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00화 (10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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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1)

Episode 35: 푸가초프의 반란 (1)

“대장··· 정말 할 거야?”

“대장이라는 말은 그만두지. 알료샤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어?”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익숙하지가 않아서.”

“골목대장도 아니고 대장이 뭐냐, 대장이.”

“그, 그래. 알료샤, 내 질문은···”

“블라디보스토크 놈들은 훨씬 위험하다. 그런 얘기겠지?”

“그렇지. 알료샤가 엄청 센 거는 나도 알지만.”

둘은 항구를 빠져나오는 중이다.

스무 시간이나 배를 타고 오면서 가만히 있다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질문을 퍼붓는 세르게이.

그가 블라디보스토크 마피아를 어느 정도로 평가하는지 알 만했다.

시골 깡패가 기세등등해서 서울을 평정하겠다고 원정을 왔다가, 막상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는 나와바리의 크기만 보고도 압도되어 겁을 집어먹는, 그런 형국이다.

“세르게이. 나도 세고, 너도 세다. 쫄 것 없어.”

“나? 나 같은 게 무슨···”

“지금까지는 아무한테도 진 적이 없어? 나한테 겨우 콧잔등 몇 번 얻어맞았다고 그렇게 주눅 들어 있는 건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서.”

“그··· 그렇지.”

“설마,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세르게이가 화들짝 놀라면서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아, 아냐! 절대 아냐!”

“그런 게 아니라면, 됐어. 마음이 바뀐 거라면 모를까,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고.”

“모자랑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고.”

“머리도 잘랐잖아?”

이준기의 말에, 세르게이는 모자를 벗고 앞머리를 당겨 보았다.

군인처럼 짧게 자른 앞머리가 영 어색했다.

“이 정도로 될까. 머리를 박박 민 것도 아니고. 만약 놈들이 날 알아본다면, 즉각 죽이려고 들 거야. 배신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으니까, 러시아 마피아는.”

“널 알아볼 녀석들이 많이 있을까? 세르게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얼마나 활동한 거야?”

“각성하기 전에 심부름이나 하던 정도니까. 전부 해서 6개월 정도 되려나?”

“그런데 누가 널 알아볼까?”

“맞아. 가능성은 낮기는 하지. 하지만 난 당사자라고. 정체를 들키면 죽는 건 나라고, 대장이 아니고. 아, 아니, 알료샤.”

“빨리 우크라이나로 가고 싶은 거야?”

“그, 글쎄.”

“글쎄라니?”

“우크라이나에 간다고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고. 거기에 가서 우크라이나 마피아에 들어가면 달라지는 게 전혀 없잖아?”

“우크라이나까지 가서 다시 마피아가 된 널 보게 된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지.”

“그런 뜻이 아니고···”

“그래서, 지금 그냥 혼란스럽다는 거잖아? 미래가 너무 불확실하다. 이거 아냐?”

“그, 그래, 맞아. 그거야. 그런 것 같아.”

“원래 미래라는 건 불확실한 거야.”

*****

그렇다. 미래란 얼마나 불확실한가.

미래를 보고 온 그에게조차 미래의 불확실성은 가혹했다.

이준기는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았다.

2023년 2월 28일, 샌프란시스코.

동료들과 함께 조슈아 테일러에게 대항했으나, 이준기는 조슈아의 일격에 심장을 꿰뚫렸다.

삶의 끈을 놓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는 2년 전 서울의 자기 방에서 깨어났다.

2021년 8월 29일. 자신이 구원자로 각성했던 바로 그 날.

과거로 돌아온 그는 조슈아의 세계 지배를 막기 위한 일념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머릿속에 가지고 돌아온 지식을 활용해서, 그는 빠르게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원래대로라면 20레벨 후반에 불과할 지금, 이미 40레벨이 되어 있다.

어떻게 죽지 않고 과거로 돌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두 번째 기회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어떻게 하면 조슈아의 독주를 막을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면서 힘을 키우려고 했다.

구원자로 각성할 그 시각에 맞추어 차원문 근처에서 배회했다.

빠르게 성흔을 개방하기 위해 20레벨에 도달하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했다.

20레벨이 되어 주어진 선택지에서 예전과는 다른 성흔을 골랐다.

몬스터와 싸우고 차원문을 닫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이준기가 아니다.

구원자들에게 최후의 적은 구원자.

바로 그 사실을 알고 돌아왔기에, 이준기는 예전과 다른 성흔을 선택했다.

