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94화 (9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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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3: 천리행 (5)

Episode 33: 천리행 (5)

이준기는 이장과 청년부장, 이렇게 두 사람과 함께 차원문이 있는 마을 한복판으로 갔다.

청년부장이라고 해도, 나이가 50은 넘어 보였다.

멀리에서 보나 가까이에서 보나 차원문은 늘 보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단지, 주위에 사람이 너무 없었다.

한국의 차원문은 군인이 두 줄로 포위하는 것이 기본이고, 거기서 10미터 이상 떨어져서 전경 포위선이 하나 내지 둘 더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일본에서 봤던 도톤보리 차원문의 경우도, 포위 반경은 더 좁았지만 군인들이 몇 겹으로 포위한 상태였다.

중화기와 바리케이드를 많이 사용하는 미국의 경우도, 중무장 상태의 군인이 적어도 열 명은 배치된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차원문 주위에는 마을 주민 여섯 명이 전부였다.

게다가 전부 노인들.

개중에 젊은 자신이 오늘 밤 불침번에서 빠져 있는 걸 보고 이준기가 오해할까 봐, 청년부장이 말했다.

“저는 어젯밤에 불침번을 서서요. 아이바 영감님 총을 가지고 불침번을 서는 게 접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불침번을 서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 젊은이는 누구야?”

“외지 사람이네··· 아니, 외국인인가?”

“다카키 영감 친척인가? 조선인?”

이준기를 대신해 이장이 대답했다.

“이 젊은이가 오늘 밤 불침번을 도와준다고 하네. 이름이···”

“스즈키라고 불러주세요.”

“스즈키?”

“한국 이름은 발음이 어려워서요. 그냥 스즈키라고 해주시죠.”

“아, 그러지 뭐. 오늘 밤 불침번은 스즈키 젊은이가 도와줄 거야!”

노인들이 웅성거렸다.

“고마우이!”

“고맙군, 젊은이!”

“스즈키, 고마워!”

이준기는 상태창을 통해 차원문 정보를 확인했다.

- 차원문 고유번호 07911. 랭크 C. ‘해적이 될 거야’.

- 차원문 소멸 조건: 해적 두목 사망.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아이템 1개 이상.

- 퇴각 페널티: 1레벨 강등.

혹시나 했지만, 예상대로였다.

20레벨대 구원자 다섯 명만 모이면 하루 만에 깰 수 있는 던전이다.

단지 약자들을 차별하고 괴롭히고 싶어서 차원문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고유번호 07대라니··· 이게 언제적 던전이야?’

살짝 분노가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준기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혹시, 구원자 보신 적 있으세요?”

“엥? 텔레비전에서는 봤지.”

“구원자가 차원문에 진입하면, 그동안은 차원문에서 요괴가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밤은 다들 집에 가서 쉬세요.”

“어··· 그 말은··· 스즈키 상이 구원자라는 얘기?”

“다녀오겠습니다.”

*****

차원문 안쪽으로 들어오자, 친숙한 오두막이 이준기를 반겼다.

차원문 바깥은 지금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이 부는데, 오두막 안은 아늑했다.

손을 대도 뜨겁지 않지만, 오두막 전체를 데우는, 마법의 화톳불이 오두막 한가운데 켜져 있었다.

이준기는 바닥에 거적때기를 깔고 벌렁 누웠다.

‘긴 하루였다. 한숨 푹 자고 나서, 내일 아침 일찍 나서자.’

꿀잠을 자고 나서, 이준기는 눈을 떴다.

오두막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 7시 45분.

힐링 포션과 식량 패키지를 보충한 이준기는 오두막 문을 열고 나왔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파도가 부딪쳐 오는 바닷가 풍경이 펼쳐졌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동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이 섬은 해적들의 본거지다.

그걸 쓸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준기는 술 취해서 혼자 돌아다니는 해적 떨거지 몇 명을 처리하면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역시 사해동포주의의 로망은 해적인가.

온 세상 모든 종족들이 해적질을 하려고 이 섬에 모여 있다.

고블린, 놀, 오크, 오우거, 이그니(Igni).

이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한 팀을 이루고 있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C급 던전에 들어온 38레벨 이준기.

혼자이기는 하지만, 소풍 다녀오듯이 처리할 수 있는 던전이다.

너무 높은 레벨에 들어와서 그런지, 룻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조무래기들을 처리한 후, 이준기는 쉬면서 인벤토리를 체크했다.

중급 힐링 포션 한 개가 지금까지 얻은 전리품의 전부다.

해적들의 본거지는 해안가 동굴 안에 있는 모양.

