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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10)
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10)
“세르게이 로스코비츠? 물론 알고 있죠. 극동 마피아 넘버 12예요.”
“역시 알고 있군요. 죽일 놈인가요?”
“당연하죠. 확인된 것만 살인 8건과 살인 교사 11건에 대해 혐의가 있어요. 다른 범죄들의 목록을 읊는 것은 역시 시간 낭비고요.”
“만난다면, 곧바로 죽일 건가요?”
“가능하다면요.”
“예상했던 대로군요. 바실리사는.”
“네? 무슨 얘기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죠, 바실리사는. 저와는 조금 달라요.”
“아, 아니··· 무슨 얘기예요, 그게? 준기 씨는 저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글쎄요. 저는 비겁해요. 모순덩어리죠. 이랬다가 저랬다가··· 원칙도 없는 사람인걸요.”
“무슨 얘긴지··· 전 도저히 모르겠어요.”
이준기는 이마에 손가락 몇 개를 가져다 댔다.
던전 안이라고는 해도, 겨울바람을 한참 맞은 손은 차가웠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언제나 어려웠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러나 시간이 없다.
이마에 차가운 감촉을 느끼고 나니, 이준기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 마음이 생겼다.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밤에, 아쉬코프 저택을 쓸어야 해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 혼자 뿐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도울게요.”
“오늘,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은 몰랐어요. 블라디미르가, 당신이 곧 블라디보스토크에 나타날 것이라고 귀띔을 해줬지만,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죠.”
“그쪽도··· 제 움직임을 꿰고 있었군요.”
“오늘 던전 안에서 블라디미르를 처치하게 된 건, 예상 밖의 전개예요. 그러나 블라디미르가 이미 죽었으니, 그의 아지트는 오늘 중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보스가 차원문에서 나오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그렇겠죠.”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았으니, 차원문은 그대로 있을 것이고, 아직까지 부하들은 블라디미르와 일행이 던전 안에 있다고 생각하겠죠.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는 생각은 하겠지만, 당신을 찾느라 그렇다고 생각할 거예요.”
“네.”
“그러니까 오늘 밤에 쳐야 합니다. 던전도 아니고, 굳이 인원을 제한할 필요가 없어요. 한 명이라도 병력이 더 있으면 좋은 겁니다.”
“아··· 그러니까, 준기 씨 얘기는··· 그게 로스코비츠라는 거예요? 우리 병력이라는 사람이?”
“네.”
“후아···”
바실리사가 한숨을 쉬었다.
“그놈은··· 그놈은! 나쁜 놈이라고요!”
“저는, 더 큰 목표를 위해서라면 작은 원칙은 언제든지 굽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실리사가 부러운 거고요.”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로스코비츠 따위는 당장 처형해 버려요!”
“당장 더 큰 과제가 눈앞에 있잖아요.”
“로스코비츠라니! 그 녀석이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확신해요?”
“아직까지는 고분고분했어요.”
“그래도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죠. 저택으로 쳐들어가면 자기편이 수두룩할 텐데. 배신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저라고 모든 걸 알 수는 없지만, 지난 며칠 동안 관찰한 결과, 배반할 가능성이 대단히 낮다고 결론 내렸어요.”
“왜죠?”
“놈은 겁쟁이이기 때문이죠.”
*****
“총은 준비됐어.”
세르게이가 침대 밑에서 끄집어낸 나무 박스를 열었다.
다양한 종류의 총과 총탄이 빽빽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나 많다니. 이런 걸 들고 오느라 수고 많았다, 세르게이.”
“이 정도야 뭐.”
“사실 난 총에 대해서는 잘 몰라. 군대에서 만져본 게 전부니까.”
“설명을 해줄까?”
“우리가 상대할 적은 마피아 총잡이들이야. 전투 장소는 저택이다. 주로 복도에서 싸우게 될 것 같아. 석조 저택이라서 엄폐는 충분할 거야. 먼 거리에서 사격할 일은 저택으로 접근할 때 한 번 정도일 거다. 그때 쓸 저격총이 하나 정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저 연사력 좋은 반자동 기관총이면 될 것 같은데.”
“총을 쏴본 적이 있어?”
“군대에서만.”
“역시. 군대에서는 AK-47 같은 걸 쓰나, 아니면 MP40?”
“그렇게 말해서는 내가 알아듣지도 못해. 우리나라에서는 K-2라는 걸 썼는데, 국산이야.”
