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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3)
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3)
“정말, 훌륭하군. 훌륭해.”
방안에 불이 켜지고,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야구모자 차림의 남자가 손뼉을 치며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적외선 망원경이 들려 있다.
조금 전 어둠 속에서 벌어진 전투를 생생하게 즐긴 것이다.
양옆으로는 기관단총을 손에 든 경비병들이 나란히 서 있다.
“알료샤라고 했나? 일본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나?”
“나가마사(長政)요. 스즈키 나가마사(鈴木長政).”
“스즈키 상이군.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걸 환영하네.”
이준기는 카펫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환영 인사치고는 대단히 고약하군요.”
“프로코포프는 허세가 심해서 말이야. 그놈이 자네 실력에 대해 한 말이 진짜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네. 그리고, 그 비싼 카펫에 침을 뱉은 건 내가 딱 한 번만 용서해 주지.”
“이미 피범벅이 된 카펫입니다. 칼싸움이 벌어질 방에 비싼 카펫을 깔아 놨다는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소?”
남자는 잠깐 이준기를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생긴 게 곱상해서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 상남자군! 왠지 내 조직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정말 마음에 드는 성격이군. 자, 만찬장으로 가지.”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저는 지금 배가 아주 고픕니다. 잠깐 동안이지만,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서.”
“그래, 그래. 배가 터지도록 먹게 해주지.”
복도로 나가면서, 방문을 붙잡고 있는 부하에게 그는 말했다.
“저놈들은 가져다 버려.”
복도의 침침한 조명이 열린 방문을 통해 조금 전에 기습이 벌어졌던 어두운 방을 비추고 있었다.
쓰러진 세 사람이 꿈틀거리는 것이, 겨우 윤곽만 보였다.
조금 전 이준기를 기습했던 그들은 결국 소모품에 불과한 모양이다.
일본도를 들고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장에서 장만한 발리송에 제압된 칼잡이들.
아직 죽지 않았지만, 이제 죽을 운명인가 보다.
이준기는 상대의 속을 떠보았다.
“형편없는 놈들이었지만, 가져다 버린다니요?”
“저따위 놈들을 가져다 버리지. 뭐 어쩌라고?”
“부하들 아닙니까? 저도 싸움에 패하면 저렇게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일자리는 다른 데서 구해야겠군요.”
“하하하!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군. 스즈키 상은 저따위 놈들과는 다르지.”
“글쎄요. 저는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하들 사기를 생각한다면 말이죠. 리더십이라는 것은···”
걸음을 멈춘 남자는 돌아서서 이준기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이준기의 코앞에 대고 말했다.
“이봐, 스즈키. 나는 인내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야. 까불지 마.”
거기까지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준기는 말을 멈추었다.
저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살릴 수 없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다.
겨우 돈이나 협박에 굴복해서, 사람을 죽이겠다고 장검을 빼 들고 달려든 인간들이다.
무리해서까지 살릴 가치가 없는 존재들.
만찬장에 도착하니, 디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기가 입을 떼기도 전에, 디마가 먼저 말했다.
“하하. 알료샤. 날 원망하는 건 아니지? 난 그냥 명령받은 대로 한 것뿐이야. 나중에 알료샤와 함께 아키하바라에도 가보고 싶고 말이지.”
“물론이지, 디마. 대신, 나중에 나랑 대련 좀 하자구. 검도로 말이야. 방어구는 뭐든지 쓸 수 있게 해주지.”
“농담 말라구, 알료샤. 나도 네가 싸우는 걸 봤어. 앞으로는 절대 까불지 않을 테니 봐달라구.”
“저녁 먹고 나서 생각해 보지. 난, 기분이 좋아지면··· 가끔,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관대해지는 성격이니까.”
*****
“스즈키 상, 우선 첫 번째 의뢰를 하겠소.”
기름진 식사가 끝나자, 럼을 넣은 홍차를 홀짝거리면서 보스가 말했다.
“뭡니까?”
“잡졸을 하나 죽여달라는 거지. 간단한 일이오.”
“누굽니까?”
“북쪽 시가지에 차원문이 하나 있소.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도 우리 것이지. 그런데 어떤 녀석이 자꾸 근처를 들락거린단 말요. 게다가 차원문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걸 우리 애들이 본 적도 있소. 그러니까, 구원자라는 얘기지.”
“그 구원자를 죽여달라?”
“그렇지. 차원문 근처에는 우리 애들 사무실이 있소. 거기에 연락을 해놓을 테니, 내일쯤 방문해 주시오. 가면 권총이든 산탄총이든 기관총이든 맘 내키는 걸로 빌려줄 거요.”
