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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2)
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2)
해적 커피.
흰색 바탕에 초록색 로고, 스타벅스와 비슷한 분위기의 로고다.
자세히 보면 해적 모자를 쓴 여자가 이쪽을 노려보는 모습이다.
관광지로 유명한 아르바트 거리 한복판에 있는 커피숍.
이곳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에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드미트리 호로비코프는 사할린 촌구석에서 여기까지 건너온 시골뜨기에게 도시 구경도 시켜줄 겸, 흔쾌히 응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서 쉽게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러시아인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양인이 보였다.
서로 알아보기 위한 표식으로, 동양인은 머리카락 위로 선글라스를 올려놓고 있었다.
“어이! 네가 사할린에서 온 알료샤냐?”
“아, 안녕! 내가 알료샤. 이쪽은, 사샤.”
“알렉세이와 알렉산드르? 사할린에서는 이름 알파벳 순서로 팀을 짜나? 아무튼, 반갑다. 나는 디마다.”
셋은 통성명과 함께 악수를 나누었다.
모자를 잔뜩 눌러 쓴 채로 긴장하는 세르게이가 너무 어색해 보이지는 않을지, 이준기는 살짝 불안했다.
다행히도, 디마 호로비코프는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커피라도 마실까. 너희들은 어때?”
“우린 이미 마셨는데. 네 것만 사 오면 될 것 같아.”
알료샤, 그러니까 이준기의 대답에, 디마는 테이블 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면서 말했다.
“사샤, 저 녀석은 꽤 조용한 놈이군.”
“원래 좀 과묵하지.”
“알료샤 네가 저 녀석 대변인이라도 돼?”
“그런가. 하하. 저놈은 저게 컨셉이야. 과묵해야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다는 거지.”
“그래? 살짝 보니까 꽤 미남인 것 같은데, 뭐 그런 컨셉이 필요한가? 그런 컨셉은 나 같이 울퉁불퉁하게 생긴 녀석에게나 필요한 거 같은데.”
“하하. 무슨 얘기야, 디마. 너 정도면 훌륭하지. 훈남이라고.”
“아, 그래? 일본인 기준으로는 그렇게 보여? 일본 여자라도 사귀어볼까.”
“너 정도면 인기 많을 거야. 내가 보증하지. 언젠가 일본에 돌아가게 되면, 함께 롯폰기나 오다이바에 가보자고. 내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해 주지.”
“헤헤, 고맙군. 말이라도 말이지.”
“난, 빈말하는 성격이 아냐.”
“그래? 하하하. 기분 좋구만. 잠깐 기다려. 커피 좀 사 올 테니.”
디마는 커피를 주문하러 카운터로 갔고, 이준기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세르게이가 이준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떨려. 무, 무서워 죽겠다고.”
“못 견디겠어?”
“그, 그래, 알료샤. 제발 좀···”
“그럼, 먼저 나가.”
“그래도 돼?”
“그래. 숙소에 가서 기다려.”
“고,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 세르게이는 가게를 뛰쳐나갔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세르게이가 가게를 나가는 것을 보고 디마가 말했다.
“저거, 사샤? 어디 가는 거야?”
“점심 먹고 배탈이 났나 봐. 숙소에 가 있겠다고 하네.”
“여기도 화장실 있는데?”
“15분마다 화장실 가는 것도 고역이니까.”
“하하, 그래? 그거, 고역이기는 하지. 그건 그렇고, 알료샤, 러시아어 괜찮은데? 밀항한 지 얼마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칭찬 고맙군. 12월 29일에 사할린으로 들어왔어.”
“일주일도 안 됐네? 들어 오기 전에 러시아어 공부를 좀 한 거야?”
“아니. 처음인데.”
“언어 천재구만.”
대단히 거만하다고 들었건만, 드미트리 호로비코프는 이준기에게 까탈스럽게 굴지 않았다.
신입사원에게만 친절하게 구는 그런 유형의 사람인 모양이었다.
커피를 빨대로 쪽쪽 거리면서 디마가 말했다.
“그래. 프로코포프의 추천이니 오늘 저녁에 보스를 뵙게 해주지. 그런데 그 자리에도 사샤는 빠지는 건가?”
“사샤는 그냥 통역 겸 길 안내차 같이 온 거야. 내가 홋카이도 야쿠자 출신이라는 건 들었지?”
