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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3: 천리행 (4)
Episode 33: 천리행 (4)
홋카이도다.
산기슭이지만, 간간히 자동차 소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다.
길까지 걸어가면 될 듯.
휴대폰을 열어 지도를 확인해 보니 가장 가까운 도시 이름은 오타루.
삿포로에서도 그렇게 멀지는 않다.
휴대폰 배터리가 아슬아슬해서 앱은 죄다 꺼 두고 에너지 절약 모드로 해 두었다.
GPS나 와이파이는 당연히 껐다.
배터리도 문제지만, 추적당할 수도 있으니.
낙하산을 펴는 데까지는 문제없었다.
하지만 낙하산에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
바람이 통하면서 구멍이 점점 커졌고, 균형도 점점 무너졌다.
이준기는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 ‘점멸’을 시전했다.
다행히, 산기슭에 나무가 드문드문 있는 곳으로 착지 성공.
비행기 문을 열고 자객 우두머리는 모두 세 방을 총알을 쏘았다.
처음 두 발은 빗나갔지만, 마지막 한 발이 낙하산 가방에 직격했다.
아무리 그래도 등에 진 짐에 맞았으므로, 이준기는 저절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보고 그들은 이준기 본인이 총알에 맞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착지 후에 낙하산을 체크해 보자, 생각보다 구멍은 작았다.
그래서 한참 동안이나 안정적인 속도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날씨가 흐리기는 하지만, 그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누가 보았을 수 있다.
그게 가장 문제였다.
비행기에서 탈출한 시점부터 이미 수배령이 내려졌을 터.
‘오후 네 시에, 하늘을 보고 있을 만한 사람. 이 겨울에 말이지.’
영하 17도의 강추위로 인해, 적어도 그의 시야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단풍도 다 떨어진 겨울 산.
설산으로 유명한 홋카이도지만 눈은 아직인 모양이었다.
재킷을 입고 뛰어내리기는 했지만, 이런 겨울 날씨를 바깥에서 오래 견디지는 못할 것이다.
이준기는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야구모자를 꺼내 썼다.
모자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유명세를 탄 다음에는 모자를 즐겨 썼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한 세계, 예전에는 모르던 세계다.
산기슭을 내려와 차도를 발견하고 따라 걸었다.
구원자의 우월한 스펙으로 인해, 걷는 속도가 시속 7킬로미터는 나온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사람 사는 곳이라면, 그를 찾아 나선 일본 협회의 끄나풀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차에 치일 수도 있으니, 이준기는 차도 바깥쪽으로 두 걸음은 나가서 걸었다.
인도가 따로 있는 곳이 아니라서 길이 매우 엉망이었다.
이따금씩 차가 지나갈 때마다, 손을 휘저어 보았지만, 히치하이커를 위해 차를 세우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거다. 이준기라 해도 히치하이커를 태우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의 불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도시 외곽 정도라면 괜찮겠지. 오늘 잠자리도 해결해야 하고. 이동 수단도 확보해야 한다.’
뒤쪽에서부터 자동차 불빛이 다가왔다.
히치하이킹은 이미 포기한 상황. 이준기는 그냥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차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정지했다.
“태워 드릴까요?”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이 묻어나는, 여자 목소리였다.
*****
“어디 가세요?”
운전자가 이준기에게 물었다.
“니, 니홍고··· 조, 조또다케···”
일본어는 조금밖에 모른다고, 이준기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도. 코. 이. 마. 스. 카?”
운전자는, 일본어 교본에 나올 것 같은 문장을 천천히 다시 말했다.
그러나 이준기는 여전히 못 알아듣는 척했다.
“와··· 와카리마셍. 스미마셍.”
일본 협회는 사람들을 동원해 이준기를 찾고 있을 게 틀림없다.
죽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살아 있을 경우를 염두에 두고 수배령을 내렸을 것이다.
구원자협회의 권력을 생각하면, 경찰의 협조 정도야 쉽게 얻어낼 것.
차를 얻어타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경계를 풀 수는 없다.
운전자는 다시 이준기를 돌아보며, 단 두 음절을 크게 분명하게 말했다.
“도코?”
“도··· 도코?”
“Where are you going?”
“Ah! I am sorry. I was on my way to··· Otaru City.”
영어로 말이 통하자, 운전자는 이준기가 일본어를 모른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이 여행자는 수배 중인 그 자가 아니라는 건가? 아쉽게 됐군.”
“What?”
“Nothing. Sorry. So··· Otaru··· where?”
“I can take bus at Otaru. Please drop me anywhere inside the city.”
“OK.”
