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92화 (9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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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3: 천리행 (3)

Episode 33: 천리행 (3)

저녁 뉴스에 어이없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시리즈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

“한국 랭킹 2위 구원자, 이준기 씨가 오늘 오후, 비행 중이던 비행기에서 추락, 실종됐습니다. 한중일 연합 공격대 참가를 위해 전용기 편으로 오키나와를 향해 이동 중이었던 그는, 승무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문을 열고 바깥 경치를 구경하다고 했다가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상덕은 구라모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공한 거군요? 그렇죠?”

“그렇게 보고 받았네.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걸 총으로 맞혔다고 하니까, 틀림없겠지.”

“아하하! 감사합니다, 회장님!”

“은혜를 잊지 말라고.”

“그럼요, 그럼요! 회장님! 이번 은혜는 꼭, 꼭 갚겠습니다!”

문아린은 뉴스를 보고 멍해졌다.

문득 자기 몸이 자기 몸 같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라든가, 익숙한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들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머리가 너무 아프더라니. 몸이 안 좋은가 보다. 한숨 자고 나면 나아지겠지.’

문아린은 초저녁부터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마다, 온갖 기괴한 모양의 추상 도형들이 시야를 맴돌았다.

‘아아. 이거 뭐지. 이거 뭘까. 빨리 내일이 와야 할 텐데.’

길수연도 멍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해운대’ 던전에서 성나린이 눈앞에서 추락해서 죽는 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단지 뉴스를 들었을 뿐이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길수연은 혼잣말을 했다.

“왜 이래. 주책이네. 죽은 게 확인된 것도 아닌데.”

그러나 머릿속에 자꾸 떠올랐다.

크리스마스이브,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던 이준기의 모습이.

저녁 뉴스는 이준기 추모 특집 방송이나 다름없었다.

이준기의 생전 모습이 반복해서 상영되고, 이준기의 프로필 사진, 그리고 이준기의 그간 전적이 반복해서 소개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자들이 이준기의 가족들을 찾아가지 않은 것이다.

구원자가 사망했을 때 그 유족들을 인터뷰하지 못하도록 한 ‘구원자 사망 취재 특별법’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는, 구원자 유족의 가슴을 찢어놓는 취재 행태는 비일비재했었다.

특별법 제정이 될 때까지 차원문 정리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면서, 구원자들은 협회를 통해 국회를 압박했다.

한국의 사례를 보고 세계 많은 나라에서 구원자들은 비슷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다른 많은 구원자들과 마찬가지로, 한상태 역시 자기 집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저녁 운동 시간에 뉴스를 듣는 것은 그의 일과.

트레드밀 위를 계속 뛰면서, 그는 틀어놓은 뉴스에 계속해서 집중했다.

“이준기 구원자라면, 현재 랭킹 2위의 실력자 아닙니까? 어쩌다가 이런 일이...”

“네. 한국 길드협회에서도 애도 성명을 냈습니다. 이준기 구원자는 길드 소속 없이, 무소속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협회와 고용 계약이 되어 있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협회에서 파견하는 형식으로 수많은 차원문을 클리어했는데요. 이번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게 됐습니다.”

“한국 구원자 계 전체로 보더라도 큰 손실 아닙니까?”

“네,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랭킹 2위, 그러니까 이준기 구원자는 이상덕 협회장 다음으로 높은 레벨이었고요. 무엇보다도 각성한 지 겨우 넉 달 만에 38레벨에 도달한, 말하자면 천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죠. 빠른 렙업으로는 세계 기록이죠?”

“말씀하신 대롭니다. 단기간 레벨업 관련해서는 비공식 세계 기록입니다. 비공식인 이유는 구원자 레벨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방법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공식 기록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구원자가 사라져서, 차원문 관리에도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팬덤도 상당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우리나라 내부의 팬덤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큰 규모의 팬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실력으로 팬덤이 급성장했는데요, 비슷한 경우로 미국의 조슈아 테일러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준기의 레벨업 속도는 테일러 씨는 물론 다른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으니까요.”

“팬들의 충격이 클 것으로 예상되네요.”

“아직 사망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팬덤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후··· 팬덤이라.’

한상태는 숨을 가쁘게 내쉬는 와중에 코웃음을 쳤다.

목숨 걸고 몬스터와 싸우는 직업에 팬덤이라.

애들 장난이다.