쉬면서 에너지를 충전한 이준기는 빠른 속도로 적을 해치우며 동굴 깊숙히 나아갔다.

“거기 서!”

“넌 뭐냐?”

문 양쪽으로 나란히 늘어선 놀 경비병 두 마리가 핼버드를 교차해서 이준기를 제지했다.

“너, 내 동료가 돼라!”

“뭐야?”

“내가 곧 너희 두목을 때려눕힐 거거든. 지금 내 동료가 돼주면, 네놈을 2인자 자리에 앉혀 주지.”

“우리 두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해적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넌 내가 처리해 주마.”

“둘 다 덤벼라, 그럼.”

키만 맹숭맹숭하게 큰 놀 두 마리가 엎어지고, 이준기는 유유자적 문을 건너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안쪽으로 이동하니, 커다란 화톳불 단지 앞에 오우거 마법사가 서 있었다.

오우거가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화톳불 안으로 던지자, 파란색으로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잠깐!”

이준기의 외침에, 오우거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뭐냐, 인간? 주제넘게 나를 방해하다니.”

“오렌지색은 아직 던지지 마라.”

“무슨 개소리냐?”

“오렌지색 가루를 넘기면, 네놈은 내가 특별히 살려 주지.”

“하아?”

“죽고 싶으면 덤벼도 좋고. 필요한 건 네 시체에서 챙겨주마.”

오우거 마법사가 화염구를 시전하려고 손을 내밀어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킬을 쓰지 않아 책이 남아도는 이준기.

점멸로 거리를 좁히고 왼손에 쥔 카데쉬로 오우거 손등을 찍었다.

“으어어!”

모양이 잡혀가던 화염구가 찌그러지면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준기는 오른손의 오캄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 부드럽게 반원을 그렸다.

오우거 마법사가 뒤로 넘어지자, 바닥이 울렸다.

“사, 살려줘!”

“항복이냐?”

“그래. 항복한다.”

“오렌지색 가루, 내놔야지?”

“여기 있다. 여기. 가져가라.”

이준기는 오우거 마법사가 건네주는 하얀 주머니를 받아, 열어 보았다.

오렌지색으로 반짝이는 가루가 들어 있다.

이준기는 가루 주머니를 다시 오우거 마법사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일을 두 번 할 필요가 없겠군.”

“무슨 소리냐?”

“금화도 좀 가지고 있겠지?”

“알았다, 알았어. 금화도 주마.”

“아니. 그러지 말고, 금화와 이 가루를 합쳐서 오렌지색 토큰을 만들어라.”

“뭐라고? 왜?”

“이유를 너한테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 세상에는 말야, 네가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지.”

“아, 알았다. 잠깐 기다려라.”

“장난치지는 않겠지? 내 실력은 조금 전에 봤을 거고. 날 화나게 하면 매우, 매우 안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길 것이다.”

“알았다. 나 머리 안 나쁘다. 당장 원하는 걸 만들어 주겠다.”

오우거는 유리 플라스크를 꺼내고, 그 안에 금빛 동전을 넣은 다음 화톳불 위에서 몇 바퀴 돌렸다.

다음에, 커다랗고 투박해 보이는 손으로 그는 조심스럽게 플라스크 안으로 오렌지색 가루를 흘려 넣었다.

그러고 나서 주문을 조금 외고,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플라스크를 돌리고, 또 주문을 외면서 왼손에 쥔 플라스크를 향해 오른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펑 소리와 함께 플라스크가 깨졌다.

“앗뜨뜨뜨···”

오우거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화톳불을 뒤져 오렌지색으로 바뀐 동전을 꺼냈다.

“여기. 여기 있다. 뜨겁다. 조심해라.”

“아까 그 주머니에 싸서 줘.”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이준기는 오우거가 건네주는 흰색 주머니를 받았다.

살짝 펼쳐 보니, 오렌지색으로 예쁘고 균일하게 도금이 된 금화가 반짝 빛났다.

“고맙군, 오우거.”

“잘 가라, 인간.”

*****

오우거의 실험실을 지나, 동상이 양쪽으로 늘어선 복도를 지나니 동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방이 나타났다.

거대한 돌문이 갑자기 움직여 방으로 통하는 입구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눈앞에 자그마한 고블린이 펜싱 검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난, 스와타쿠스 백작이다. 네놈은 뭐냐?”

“백작? 귀족이 해적 두목 호위 알바라도 하고 있다는 얘기냐?”

