나본 적이라도 있어?”

“응, 대장. 한 번뿐이지만. 예전에 그 녀석이 ‘버스’를 태워준 적이 있었지.”

“그때 직접 사냥을 했다는 거군?”

“그래. 다른 사람들은 거의 손도 대지 못하게 했지. 화려한 기술을 써가면서 사냥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면서 박수를 치는 걸 즐겼지.”

바실리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확실하군요. 그 사이에 성격이 바뀌지만 않았다면.”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성격이 뭐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요?”

“우리한테는 좋은 소식이군요. 사냥하는 걸 기다렸다가 기습하면 될 테니까요.”

이준기가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반은 제가 혼자 상대하겠습니다. 두 분은 다른 녀석들을 맡아주세요. 사실 그쪽이 더 힘들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한데.”

“이반을 제외하고는 전부 20레벨 초중반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피아 녀석들 소탕하고, 차원문도 정리해야죠.”

*****

마피아들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반 클리츠비치가 소란스러울 정도로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러시아어 실력이 많이 좋아졌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이준기는 바실리사에게 물었다.

“뭐라는 겁니까?”

“오크의 습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네요.”

“오크의 습성요?”

“잔인하고, 욕망에 충실하다고 얘기하는데요. 틀린 말은 아니죠. 그게 던전 공략에 필요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시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건 확인이 됐네요.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기 좋아한다면, 틀림없죠.”

세르게이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니까, 대장. 내 말을 안 믿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지. 다시 확인하는 거야. 3대10의 전투니까, 신중해야지.”

“그래, 그렇지. 3대10이라고 말로 표현하니까 조금 무섭게 느껴지네. 하지만, 대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2대6을 이겼으니까.”

이준기는 블라디보스토크 전투를 생각했다.

조금씩 꼬리를 끊어 가면서 싸운 전투이기는 했지만, 두 명으로 여섯 명을 이긴 전투다.

아무런 손실 없이.

세 명으로 열 명을 상대해야 하는 이번 전투는 숫자로 따지자면 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 상대하는 것은 버스 파티다.

바실리사의 말대로, 레벨이 무색하게 개념이 없는 구원자들.

이반 클리츠비치 한 명만 쓰러뜨리면 나머지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잠시 생각에 빠진 이준기를 향해 세르게이가 물었다.

“자신 있는 거지? 바실리사와 나는 대장, 아니 알료샤를 믿고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라고.”

“자신 있어.”

바실리사가 한 마디 했다.

“누가 듣고 있었다면, 이준기 씨야말로 과시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했겠는걸요. 하하. 농담입니다.”

“뼈 있는 농담인데요.”

“정말, 농담이에요. 제가 이준기 씨 팬이라는 거, 벌써 잊으신 거예요?”

팬이라는 말에, 세르게이가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갑니다!”

둘에게 가볍게 툭 던지듯 말하고, 이준기가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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