“한국산?”
“그래. 뭐든지 국산화하기 좋아하는 나라라서.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하니, 아마 다른 나라 총기류의 영향을 받았겠지. 많이 모방했을 텐데.”
“K-2라···”
“어떻게 생긴 건지 보여줄게.”
이준기는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서 K-2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돌격소총이군. AK-47과 많이 비슷한 것 같은데. 칼라시니코프라고 들어봤지?”
“응? 칼라··· 뭐라고?”
“칼라시니코프. 영화에 보면 테러리스트들이 맨날 들고 다니는 그거.”
“글쎄. 그렇게 말해봤자··· 내가 보기에 소총은 다 그게 그거 같아 보여서.”
“아주 유명한 총이지. K-2라고 했지? 어디 보자··· 내부 구조는 거의 칼라시니코프라고 봐도 되겠군.”
“아, 그래?”
“칼라시니코프는 우리나라 총이다. 보여줄게. 자··· 여기!”
세르게이가 상자 아래쪽에서 AK-74M을 꺼내 이준기에게 내밀었다.
받아든 총을 잠깐 살펴본 이준기가 말했다.
“그렇군. 왠지 익숙한 느낌인데.”
“그렇지? 다른 총들이 칼라시니코프를 벤치마크 하는 이유는 간단해. 좋은 총이기 때문이지.”
“가볍군. 생각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건네준 건 AK-47이 아니고 AK-74M이다. 개량형이라고 보면 돼. 거의 같은 거야.”
“이거라면 별도로 연습을 안 해도 쏠 수 있을 거 같은데. 지금 어디서 총 쏘는 연습을 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충분히 가능하지. 돌격소총이야 뭐 다 거기서 거기지. 아니, 총이라는 게 뭐 기본적으로···”
문에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목소리를 낮추고 세르게이가 물었다.
“대장이 누굴 부른 건 아니지? 내가 쫓아버리고 올게.”
“아니, 잠깐. 내가 부른 사람이 온 것 같아.”
“대, 대장! 미쳤어? 여기 위치는 비밀이라며!”
“이제는 아냐.”
“오늘 뭔가를 하고 온 거야?”
“그래.”
“뭘 했는데?”
“잠깐만 기다려. 셋이 함께 이야기하지.”
“대장이 그렇게 정했다면 어쩔 수 없지.”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이준기가 문을 열었다.
“어서 와요, 바실리사.”
*****
“이쪽은 세르게이 로스코비츠. 이쪽은 바실리사 엘리셰프.”
이준기의 소개를 듣고 세르게이가 이름을 되뇌었다.
“엘리셰프? 바실리 엘리셰프?”
바실리사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바실리사예요. 바실리사 엘리셰프.”
“서, 설마?”
“네. 바로 그 설마예요. 당신들은 바실리 엘리셰프로 알고 있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여자죠.”
“여··· 여자분일 줄은···”
“차별하는 건 아니죠?”
“아,아뇨! 그럴 리가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바실리사가 세르게이 뒤쪽에 서 있는 이준기에게 눈짓을 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어수룩한 놈이군. 직접 한 살인만 8건인 악당인데···’
바실리사는 손에 든 비닐봉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저녁이에요. 알료샤가 시키는 대로 사 왔어요. 세르게이 입맛은 자기가 잘 안다면서.”
“잘 먹겠습니다.”
의자는 바실리사에게 내주고, 이준기와 세르게이는 침대에 앉아 햄버거를 먹었다.
햄버거와 함께 사 온 커피도 마셨다.
석 잔 모두 샷을 추가해서 진하게 주문했다.
카페인이 필요한 밤이니까.
“바실리사, 총은 들어본 적이 있어요?”
“물론이죠. 제가 속해 있는 조직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아시잖아요?”
바실리사의 말에 세르게이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10일 전만 해도, 둘은 적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자신은 알료샤에게 항복해서 부하 노릇을 하고 있지만, 바실리사는 어떻게 된 일일까?
사할린 마피아를 처단한 이유는, 알료샤가 푸가초프 소속이었기 때문인가?
“흠··· 재미있네요. 일단 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알료샤는 푸가초프 소속이 아니에요. 적어도 아직까지는요. 아직 입회 원서를 내지도 않은걸요.”