“그럼. 나름 거물이었다면서?”
“알아주니 고맙군.”
“그런 명성은 사람보다 먼저 도착하고는 하지. 적 조직 보스를 죽이고 잠시 피신 중이라고?”
“그래. 과연 소문이 먼저 도착했군.”
“적 보스를 죽이다니, 대단하군. 하지만 여기는 좀 다를 거야. 일본에서 총은 아직이잖아?”
“총은··· 내 무기가 아니다. 난 칼잡이니까.”
사실이었다. 이준기의 주 무기는 오캄(Occam), 그리고 카데쉬(Kadesh)니까.
“그렇다고 칼 쓰는 실력이 전혀 쓸모없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칼은 총이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할 수 있지. 특히 조용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때라면 더더욱.”
“그래. 그래서 일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러시아에 온 거야.”
“살수는 언제나 환영이야. 세상에 죽일 놈은 넘쳐나니까.”
디마의 얼굴에 야비한 웃음이 살짝 스쳐 갔다.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이 손에 들어와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생각하는 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건, 범죄자에게 별로 유리한 특성은 아닐텐데.
이준기는 궁금한 질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조직에서는 차원문 관리도 하겠지?”
“그래. 당연하지.”
“일본에서는 당연하지 않아서 말이야. 러시아니까 당연한 거라고.”
“하하. 하긴. 러시아는 현재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으니까. 우리가 정부 대신이지.”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차원문이 몇 개나 되는 거야?”
“몇 개 없어. 더 있음 좋을 텐데. 열 개 정도 되던가?”
차원문 발생은 해당 지역의 인구에 비례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곳에 열 개라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다.
블라디보스토크 인구에 비해 봐도 과도하고, 연해주 전체에 열릴 차원문이 전부 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열렸다고 하더라도 너무, 너무 많다.
차원문을 거의 닫지 않고 놔두는 모양이다.
“차원문에 관심이 있어? 알료샤, 너··· 혹시 구원자야?”
“아냐. 그냥 관심이 있을 뿐. 구원자였다면 야쿠자 정도 죽였다고 해외로 도망치지는 않았겠지.”
“하긴, 그렇군. 조금 실망인걸. 구원자 마피아라면, 출셋길이 보장되는 건데 말이야.”
“구원자는 아니더라도, 차원문에 대해 공부는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일본에서라면 몰라도, 이곳에서는 조직에서 차원문 관리를 한다고 하니까. 나도 조직에서 일을 하려면 차원문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
“하하. 좋은 태도군. 훌륭해. 보스가 좋아하시겠는걸.”
“던전 안에서 총은 못 쏜다면서?”
“칼잡이 세상이야. 던전 안쪽은. 둔기라든가 다른 무기도 있지만 일단은 날붙이가 대세지.”
“꽤 상세히 알고 있네. 설마, 디마는 구원자인 거야?”
“하하. 쑥스럽구만.”
구원자 겸 마피아라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것이고, 오만의 화신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준 디마 호로비코프의 모습은 상식인 그 자체였다.
그래서 프로코포프와 같이 일반인 마피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구원자라니.
확인차, 이준기는 즉각 성흔 ‘이르헬의 눈’을 발동했다.
디마 호로비코프의 상태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 19레벨.
- 전문화: 불 11, 어둠 8.
- 힘 40. 민첩 30. 체력 50. 정신력 10. 물리 저항 0. 마력 저항 0.
- 성흔: 없음.
- 획득 스킬: 없음.
- 인벤토리: 오크 분쇄자의 검, 숲지기 장갑, 나무꾼 경갑, 토끼 사냥 털신, 하급 힐링 포션 2개, 기본 식량 팩 2개.
‘쪼렙이기는 해도, 구원자는 구원자.’
디마의 레벨을 알게 되면 세르게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기 레벨의 반밖에 안 되는 녀석에게 쫄아서 숙소로 돌아간 셈이니 말이다.
이준기는 물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모르겠지만, 디마는 조직 내 서열이 어떻게 되지?”
“나? 그냥 똘마니지 뭐. 극동 마피아 전체 랭킹 17위다.”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는 보스는?”
“보스는 보스야. 당연히 1위다.”
이준기는 일부러 머뭇거리는 척하면서 다음 질문을 던졌다.
“보스도··· 구원자겠지? 무서운 사람이야? 실력은?”