뉴스 앵커는 자세를 바로 잡으면서 새 화제를 꺼냈다.

“이번에 이준기 구원자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묘한 이야기가 떠돈다고 합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네. 말씀하신 대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2위의 저주’라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2위의 저주요?”

“네. 그렇습니다. 지난 9월, 랭킹 2위였던 권영호 구원자가 사망한 이후, 랭킹 2위에 있던 구원자들이 차례로 사망했습니다. 10월에 고성하, 11월에는 전용택 구원자가 사망했는데요, 모두 사망 당시 랭킹 2위였습니다. 이번에 이준기 구원자가 사망함으로써, 4개월 연속으로, 랭킹 2위 자리에 있는 구원자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우연이라고 봐야겠죠?”

한상태는 트레드밀을 뛰면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 별 시답지 않은 얘기를··· 공중파 9시 뉴스에서··· 뭐 하는 거야.”

한상태는 멈춤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면서 수건에 땀을 닦았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한상태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

비행기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주유를 하고, 다시 규슈로 회항을 시작했다.

비행기에는 당초 탑승 인원에서 이준기 한 명을 제외한, 11명이 타고 있었다.

두 손을 뒤로 결박당한 린핑 루에게, 자객단 우두머리가 말했다.

“린핑 루 님. 규슈에 도착하면, 경찰 조서를 작성하시게 될 겁니다. 그 후에 풀어드리죠.”

“무슨 경찰 조서? 네놈들 더러운 짓거리에 협력할 내가 아니다!”

“그건··· 지금 장담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난 공안 소속 특수요원이다!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하하하. 린핑 루 상은 정말 순진하시군요. 국가 간 중대사에 한 사람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그럴 거 같아? 그건 겉으로만 민주주의인 너희 일본에서나 그런 거야!”

“과연 그럴까요? 한번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린 우두머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등을 돌려 린핑 루를 쏘아보았다.

“떳떳하게 죽느니 비겁하게라도 사는 게 낫지 않아요? 우리 입장에서는, 살아 있는 당신보다는 당신의 시체를 처리하는 게 훨씬 더 간단합니다.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뱀 같은 눈초리를 보자, 린핑 루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우두머리는 그 표정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세요. 피차 편해질 겁니다.”

린핑 루는 옆을 돌아보았다.

이준기가 앉았던 자리에, 일본인 패거리 중 한 명이 앉아서 권총으로 복도 건너편의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최정윤 매니저가 서울지방경찰청을 찾았다.

주민증을 맡기고 방문증을 발급받으면서, 그녀는 물었다.

“외사과, 외사과가 어디죠?”

안내 데스크의 설명을 듣고, 최정윤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출근 시간대라서 사람들이 잔뜩 올라탔다.

모두들 엘리베이터 내의 작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준기 구원자 실종. 한국 구원자 계 큰 손실.

- 오키나와행 항공기에서 추락. 생존 가능성 거의 없어.

- 오키나와 차원문 정리 위해 파견되었다가 사고당해. 다른 나라 원조 필요성에 대한 의문과 비난 가중.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쯧쯧. 구원자 목숨 파리 목숨이라는 게 맞는 말이지.”

“화려하지만, 허망하구나!”

“랭킹 2위면 뭐해요. 가족들만 불쌍하게 됐네. 결혼은 했대요?”

“아니, 이준기 구원자 팬카페 회원이 얼마나 되는데 그런 말을 하세요? 하긴, 그 카페들 다 이제 문 닫겠네.”

“다른 여자 구원자들과 스캔들이나 뿌리고 다니더니. 참, 꼴 우습게 됐네요.”

마지막 발언에, 최정윤은 울컥하는 걸 삼키지 못했다.

“뭐라고 하셨어요? 스캔들이라뇨? 증거 있어요?”

“아, 아니? 이 여자가 왜 이래?”

“이 여자라뇨! 사과하세요! 죽은 사람 뒷전에 대고 막말하니까 좋아요?”

“아··· 뭐라는 거야···”

막말을 했던 사람을 향해 다른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망발이에요.”

“이준기한테 돈 빌려주고 못 받기라도 했어요?”

“고인 능욕이네. 그렇게 막말을 하면 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 사람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에 닦으며 황급하게 내렸다.

*****

외사과가 아니라 외사국이었다. 생각보다 컸다.

최정윤이 도착하자, 안내 데스크로부터 연락을 받은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민경수라고 합니다.”

