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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8)
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8)
“운이 따르는군요.”
“그러게요. 그냥 네 명을 동시에 상대해도 충분히 해볼 만한데. 한 명 더 줄여주네요.”
“남자들이 너무 배려심이 없어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오랫동안 참아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첨탑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건물 안으로 진입하기 전에 일을 보려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라고요.”
“저도 반성해야겠는걸요. 그런 생각은 평소에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사려 깊은 공격대장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 왜 그러세요? 전, 준기 씨는 다르다고 믿어요.”
“믿어주시는 건 고맙지만, 저도 그런 부분은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에요. 앞으로 잘할게요.”
볼일을 보러 적당한 장소를 찾는 라다를 보며 둘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오후가 되면서 한층 세진 바람 소리가 웬만한 소음은 다 덮어버렸다.
이준기는 블라디미르 일행에 관해서 바실리사가 이야기해 준 것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라다 스미르노프. 여군 출신. 체첸,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활약. 민간인을 상대로 한 가혹행위 혐의로 불명예제대. 여러 가지 별 볼 일 없는 직업을 전전하다가 구원자로 각성. 곧바로 마피아에 스카우트된 인물.’
바실리사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피고 라다 스미르노프에 대한 평결인가요?”
“아··· 네, 그래요. 바로 그 생각 중이었어요.”
“오늘 사형 집행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헷갈리시는 것 아녜요?”
“라다··· 여군 출신. 체첸과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 상대 가혹행위. 맞죠?”
“맞아요.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조금 전에 들은 거니까요.”
바실리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저들의 범죄를 실감하지 못하는 이준기가 주저할까 두려웠다.
“사형··· 찬성하시죠?”
“물론입니다.”
예상과 달리 이준기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바실리사는 긴장이 풀린 듯, 품고 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저질렀던 민간인 대상 범죄는 전부 증오 범죄였어요. 자기들조차 제대로 정의 내리지도 못하는 인종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겁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해서 떨리는 바실리사의 마음을, 이준기는 느낄 수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그는 그저 묵묵히 들었다.
“체첸과 우크라이나. 군 법정은 그녀의 범죄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불명예제대를 선고했죠. 러시아군의 명예를 더럽힌 죄만 인정한 거예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은 왜 이렇게 희극의 탈을 쓰고 있는 걸까요?”
“오늘, 바실리사와 저, 우리 둘이 제대로 된 재심을 하게 되는 거죠.”
“고마워요. 준기 씨는 이방인인데.”
“뭘요. 저 좋자고 하는 일입니다. 저도 그런 종류의 사람은 참을 수가 없어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는 라다를 보며 바실리사가 물었다.
“자리를 잡으면, 곧바로 공격할까요?”
“본대와 거리가 너무 가까워요. 제가 처리하죠.”
“아까 그 스킬, 또 쓰시게요?”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게다가, 나머지 세 명은 스킬이 별로 필요할 것 같지도 않은데요.”
“세 명인데요?”
“조용히 기습하기 위해서 스킬을 쓰는 거니까요.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싸운다면, 스킬 같은 거 쓰지도 않고 저들은 제압할 수 있어요.”
“자신감, 부러운데요.”
“보수적 계산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준기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40레벨의 이준기와 34레벨의 바실리사 조합이 저들 세 명을 상대로 고전할 가능성은 글쎄···
0% 정도?
“자리, 잡은 것 같네요.”
“그럼··· 정의를 집행하고 오겠습니다. 푸가초프의 이름으로.”
“네. 부탁드릴게요. 푸가초프의 이름으로.”
시야에서 이준기가 사라졌다.
바람이 가르는 것처럼, 마른 수풀 사이로 길이 생겼다.
잠시 후, 라다 스미르노프의 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이 멀리에서 보였다.
그녀의 몸이 통째로 바닥에 쓰러지려는 것을, 이준기가 붙잡고 있었다.
*****
“보스, 문을 열까요?”
막내 비켄티의 질문에, 보스 블라디미르 대신 올레그가 대답했다.
“예라, 이 자식아. 그럴 필요 없어.”
“네?”
“놈들은 바깥에 있다.”
“정말입니까?”
“바깥에 있는 정도가 아냐. 이 근방에 있다. 계속해서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
짬밥이라도 길게 먹은 올레그가 눈치는 있다고, 블라디미르는 생각했다.