“아따··· 질문이 쏟아지네.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난생처음으로 하는 타향살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궁금한 게 많은 게 당연하잖아?”
“그래, 맞는 말이야. 그런데 내가 어디까지 말해줘도 될지··· 자신이 없네. 프로코포프의 추천도 있었고, 사할린 똘마니와 함께 나타났으니 당신 신원은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외부인이다 이건가?”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내 입장을 이해해 주면 고맙겠군.”
“그래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도 해줄 수 없는 거야?”
“보스 이름은 알지?”
“블라디미르 아쉬코프 씨.”
“그래. 블라디미르 아쉬코프. 그는 대단히 높은 레벨의 구원자다. 나 같은 건 보스의 발톱 때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발톱의 때라니, 세르게이에게 듣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오만의 화신이 아니라 겸손함의 화신이었던 건가.
“그렇게 대단해?”
“뭐야, 상대 조직의 보스를 죽였다더니··· 마피아 보스가 우스워 보이나?”
“아냐,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말이야, 나는 강한 사람에게 끌리는 스타일이라서.”
“그래? 그렇다면 만족할 거다. 보스처럼 강한 구원자는 못 봤어. 모스크바 마피아에는 보스에 필적하는 고레벨 구원자가 몇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말이지.”
저녁 때 블라디미르를 만나게 되면, ‘이르헬의 눈’을 발동해서 그의 상태창을 직접 보면 될 일이다.
궁금증은 그때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미리 분위기를 조금 파악해 놓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디마 호로비코프의 말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아쉬코프는 아마 40레벨 근방의 구원자인 모양이다.
‘극동 마피아의 보스다. 러시아 최고 랭커는 아니겠지만 10위권에는 들겠지. 경계해서 나쁠 것 없다.’
*****
저녁에 이준기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모처에 있다는 보스의 저택.
눈을 가리고 이동하는 바람에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을 안 가려도 어딘지 모른다. 블라디보스토크 지리도 모르는 나에게 이게 웬 난리란 말이냐. 영화를 너무 봤군.’
나중에라도 이 저택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면, 세르게이나 사할린 지부에 알아보면 될 일이다.
눈을 가리는 것은 아마도 자기를 겁주기 위한 것이라고, 이준기는 생각했다.
마침내 자동차가 정지했다.
“눈가리개를 풀어 주마.”
디마가 그렇게 말하고 눈가리개를 풀었다.
어둠이 내리깔리는 하늘을 배경으로 웅장한 석조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저택은 19세기에 지어진 거지. 건축물은 역시 옛날에 지은 게 튼튼하다니까.”
웅장한 저택의 모습에 이준기는 압도되었다.
거의 성 같아 보이는 저택.
재킷 안쪽에 총을 찬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경비 여러 명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집사 분위기의 노신사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준기에게 다가왔다.
그는 일본어로 말했다.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만, 보안상 필요한 조치였으니 양해 바랍니다. 보스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죠.”
“감사합니다. 일본어 고수시네요.”
“별말씀을. 감사합니다.”
계단을 올라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도 총을 든 경비병이 있었다.
건물 안이니까 총이 보여도 상관없다는 듯, 경비병은 기관단총을 허리에 보이게 차고 있었다.
이준기는 디마에게 말했다.
“기관단총을 보이게 들고 있다니, 역시 러시아는 급이 다르군.”
“그런가? 난 늘 보던 모습이라서 아무런 감흥이 없는데 말이지.”
“영화 세트장에라도 온 느낌이야.”
“하하. 영화 세트장이라니. 그런데 말이야, 나도 사실 보스 저택을 여기까지 와보는 건 처음이야. 1층에는 와본 적이 있지만.”
“그래?”
“알료샤가 일본에서 온 귀한 손님이라서 그런 거지. 프로코포프의 추천도 있었고.”
어두운 복도였지만, 디마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사악한 미소가 분명히 보였다.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는 것을, 안전한 관중석에서 바라보는 로마인들이 저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곧 보게 될 이준기의 죽음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표정.
‘포커페이스가 전혀 안 되는 놈이군. 고맙긴 하지만.’
어두운 복도 끝에서 방문이 열리자, 디마는 이준기의 등을 떠밀었다.
쓰러지듯이 앞으로 휘청거리며, 이준기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일본도를 높이 쳐든 사내가 그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