- 이르헬의 눈

- 상대방의 현재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상태창의 부실한 설명은 그랬다.

많은 구원자들이 의외로 간과하는 것이, 상태창 메시지의 말장난이다.

말장난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던전 포맷도 있을 정도다.

‘상대바의 현재 상태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야 했다.

‘상대방’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현재’의 ‘상태’란 또 어떤 의미로 쓰인 단어들인지.

말장난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그럼에도 이준기는 세 개의 선택지 중에 ‘이르헬의 눈’을 선택했다.

소거법으로 생각해도, 같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르헬의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두 개의 선택지보다는 조슈아와의 싸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이르헬의 눈’은 극단적으로 희귀한 성흔이다.

80레벨로 전 세계 최고 레벨 탱커의 자리에 올랐던 이준기, 모든 정보를 꼼꼼히 정리하던 그조차도 성흔 ‘이르헬의 눈’을 가진 구원자는 알지 못한다.

아직 멋모르던 새내기 구원자였을 때, 상태창 화면에서 선택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을 본 기억이 전부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 즉 전설 등급이라는 이야기다.

다행히도, ‘이르헬의 눈’은 훌륭한 성흔이었다.

구원자와 몬스터를 가리지 않으며, 차원문 안팎 어디에서나 쓸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사정거리가 5미터로 상당히 짧다는 것 정도다.

약간의 정신집중이 필요한 것도 약점으로 지적할 수 있지만, 정신집중은 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조슈아에 대항하려면, 일개 개인에 불과한 자신의 힘만 키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 세계 구원자 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해서 관찰했다.

조슈아 테일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역사가 흘러가지 않도록 하려고,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결론은 뻔한 것이었다.

옳은 일을 하는 것.

무고한 목숨이 어이없이 희생되는 일을 막는 것, 그것이야말로 조슈아 테일러의 세계 지배를 막는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닌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게 하다 보면, 더 많은 구원자들이 살아남을 것이고,

조슈아 테일러의 터무니없는 생각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더 많아질 것이라고.

그런 생각에서 이준기는 우선 한국 길드협회의 폭거를 막으려고 했다.

차원문 관리를 정부가 아닌 사단법인이 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현실이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차원문 관리는 정부에서 구원자협회로 넘어간 지 오래다.

협회라는 시스템 자체도 문제지만, 그것을 사적인 동기로 악용하려는 자들은 더욱 큰 문제다.

미래에서 돌아온 이준기는 알고 있다.

친일파 구원자들이 한국 길드협회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구원자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그걸 막으려 했지만, 이준기는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 시점, 2022년 1월 초에 러시아에 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기억해 둔 기보를 보면서 상대의 수에 대처하는 바둑을 두었지만, 상대는 다른 수를 두어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왔다.

‘미래를 아는 자’ 이준기에게, 미래는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

시내로 들어와 점심을 먹었다.

새우 껍질이 빠른 속도로 쌓였다.

몇 번이나 추가 주문을 하면서, 세르게이는 이준기의 먹성에 혀를 내둘렀다.

새우 껍질을 열심히 까면서, 이준기가 물었다.

“어디로 가야 블라디보스토크 갱들을 만나볼 수 있는 거야?”

“사할린 마피아로서 내 신분을 이용한다면 쉽게 만나겠지만, 신분을 숨겨야 하니까 내가 나설 수는 없어. 그건 대장, 아니 알료샤도 동의하는 거지?”

“물론이야. 내가 동료를 소모품쯤으로 써먹는 악당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

“그, 그럼.”

세르게이는 대답을 하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소모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 건 처음인 모양이다.

지금까지 그는 소모품을 펑펑 써대던 쪽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제안한 대로, 내가 사할린 마피아 끄나풀 연기를 할 테니까, 넌 측면 지원만 하면 된다고.”

“그, 그래, 알료샤. 그렇다면, 이 번호로 전화를 해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세르게이는 전화번호가 떠 있는 휴대폰을 이준기에게 내밀었다.

그 번호를 이준기는 자신의 폰에 찍었다.

러시아에 도착하면서, 이준기는 원래 쓰던 폰을 폐기하고 새 전화를 샀다.

비행기 모드로 해놓고 지도 앱 정도만 쓰던 폰이지만, 추적당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별로 좋은 전화가 아니라서, 그런 기능이 있을 것 같지도 않기는 하지만.’

바뀐 폰을 보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직까지도 그는 실종자다.