“귀족은 무슨. 스와타쿠스 백작, 그게 내 이름이다. 한덩어리란 말이다.”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해 두지. 저 문은 어떻게 열어야 하지?”

“날 쓰러뜨리면 저절로 열린다.”

“그래? 꼭 널 죽여야 하나?”

“날, 쓰러뜨리면 된다.”

이준기는 오른손에 든 오캄을 치켜올렸다.

스와타쿠스 백작은 펜싱 검으로 이준기의 오캄을 가로막으려 했다.

이준기가 계속해서 오캄을 위로 올리자, 고블린은 팔을 계속 위로 올리다가 뒤로 발랑 넘어져 버렸다.

동시에, 육중한 돌문이 옆으로 밀리면서 방안으로 들어갈 통로를 만들었다.

“잘 지내라구. 요즘은 왠지 고블린이 좋아져서 말야. 죽이질 못하겠네.”

“으으으··· 내가 졌다. 날 쓰러뜨리다니.”

고블린은 잠깐 고개를 들어 방안으로 들어가는 이준기를 바라보더니, 이내 머리를 바닥에 내리고 큰 대자로 늘어졌다.

“오늘 일은 다 했다구. 이게 한계야.”

*****

커다란 방안의 한쪽으로는 계단이 몇 개 있고, 그 위쪽으로 거대한 석제 의자가 자리해 있었다.

이준기가 다가가자, 앉아 있던 이그니가 일어났다.

그가 두른 누더기 조각 사이사이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붉은빛의 종족, ‘이그니’다.

두건 아래의 두 눈이 붉게 빛을 발하면서, 그는 말했다.

“나는 그 이름도 빛나는 해적, 우피샹테다. 감히 나에게 도전하려 하다니··· 내게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영광을 네게 주겠다.”

“글쎄? 그런 영광은 별로 받고 싶지 않군.”

“묘비명이 필요 없다는 거냐? 불쌍하고 주제 파악 못 하는 바보 인간 놈이라고 써주랴?”

“그렇게 내 이름이 궁금하다면, 이야기해 주마. 일본에 왔으니, 내 이름은 스즈키다.”

“일본? 일본이 뭐냐?”

“언제나, 나도 그게 궁금했지. 지구와 이 공간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말야. 보아하니, 너도 그런 건 모르는 것 같군.”

“뭐라고 혼자 떠드는 거냐. 덤벼라.”

이준기가 양손에 무기를 쥐자, 해적 두목도 양팔 끝에도 무기가 나타났다.

그가 입은 누더기의 모양으로 보아 양쪽 팔이 있어야 할 위치에, 붉은빛의 쐐기 두 개가 모양을 드러냈다.

양손에 검을 들고, 이준기가 다가섰다.

붉게 빛나는 두 개의 쐐기는, 누더기의 양쪽 측면에서 정면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두 개의 쐐기가, 이준기가 휘두르는 두 개의 검날을 하나씩 맞받아쳤다.

왼손 무기, 카데쉬를 맞받아친 쐐기의 모양은 원래 그대로였지만,

오른손의 무기, 오캄을 막아선 쐐기의 모양은 원래보다 길게 늘어져 있었다.

숏소드인 오캄의 길이에 맞춘 것이다.

양손에 힘을 줘 해적 두목을 뒤로 밀치고, 이준기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다시 봐도 즐겁군. 정말 멋진 장치야.”

“멋지기만 한 게 아니다. 곧 너를 죽일 테니까.”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넌 내 상대가 안 된다.”

“너에게, 세상은 참 좁구나.”

이준기는 다양한 자세로, 여러 방향에서 칼날을 휘둘러 이그니를 공격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몸 주변을 떠도는 두 개의 쐐기는 공격을 정확하게 막아냈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처럼.

“재미있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너는 모르겠지만, 이그니.”

“재미? 한 번도 공격을 성공하지 못한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나도 시간이 무한정 있는 건 아니라서 말야. 이제 끝내주겠다.”

“글쎄? 지금까지 못 한 걸 갑자기 할 수 있을까?”

“노는 시간은 이제 끝났거든.”

이준기가 다시 해적 두목 이그니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그니는 여유롭게 두 발로 버티고 서서 방어 준비를 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반보 정도로 좁혀졌을 때, 이준기는 오른손의 오캄을 가볍게 공중으로 던졌다.

그리고 칼날이 뒤를 향하도록, 검의 방향을 바꿔 쥐었다.

그에 맞추어, 이그니의 쐐기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그니의 누더기 외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곳에서, 붉은빛이 마치 포도주처럼 쏟아져 나왔다.

누더기 외투와 두건이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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