여자는 곧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네, 접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전화드렸어요. 네. 지금 제 차에 타고 있어요. 생김새도 한반도 사람인 것 같고, 우리말을 거의 못 합니다. 아, 그래요? 그럼 어떡하죠? 그럼 일단 가까운 파출소로?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에 꽤 집중을 한 모양.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운전자는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아챘다.
*****
‘오늘은 던전 바깥에서 스킬 쓰는 날이군.’
점멸 스킬로 차 밖으로 탈출한 이준기.
조금 편하게 이동하려고 했다가 적의 그물에 정확하게 걸려들었다.
운전자가 그를 어디로 데려가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가려고 했던 오타루 시에서 오히려 멀어져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차도를 피해서 이동한다.’
이준기는 산길을 걸었다.
액션 활극을 잠깐 벌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내내 앉아 있기만 한 터여서 에너지는 넘친다.
단지, 어두운 곳에서 길을 잃을까 두려워졌다.
‘잠깐만 다시 지도를 확인해 보자.’
남은 배터리는 2%.
다행히 머지않은 곳에 마을이 있었다.
마을 이름을 딴 신사도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이기는 하지만, 이걸 넘어야 한다는 건데.’
숨이 차지는 않았지만, 추위는 조금씩 그를 조여오고 있었다.
지도에서 본 바로는 3, 4킬로미터 정도만 걸으면 된다.
산길이기는 하지만 그 편이 낫다.
차도로 우회하려면 5킬로미터 이상 걸어야 하고, 추적자들의 시야에 노출될 수 있으니.
그믐달이기는 해도, 달빛은 없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튀어나온 바위, 부러진 나뭇가지를 피해서 걷기에 충분한 빛을 내려주었다.
어둠에 적응이 된 눈은 그믐달의 미미한 달빛만으로도 발 디딜 곳을 충분히 찾아 주었다.
‘아아, 이런 걸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산등성이 꼭대기까지 다 오르기도 전에, 전방이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몇 발자국 더 오르고, 이준기는 멀리서 자신을 반기는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희푸르게 빛나며 시계방향으로 소용돌이치는 빛 덩어리.
차원문이었다.
*****
차원문은 군경이 지키고 있을 터.
이준기는 마을 외곽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접근했다.
낡아 빠진 간판을 가로등이 비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든 세트장 같은 모습이었다.
‘구로다 상회.’
미닫이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가게 안쪽의 방문이 열리면서, 할머니 얼굴이 바깥을 내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슈.”
도로에서 자동차를 얻어 탔을 때는 일본어를 못하는 척했지만, 이준기의 일본어는 수준급이다.
대학교 재학 당시 일본 관련 출판사에서 통번역 업무를 했을 정도니까.
단지, 그의 외모는 일본인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편의점도 아니고, 시골 마을 구멍가게라서 파는 물건은 별 볼 일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간단한 요기 거리, 그리고 정보를 얻으러 들어온 것이니까.
이준기는 생수와 초콜렛, 과자 따위를 챙겨 들고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지갑에는 만 엔짜리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최정윤 매니저가, 일본 출장이라면 현금을 챙겨야 한다면서 준비해 준 것이다.
“어이구, 큰돈이네. 거스름돈이 있나 몰라···”
그렇게 말하면서 할머니는 철제 금고를 열고 잔돈을 세기 시작했다.
“다섯, 여섯, 일곱. 됐군. 자, 여깄소. 그런데, 이런 데는 어쩐 일로 오셨수? 외국인 맞죠?”
“네.”
“한국인?”
“네. 맞습니다.”
“여기, 친척이라도 있는 거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수만···”
“친척요?”
“우리 마을에는 조선 사람들도 좀 있으니까 물어봤수. 신경 쓰지 마쇼.”
가게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턱에는 신발 여러 켤레가 나란히 정돈되어 있었다.
남자 운동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할머니 혼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밤중에 할머니 혼자 계시는 거예요?”
“그러게 말요, 젊은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영감은 오늘 밤 당번이라서···”
“당번요?”
“그래요, 당번. 그러니까 그게 뭐라고 하더라··· 차··· 차원문? 그거 지키러 갔소.”
“차원문을 지키다뇨?”
“차원문 지키는 군인들은, 저녁때 되면 퇴근해 버리거든. 그래서 밤중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걸 지키고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서 못된 요괴들이 나와서 닭, 소도 잡아가고 사람도 죽이고 하거든··· 차원문이라고 알지, 젊은이?”
“네, 네. 물론이죠. 그런데 그걸 왜 마을 사람들이···”
“왜긴 왜야. 이 마을 사람들 따위,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
“네?”