“아···”
“그걸 궁금해하는지 어떻게 알았냐고요? 글쎄요. 그런 말 듣지 않았어요? 세르게이는 생각하는 게 그냥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그··· 그런가요?”
“솔직히 말하죠. 그건, 좋은 거예요.”
“그,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세르게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부끄러운지 바실리사의 눈을 피하던 세르게이는 이준기와 눈이 마주쳤다.
세르게이가 말했다.
“아, 대장! 아까 하던 얘기는···”
“대, 대장요?”
바실리사가 손뼉을 치면서 꺄르르 웃었다.
“대, 대장이라니?”
이준기가 세르게이에게 말했다.
“거 보라니까. 그렇게 부르면 누구라도 웃긴다고 생각한다니까.”
“아, 미안해···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아··· 알료샤.”
바실리사는 생각했다.
세르게이는 어쩌면, 근본부터 썩어빠진 악당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넌 사형이야. 여덟 명이나 죽여놓고 본심이 아니었으니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저격은 내가 하고 싶었지만, 바실리사가 더 잘할 것 같아서 양보했지.”
“그, 그래?”
세르게이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격 실력 때문에 바실리사에게 저격을 맡긴 것은 아니다.
저격으로 잡을 수 있는 건, 마당 쪽을 지키는 인원이 전부다.
기껏해야 서넛 정도.
게다가 상황에 따라서는 근거리에서 자동사격으로 잡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격은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저격 자체의 효과만 생각하면, 원거리 사격에 자신이 있는 이준기 본인이 저격을 맡는 편이 낫다.
그러나 돌격 팀은 마당을 제압한 직후에 저택으로 돌입해야 한다.
바실리사가 아직 100% 신뢰하지 않는 세르게이에게 저격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둘을 한 팀으로 돌격 팀을 꾸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저격은 바실리사에게 맡겨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세르게이와 함께, 이준기는 저택의 문에 접근했다.
돌기둥 뒤쪽에서 험악한 인상의 경비병이 나타났다.
코트 안에서 이준기를 향해 있는 기관단총의 총구 때문에, 코트 한쪽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누구냐?”
“나다.”
“스즈키 상? 무슨 일이냐?”
“예브게니를 만나야 한다. 보스의 지시야.”
“예브게니 영감을? 보스는 어디에 있냐?”
“아니, 넌 상황 파악도 안 하고 있냐? 보스는 구원자 부하 다섯 명과 함께 지금 던전에 들어가 계신다. 올레그도 아드리안도 거기 있단 말이다.”
“그, 그건 몰랐다.”
“급하다. 예브게니를 만나야 해. 문을 열어라.”
“그,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한다. 보스가 널 보냈다는 증거는 가지고 있나?”
“보스는 지금 던전 안에 있다고.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던전 안에는 필기구 같은 건 없단 말이다. 그것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설마 던전 안에서 휴대폰이 터진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냐?”
“뭐, 멍청이라고? 스즈키 상, 보스의 손님인 건 알지만 까불지 않는 편이 좋다고 조언하고 싶군.”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뭐, 뭐야?”
흥분한 동료를 말리려고, 맞은편 기둥 뒤에 서 있던 경비병이 앞으로 나섰다.
“이봐 드미트리, 흥분하지 말고.”
“내···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됐냐? 이 일본놈이···”
“그래도 보스의 손님이다. 불만은 보스에게 말하던가.”
“보스가 보냈다는 증거도 없는데, 저택 안으로 들이라고?”
“어차피 안에 보스가 계신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 무기 같은 걸 가지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들여보내지 뭐.”
이준기가 말했다.
“그래. 너는 좀 말이 통하는구나. 두 손을 다 머리 위로 올릴 테니, 소지품을 검사하도록 해라.”
“그래. 스즈키 상, 그렇게 하자고.”
이준기가 주춤거리다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이준기에 맞은 편에 서 있던 경비병이 쓰러졌다.
바닥에 피가 흘렀다.
“뭐, 뭐야?”
드미트리가 뒤로 물러서면서 품에서 기관총을 꺼냈다.
푸슉.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하고 그는 바닥으로 엎어졌다.
모자를 눌러 쓴 괴한, 세르게이가 든 기관총에서 연기가 일었다.
“전투 시작이다.”
이준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문의 자물쇠에 총탄을 먹였다.
저택 안쪽에서 울리는 사이렌이 두꺼운 석벽 바깥으로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