비켄티가 놀라며 올레그에게 물었다.
“우릴··· 미··· 미행이라도 했다고 얘기하시는 겁니까?”
“그래. 거의 확실하다.”
“바실리와 스즈키··· 그 둘이 한 패라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루드밀라도, 라다도 죽었을 거야.”
“네에?”
“그리고, 아마, 아드리안도 마찬가지.”
아드리안의 이름을 얘기하는 올레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앓던 이가 빠진 것은 맞지만, 도대체 이 상황을 좋아해도 되는 것인지.
게다가 보스가 옆에서 듣고 있다.
“그, 그렇다면, 우리 세··· 셋뿐이라는 겁니까?”
“그래. 우리는 셋. 저쪽은 둘. 레벨이 어떨지 그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정말 다 죽었다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라다가 화장실에 간 지, 20분도 넘었다. 왜 안 온다고 생각하냐?”
“루드밀라는요?”
“아까 루드밀라를 치고 지나갔던 것, 그건 아마 사람이었을 거야. 바실리거나, 스즈키거나.”
“그런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런 스킬이 있는 거겠지.”
“그··· 그런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과 싸운다고요?”
“스킬이라는 건, 무한정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팀을 셋이나 상대했으니 저쪽도 스킬 책을 많이 소모했을 거야.”
“아··· 그··· 그렇죠. 스킬 책. 이제 다 떨어졌겠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블라디미르는 비켄티를 쳐다보았다.
‘여섯 명으로 들어와서 이제는 셋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덜떨어진 녀석들 둘뿐이라··· 아니, 아니지. 지금 내가 가진 전력은 이게 전부다. 리더십을 발휘해야지.’
블라디미르는 경멸조의 눈빛을 성급하게 거두었다.
그는 손짓해서 부하들을 모이게 했다.
올레그와 비켄티에게 양팔을 걸어 어깨동무를 하고, 그는 둘에게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쾌활한 목소리를 가장해서 말했다.
“올레그! 비켄티! 오늘 너희들이 큰 공을 세우게 되었구나!”
“네?”
“바실리 엘리셰프는 모스크바 마피아 현상수배 목록에서도 거의 꼭대기에 걸려 있는 거물이다. 그런 녀석을 너희 둘과 나, 우리 셋이 잡는 거다. 인생을 바꿀, 커다란 기회가 온 거야.”
“네, 보스. 며··· 명심하겠습니다.”
“비켄티. 저들은 너보다 레벨이 높을 거다. 하지만 겁먹지 마라! 실제 전투는 레벨 따위보다는 실력으로 결정되는 거야! 실력의 90%는 마음가짐이다. 기죽지 말고 싸우는 거다! 저쪽의 두목은 내가 가볍게 처리할 테니, 너는 올레그와 함께 조무래기를 처리해!”
“네, 넵! 알겠습니다, 보스!”
“올레그가 말했듯이 저쪽은 이미 우리 팀 멤버 셋을 상대했어. 스킬 책이 거의 다 소진되었을 거다. 스킬을 쓰지 못하는 구원자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야! 마음껏 두드려라!”
“네, 보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넌 할 수 있다, 비켄티! 내가 널 우리 조직에 거둔 것도 다 너의 잠재력을 보고 결정한 거야! 오늘,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라!”
“무, 물론입니다, 보스! 마··· 맡겨만 주십쇼!”
여전히 둘과의 어깨동무를 유지한 채로, 블라디미르는 이제 올레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올레그, 내가 말했듯이 이건 정말 하늘이 준 기회다. 아드리안이 살았든 죽었든, 이제부터 극동 마피아 서열 2위는 바로 너다! 예브게니 영감도 아니고 바로 너야!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찾아다니던 숙적, 바실리 엘리셰프를 처치하는 데 공을 세운 네가 아니면 누가 우리 조직의 2인자란 말이냐!”
“가··· 감사합니다, 보스!”
“비켄티한테도 말했지만, 저쪽 두목은 내가 처리한다. 아마 바실리겠지, 레벨이 더 높은 쪽은. 너와 비켄티는 힘을 합쳐서 스즈키 그 쪽바리 놈을 처리하면 되는 거다! 스즈키가 몇 레벨인지는 몰라도, 2대1을 이길 수는 없어. 그건 너도 잘 알겠지?”
“물론입니다, 보스. 제가 길바닥에서 구른 게 몇 년인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다굴에는 장사 없죠.”