“총으로 쏴버리는 일이라면, 굳이 제가 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용병이 그런 거 아뇨? 우리 애들은 요즘 경찰 애들과 너무 친해져 놔서 말이오.”
“저는 경찰의 표적이 돼도 괜찮다, 그런 얘깁니까?”
보스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디마가 우물쭈물하면서 보스에게 말했다.
“보, 보스! 알료샤, 아니 스즈키가 러시아어가 서툴러서 그런 겁니다. 건방지려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이준기에게 말했다.
“알료샤! 보스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러시아어가 안 되면, 차라리 영어로 하든가. 내가 통역하면 되니까.”
이준기가 디마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너에게 말하겠다. 영어로 할 테니, 통역은 알아서 해줘.”
“그래, 그래. 알았다.”
“그 일에 왜 날 쓰려는 건지, 그걸 좀 물어봐 줘. 아까 네놈이 내 등을 떠민 것과 다른 케이스라는 걸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그게 핵심이라고.”
“좋아, 알았다.”
그렇게 대답하고, 디마는 보스에게 매우 빠른 러시아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미리 연습이라도 해 놓은 건지, 아니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명한 만담 팀이라도 되는 건지, 둘은 이준기의 초보 러시아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대화를 했다.
한참 대화가 끝나고, 디마가 이준기에게 말했다.
“보스 말은 그거야. 우리 애들이 경찰 감시 대상인 것도 문제지만, 네 실력을 봐야 한다는 거지. 아까 간단한 테스트는 거쳤지만, 실전은 아니잖아? 실전을 통해서 네 가치를 증명하라는 거다. 그중 첫 임무라는 거야.”
“첫 임무라니? 둘째, 셋째 임무도 있다는 거야?”
“그렇다. 보스는 너를 중하게 쓰려는 생각이야. 그래서 테스트를 좀 하겠다는 거지.”
“중하게 쓴다고? 왜 나를?”
“재능있는 구원자를, 보스는 좋아하시거든.”
“뭐?”
격투 한 번 보고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아채다니, 제법이다.
이준기는 보스를 쳐다보며 ‘이르헬의 눈’을 썼다.
37레벨의 구원자.
디마의 호들갑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충분히 높은 레벨이다.
보스가 가식에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며 이준기에게 말했다.
“내가 정식 소개를 아직 안 했군요, 스즈키 상. 내 이름은 블라디미르 아쉬코프. 극동 마피아의 보스이자 러시아 마피아 연합 4인방 중 하나요. 구원자 레벨은 37레벨이지. 잘 부탁하오.”
*****
1월 10일, 월요일 아침.
이준기는 디마와 함께 아르바트 거리의 해적 커피를 다시 찾았다.
“사샤는?”
“다른 심부름 중이야. 프로코포프 씨가 시킨 일이 있어서.”
“흠. 계속 못 보니까, 보고 싶군.”
“사샤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디마에게는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
“썰렁한 농담이지만, 참아주지.”
커피를 받아서, 둘은 다시 창가 자리로 왔다.
이번에는 이준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디마, 이제부터 우리는 한 팀인 건가?”
“보스의 명령이다. 당연히 한 팀이지.”
“보스의 명령이면 그냥 그대로 되는 거야? 넌, 나랑 엮이는 게 괜찮아? 내가 첫 번째 임무에 실패라도 하면 어쩔 건데?”
“흠.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물론, 보스와는 달리 알료샤 네가 구원자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으니 좀 한심하기는 하지만.”
“보스가 구원자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는 거지? 비밀 같은 거 아니고.”
“당연하지. 구원자가 아니었다면 보스가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자리에 올랐겠냐?”
“그래? 그렇게 젊어?”
“나보다 딱 두 살 위다.”
“넌 몇 살인데?”
“몇 살 같아 보여?”
“글쎄. 서양인들은 다 비슷하게 보여서.”
“나도 마찬가지다. 동양인들 나이는 대체 모르겠어.”
“피차 그런 거군. 난 1994년생이다.”
“그으래? 생각보다 나이를 먹었군. 나보다 형이네?”
“넌 몇 살인데?”
“난 1995년생이다. 보스는 1993년생이지.”
“서른도 안 돼서 마피아 보스라···”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도대체 왜 갑자기 나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디마가 말을 이었다.
“임무 얘기를 하지. 놈이 노리는 건, 페르보레첸스키 구에 위치한 차원문이야. 아마 고향 집이 그 근처거나 그렇겠지.”
“페르보··· 뭐라고?”
“보스가 말한 북쪽 지역이다. 주택가. 구원자 애송이 놈이 노리는 것이 그 지역에 열려 있는 차원문이거든.”
“고향 집이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뭐야? 집이 아니고 고향 집이라니?”
“집은··· 모스크바겠지. 아무래도.”