“저는 최정윤입니다. 이준기 구원자 매니저예요.”

“네. 안내 데스크에서 연락을 해왔습니다. 걱정이 많으시죠?”

“뭘 어떻게 해야 하죠? 실종자 접수는?”

“일단 저기, 제 자리로 가시죠. 물 좀 드릴까요? 아니면 커피라도?”

최정윤은 고개를 내저었다.

민경수는 최정윤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종 신고는 이미 접수되었습니다. 지금 일본 경찰 쪽과 연락해서 수색 중입니다.”

“네? 수색 중이라고요?”

“어제 이미 협회 쪽에서 실종 신고를 해왔어요. 원래 실종 신고는 가족이 해야 하지만, 구원자 업무는 공무로 보고 있기 때문에, 협회 측 신고로 경찰이 일단 사건 접수를 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뭔가 발견된 것이 있나요?”

“어제 오후 늦게 접수돼서. 일단 일본 측에서도, 비행기에서 추락한 그 시점부터 수색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바다 위에서 실종된 거라서, 수색에 어려움이 있죠, 아무래도···”

“어떻게 생각하세요? 형사님은?”

“그, 글쎄요···”

“형사님은 이런 사건을 많이 다뤄보셨을 것 아녜요. 살아 있겠죠?”

“진정하시고요. 일단 일본 측 수색 결과를 기다려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좀 해주세요!”

최정윤이 민경수의 소매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 그게··· 아무래도 비행기 사고는···”

그때, 지나가던 다른 경찰 직원이 민경수를 제지하면서 말을 가로챘다.

“비행기 사고는 변수가 많습니다. 살아 계실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요. 일단 기다려 보죠.”

*****

“어떻게 됐습니까, 그··· 중국인 구원자는?”

“지금 조사실에서 잠깐 쉬고 있어. 의외로, 순순히 협조하는 분위기인데.”

“중국 랭킹 2위라더니, 별수 없군요.”

“당연히 별수 없지. 구원자라고 총알이 안 박히는 것도 아니고.”

“별 문제 없겠죠?”

“아버지가 당 간부라는 말이 있어서, 조금 긴장했는데 말야. 다 뻥이더라구. 간부는 얼어 죽을.”

“거짓말···이었다고요?”

“양민이야, 양민. 증조할아버지가 부농이었기 때문에 출신 성분 자체가 아주 안 좋다는군. 저 여자는 그저 자기 실력 하나로 저 자리까지 올라온 거지.”

“대단하네요. 어떤 의미에선···”

“자기 실력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까지 어렵게 쌓아 올린 커리어를 난생처음 본 외국인 인권을 위해 희생한다?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 저 여자는 그저 대단히 상식적인 선택을 하는 거라고. 게다가 뇌물도 준비해 놨지.”

“뇌물요?”

“전일본공수에서, 세계 일주 10회권이던가? 뭐 그런 걸 협찬해 왔다는데? 햐··· 부럽다. 세계 일주 1회권이라고 해도 부러워 죽겠는데, 10회권이라!”

“돈도 아니고 그런 걸로 뇌물이 될까요?”

“전문가 말에 의하면, 그런 게 더 잘 먹힌다고 하더라고. 받는 사람도 딱히 뇌물이라고 생각 안 하고, 그냥 선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양심은 깨끗하다고 믿는다는 거야.”

“하긴, 그렇겠군요. 저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어요.”

“인간이란 건, 얄팍한 거야.”

“죽은 사람만 안 됐네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죽은 놈은 뼛속까지 반일 감정으로 가득 찬 아주 양아치 새끼였다는데!”

“아··· 죄송합니다. 죽은 놈이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어요.”

“보안부서까지 와서 이 사람이 왜 이래? 여기서 성공하려면 매 순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돼! 잠깐만 실수했다가는 그냥 탈락이라고! 힘들게 여기까지 온 사람이 왜 이렇게 흐리멍덩해!”

“죄, 죄송합니다.”

“조금 후에, 후미에 경감이 조서 작성하러 들어갈 테니까, 같이 들어가서 도와줄 것 있으면 좀 도와줘. 자네 인상이나 성격으로는 영 미덥지 못하지만 말야. 자네 얼굴 보고 누가 겁을 먹겠어?”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과만 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흐리멍덩하다는 거야.”

“네, 넷! 똑바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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