“바로 그거야! 극동 마피아 넘버 투가 누구인지, 스즈키 녀석에게 제대로 보여주라고!”
“맡겨만 주십쇼, 보스!”
“좋아, 좋아. 올레그, 그리고 비켄티. 모두 준비됐지?”
“넵!”
“네, 보스!”
블라디미르는 어깨동무를 풀고 헛기침을 두 번 해서 목을 풀었다.
그러고 나서, 숲속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바실리! 그리고 스즈키! 나와라!”
바람이 마른 수풀을 스치고 지나갈 뿐,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블라디미르가 다시 주변을 향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스즈키! 바실리! 비겁한 짓거리는 그만두고 모습을 보여라!”
비켄티가 올레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위치를 이렇게 드러내도 될까요?”
“우리는 미행을 당한 쪽이다. 적은 우리 위치를 알겠지만, 우리는 적의 위치를 모르지. 우리 위치는 이미 드러나 있는 패니까, 적에게 모습을 드러내라고 도발하는 게 맞지.”
“저··· 적이 기습이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기습? 바로 뒤에 첨탑이 있고, 앞으로는 숲 가장자리의 개활지야. 기습이 될까?”
“화··· 활이라도 쏜다면···”
“그건 뭐 건물 벽 뒤로 살짝 숨으면 되지. 구원자 반사신경에 그게 안 되겠어?”
“그··· 그래도···”
“숨 크게 쉬어, 비켄티! 우리는 셋이다! 우리가 쪽수에서 우월해. 질 리가 없어!”
“바··· 바실리는 35레벨 정도 된다고 하셨죠?”
“추정 레벨이다. 모스크바 쪽에서는 보수적으로 추정을 자주 하니까, 아마 그것보다는 낮을 거야.”
“스··· 스즈키는요?”
“몰라. 용병이잖아. 피차 서로에게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우리 편으로 들이기 전에 테스트를 해보려고 한 보스의 판단이 옳았던 거지.”
블라디미르가 부하 둘에게 말했다.
“너희들! 잡담은 그만두고 집중해! 아무래도 놈들은 기습할 생각인 것 같다.”
올레그와 비켄티가 자세를 잡으면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네, 보스!”
블라디미르가 명령했다.
“내 앞으로 서! 양쪽으로 반보 앞으로. 쐐기 모양으로 진형을 만든다! 적이 기습을 한다 해도 뭉쳐만 있으면 우리가 유리해!”
“네··· 넵!”
둘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명령에 따랐다.
불안한 눈빛으로 부하들의 등을 한 차례 쳐다보는 블라디미르.
한바탕 연설을 해서 사기를 올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잔챙이는 그래도 잔챙이인 건가.
그가 혼잣말을 뱉었다.
“칫! 비겁한 녀석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적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비켄티와 올레그에게는 불편하게 들렸다.
블라디미르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쳤다.
“바실리! 언제까지 그렇게 쥐새끼처럼 도망만 다닐 거냐? 남자답게 정면승부를 하자! 6일이야, 6일! 6일 동안 기차를 타고 왔으면 나를 상대로 칼을 뽑아봐야 할 거 아냐? 남자가 돼서 그렇게 치사하게 숨어만 있을 거냐?”
여전히 대답은 없다.
“스즈키! 섬나라 쪽바리 근성이 나오는구나! 정정당당하게는 승부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건가? 너희들은 아직도 사할린이 너희 땅이라고 생각하지? 그게 바로 쪽바리 근성이다! 당당하게 나서서 주장하지는 못하면서 비겁하게 숨어서 궁시렁거리는 것이지. 지금 네놈의 모습과 똑같지 않은가? 역겹다, 스즈키! 대답해라!”
여자인 바실리사에게는 남자답지 못하다고, 한국인인 이준기에게는 비겁한 쪽바리라고 도발하는 블라디미르.
첨탑을 등 뒤에 두고, 앞쪽에는 부하 둘을 방패로 세우고 소리치는 블라디미르.
과연 비겁과는 거리가 먼, 남자다운 모습이다.
먼 곳에, 등신대의 움직이는 물체가 나타났다.
오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빛과 그림자의 향연을 배경으로, 두 개의 실루엣이 조금씩 크기를 키우며 다가왔다.
비켄티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여, 역시! 둘은 같은 편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