“모스크바?”
“모스크바 지역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놈이라고 하더군.”
“누군지 안다는 거군? 그럼 정보를 일단 좀 공유하지?”
“안됐지만, 정보는 직접 캐라. 보스 명령이다. 정보 수집 능력도 시험하겠다는 거다.”
“도망자 신세이기는 해도,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냐? 프로코포프 씨의 추천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 같군.”
“좋게 생각하라구. 일단 테스트를 통과하면, 그야말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줄 테니.”
“흥.”
“일어나자. 만나볼 사람이 있어. 안톤 영감이라고.”
*****
지은 지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공장 건물로 그들은 들어갔다.
허름한 외관에 비하면 안쪽은 꽤 깔끔한 편이었다.
구불구불 복잡한 복도를 따라 크고 작은 방 수십 개가 각층마다 복잡하게 흩어져 있다.
범죄 조직에 아주 잘 어울리는 건물이다.
계단으로 2층에 도착한 디마는 미로를 헤치고 나아가 문 하나를 열었다.
책상과 선반이 하나씩 놓인 작은 방에서 왜소한 몸집의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청년이군. 보스가 최우선으로 하라고 해서 하긴 했지만. 내가 수고한 값은 하겠지? 급행료도 받지 않고 이런 일을 하다니, 원.”
“실력은 제가 보증합니다. 고마워요, 안톤.”
“자, 가져가.”
디마는 안톤 영감에게서 위조된 신분증 두 개를 받아 이준기에게 건넸다.
운전면허증과 여권.
가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퀄리티다.
- 알렉세이 스즈키. 1999년 9월 9일생.
“1999년생? 날 참 어리게 봐줬군.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그냥 9로 한번 운을 맞춰봤지.”
“겨우 이걸 가지러 여기에 온 거야?”
“겨우라니? 도망자 신세에서 널 구해줄 새로운 신분증명인데.”
“하긴 그런가. 고맙군.”
“그래. 고마워해야지. 보스한테 충성하라고.”
“다음 일정은?”
“알료샤, 너는 이제부터 자유시간이야. 나는 또 나대로 할 일이 있기는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뜻이겠지?”
“그래, 그렇다. 원래의 내 일이지. 손봐줄 놈들을 드디어 잡았거든. 으흐흐흐.”
디마의 얼굴에 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손봐줄 놈들?”
“궁금하면, 따라와도 상관없어. 하지만, 너도 일을 시작해야 할 거다. 정보부터 모아야 할 거 아냐.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혹시나 내 충고를 듣고 싶다면, 그거다. 서둘러 정보부터 모으라는 것.”
“정보를 모으는 것은 내 일이다. 너는 내게 그 정보를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스가 그렇게 지시했으니까.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건가?”
“그렇지.”
“내 실력으로 직접 정보를 캐라는 게··· 보스의 생각이라는 거지? 디마, 네 생각이 아니고.”
“그래. 내 생각이 아니고 보스의 생각이야.”
“만약 내가 너를 협박해서 정보를 끌어낸다면? 그건 내 실력에 속하는 일이겠지?”
“그건, 흥미로운 얘기군.”
“그렇지?”
“하지만 나도 구원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너보다야 한참 실력이 떨어지겠지만 말이야.”
“겸손이 지나친데.”
“겸손은 여유에서 나오는 법이지. 난 구원자이기도 하지만 마피아이기도 하다. 네가 야쿠자 세계에서 얼마나 거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쪽에선 내가 우위라고 생각하는데.”
“아마, 그렇겠지.”
“자, 이제 가라. 일주일 내에 놈을 잡아 족쳐야 한다는 게 보스의 기대 수준이다. 이건, 대단한 힌트라고. 일주일 내에 놈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야. 거의 확실하다.”
“그래, 알겠다. 나중에 보자고.”
1층 현관을 통해 이준기가 나가는 것을 보고, 디마는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골목을 한참 돌고, 두꺼운 철문을 두 개 지나서 들어간 방.
안에는 남녀 한 쌍이 각자 의자에 묶인 채로 앉아 있었다.
여자는 떨고 있고, 남자는 기절했는지 뒤쪽으로 머리가 넘어간 채로 가만히 있다.
디마는 들어서자마자 옆에 서 있던 부하의 뺨을 후려갈겼다.
“야, 이 자식아! 내가 때리지 말라고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디마 님.”
뺨을 맞고 벌벌 떨면서 일어서는 부하에게서, 디마는 잡혀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입이 귓가에 걸리게 웃으면서, 디마는 말했다.
“때리고 즐기는 건 내 몫이다. 너도 즐기고 싶으면, 진급을 하라고.”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그녀는 디마를 쳐다보며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