일본 측에 수색 요청 공문 정도는 보내겠지만, 정부는 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실족 추락한 구원자라니, 시신이나 빨리 발견해서 유족에게 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협회는 사정이 다르다.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찾고 있을 것이다.

시체가 발견될 때까지, 아니면 살아 있는 그를 발견해 시체로 만들기 전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과는 달리, 이준기가 바다가 아닌 육지로 떨어졌다는 것을 그들을 알고 있다.

이준기는 전화에 찍힌 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번호로 전화를 하면 되는 거야? 누구 번호지?”

“얼마 전까지 연락을 하던 극동 마피아 간부야. 이름은 드미트리 호로비코프. 애칭으로 디마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니까, 그렇게 부르는 게 좋을 거야.”

“러시아에는 드미트리라는 이름이 많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군.”

“그런 얘기는 또 어디에서 들었어?”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누군가한테 들었겠지.”

과거로 돌아오기 전, 러시아에서 조슈아에게 맞서 싸우던 동료들에게 들은 얘기다.

그런 얘기를 세르게이에게 할 수는 없지.

“디마는 서열이 어떻게 돼? 혹시 알아?”

“서열은··· 17위다.”

“세르게이, 넌? 처음에 나한테 말한 것처럼 극동 마피아 2인자는 아닐 거고···”

“아··· 창피하게 그 얘기를 왜 또 해··· 좀 봐줘.”

“내가 말버릇이 좀 고약하지? 미안해.”

“난, 극동 마피아 전체 서열로 하면 12위야.”

“에? 그럼 디마보다 네가 더 위네?”

“하지만 디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마피아 생활을 해온 녀석이다. 내가 처음 마피아가 되었을 때부터, 이미 간부였지. 차원문 같은 거 생기기 전부터.”

“그래서 네가 서열이 더 높긴 해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는 얘기인 거야?”

“그래. 내가 극동 마피아 서열 12위이기는 해도, 블라디보스토크 본부 간부한테 함부로 할 수는 없어. 오히려 내가 조심해야지.”

“하긴, 네 정체를 밝힐 것도 아니니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상관없는 얘기군. 세르게이 로스코비츠는 지금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열심히 근무 중인 걸로 되어 있으니.”

이준기는 기지개를 켜면서 등을 뒤로 기대려고 했다.

허름한 식당의 빈약한 철제 의자 위라는 걸 깨닫고, 그는 그만두었다.

“의심하지는 않을까? 내 정체에 대해서 말야. 갑자기 일본인 신입이라니.”

“프로코포프가 미리 연락을 해두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얘기도 그럴듯하게 지어냈잖아?”

“프로코포프가 뒷공작을 해두었을 가능성은?”

“글쎄. 그 가능성에 대해서라면, 나는 회의적이야. 프로코포프가 그렇게 겁먹은 건 처음 봤어. 대장을, 알료샤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어.”

“하지만 프로코포프에게는 이것도 위험한 행동이잖아? 나중에 내 장기 말 노릇을 한 게 극동 마피아에게 알려지면, 그들이 그를 가만둘까?”

“일단 살고 보자는 거겠지. 게다가···”

“게다가?”

“아마, 알료샤가 극동 마피아를 다 쓸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강한 쪽에 굽히는 거, 그게 깡패라면서?”

“그렇지.”

“알료샤가 극동 마피아를 쓸어버리고, 자기한테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오늘 전화 같은 사소한 일을 조사하고, 자신에게 보복을 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바로 그것이 이준기의 생각이기는 하다.

극동 마피아를 소탕해 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조직이 모스크바 마피아를 비롯한 러시아 마피아 연합을 기만하도록 유도하는 것.

그렇게 시간을 벌어 놓고, 이준기는 러시아 마피아의 총본산, 모스크바에 간다.

바로 지금, 사할린을 잠재워 놓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듯이.

“맛있는걸. 이 새우 요리. 이름이 뭐였지?”

“이름? 그냥 곰새우 튀김인데.”

“그래, 곰새우. 맛있네.”

“한국에는 이런 게 많이 없나 봐?”

“어딘가에는 있겠지. 비싸겠지만.”

세르게이는 그렇게 말하는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구원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빈한한 옷차림이다.

이준기에게 맞추느라 세르게이도 싼 옷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준기의 옷보다 몇 배는 비싼 것들이다.

빈 접시의 탑을 완성하고, 이준기는 전화를 꺼냈다.

세르게이가 물었다.

“전화하려고?”

“다 먹었잖아?”

“커피는?”

“커피는, 드미트리, 아니 디마 그놈이랑 같이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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