*****
할머니가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동안 불침번을 서주겠다는 외지 젊은이가 있다는 말에, 이장은 반색을 하며 사람을 보냈다.
혹시 경찰이 있냐는 말에, 할머니는 요강에 가래침까지 뱉으며 욕을 했다.
“경찰 놈들이 여기 왜 있겠어? 점심 때쯤 되면, 읍내에서부터 온 오토바이 두 대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가기는 하지만, 그냥 그것뿐이야. 우리 마을은 버려진 마을이야. 원래부터 그랬지.”
부라쿠민.
말하자면 고려 시대 향, 소, 부곡 같은 천민 거주 지역에 사는 사람들.
홋카이도는 에도 막부 막판에나 개척되었으므로, 부라쿠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홋카이도라면, 아이누의 고향.
게다가 개척 시대에 건너온 가난한 사람들의 후예도 있고, 그중에는 조선인도 있다.
공식적으로 동화지역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같은 취급을 받는 동네인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면서, 이장이 설명해 주었다.
“아이누도 있고, 본토에서 건너온 부라쿠민 후예도 있고, 조선인도 있고···”
“그래서, 차원문을 마을 사람들이 지켜야 한다고요?”
“저 차원문이 생긴 게 얼마나 됐더라? 이제 거의 1년이 다 돼가는 것 같은데··· 처음 저게 생겼을 때도 참 추운 날씨였지. 처음에는 낮 동안에도 우리가 지켜야 했어.”
“네?”
“처음에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구. 하루에 한 번, 읍내 파출소에서 마을 순찰을 한 번 도는데, 그때도 그냥 지나쳐 가더라고. 우리 마을에는 젊은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미토 할머니 댁에 놀러 온 손자 녀석이 그걸 보고 차원문이라고 해서 알았지.”
“아니, 그럼··· 괜찮았습니까? 마을에 피해가 없었나요?”
“왜 피해가 없었겠어. 고블린인가 뭔가 하는 요괴가 나와서 마을을 아주 헤집고 다녔지. 개나 닭이 죽을 때까지는 경찰서에 신고해도 꿈쩍도 하지 않더니, 사람이 죽으니까 그때 군인들이 처음 오더군. 그 요괴 놈도 총으로 쏘니까 죽더라고. 그래서 그게 끝인가보다 했는데.”
“···”
“그게 끝이 아니었지. 요괴가 계속 나오더라고. 처음에는 군인이 많이 왔어. 한 20명 정도? 차원문 주위에 바리케이드 같은 걸 치고 총 든 군인들이 지키니까 든든했지. 그런데 한 일주일 지나니까, 경비 서는 군인들 숫자도 반으로 줄이고, 게다가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하겠다고 가버리더라고. 그러면서 아침 9시까지는 마을에서 알아서 하라고···”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협회는요? 아니, 구원자, 구원자라고 아시죠?”
“그럼, 알지. 마을 한복판에 차원문이 생겼는데, 마을 사람들 전부 그게 뭔지 공부는 했지. 구원자 협회라는 게 있다고 해서, 거기에도 연락을 했어. 도와달라고. 그런데 전국에 차원문이 하도 많아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1년이 되도록 기다리셨다고요?”
“그렇지. 아직도 기다리는 중이야. 자꾸 전화를 하니까 신경질을 내는 것 같아서, 요즘은 전화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안 해. 여기 마을 특산물이라고 버섯이랑 전갱이랑 이쁘게 포장해서 협회 사무실에 보내기도 여러 번 했지만, 매번 같은 얘기만 해. 순서대로 처리해야 하니까, 기다려야 한다고.”
“협회 사무실에는 안 가보신 거예요?”
“왜 안 갔겠어. 마을 대표단을 꾸려서, 도쿄로 갔지. 협회도 찾아가 보고, 무슨 인권 단체에서 도와줄 거라고 해서 거기도 갔는데. 별 소용이 없었어. 그 협회라는 게 아주 대단한 조직이라고 하더라고. 정부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지.”
“지금은 누가 지키고 있습니까? 총 가지신 분 있는 거예요?”
“오늘 밤은, 아이바 영감이 엽총 들고 지키고 있지. 대대로 사냥꾼인 집안이라서, 총은 잘 쏘거든. 지난여름에 튀어나온 요괴도 아이바 영감이 잡았지. 아이바 영감이 있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아이바 영감이 매일 밤 차원문을 지키고 있을 수도 없으니 그게 문제지. 이틀에 한 번은 영감 엽총을 빌려서 다른 사람이 그냥 불침번을 서는 거야.”
이준기는 밥그릇을 내려놓고, 잘 먹었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겠습니다. 안내해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