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90화 (9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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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3: 천리행 (1)

Episode 33: 천리행 (1)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후쿠오카 공항에 나와 있던 일본 협회 관계자들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광경이지만, 직접 당사자가 되니 당황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같이 고개를 숙이면서 괜찮다고 말하느라 진땀을 뺐다.

VIP 라운지로 자리를 옮기자, 일본 측 사람들이 배경 설명을 시작했다.

“여긴··· 황족이거나, 장관급 이상이나 돼야 구경이라도 가능한 곳입니다. 구원자들이 장관급이라는 얘기죠. 아니, 구원자들이라고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광이군요.”

고까워서 그런지, 이준기의 말투가 저절로 비꼬는 투가 되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영광이죠. 이준기 상, 먼 곳까지 와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커피, 있나요?”

“아, 커피! 물론 있습니다. 뭘로 드릴까요? 커피도 있고 홍차도 있습니다. 쿠키도 있고 감자칩도···”

“제가 직접 가져다 먹어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이준기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커피 메이커와 각종 먹을거리가 진열된 선반 쪽으로 갔다.

VIP 라운지라는 설정이 아니라면, 편의점 수준의 먹을거리에 혹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니, 뭐라도 먹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슈까지 오는 비행기에서 점심을 먹었지만, 간식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접시에 과자를 잔뜩 담아온 이준기를 보며 일본 측 사람이 말했다.

“오키나와에 도착하시면, 만찬이 있습니다. 교토식 가이세키로 제대로 준비했습니다.”

“밥은 밥이고, 간식은 간식이죠.”

“하하.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배경 설명을 하신다면서요?”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네. 설명드리겠습니다. 하필이면 차원문이 오키나와 공항, 그것도 활주로에 생기는 바람에요, 지금 오키나와 공항은 완전히 폐쇄된 상태입니다. 주변의 작은 공항들을 이용해서 민항기를 이착륙시키고는 있지만, 운행 편수가 원래의 10분의 1로 감소한 상태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이번에 한국과 중국에서 오시는 분들은 저희가 전용기로 모시고 있습니다. 사설 공항을 빌려 쓰는 거라서, 전용기로 하는 편이 나아서요. 작은 비행기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편하실 겁니다. 자리도 넓고요.”

“전용기를 다 타보는군요.”

“하하. 만족하실 겁니다.”

“전용기에는 몇 명이나 타게 됩니까?”

“조종사, 승무원 포함해서 모두 열두 분 타게 되십니다.”

“혹시, 좌석 배치도라든가 그런 게 있나요?”

“아아. 죄송하게도 그런 건 없습니다.”

“비행기 사고라도 나면, 비상구가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해서 여쭤봤습니다.”

“최대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물론, 비상구 위치도 탑승 후에 안내해 드립니다.”

이준기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여전히 VIP 라운지에는 그들뿐이었다.

‘하긴, 이렇게 좁은 장소에 사람들이 더 오면 그것도 문제지.’

이준기가 물었다.

“중국 분들은, 언제 오십니까?”

“한 분은 이쪽으로 오시고, 다른 분들은 대만 경유해서 오키나와로 오십니다.”

“한 분은 이쪽으로 오시는군요?”

“네. 린핑 루라는 여자분이신데. 지난주부터 일본 여행 중이십니다. 그래서 후쿠오카로 오시는 거고요.”

“아아, 그렇군요. 저도 여행이나 좀 할 걸 그랬네요.”

“차원문 정리 끝내시고 여행을 좀 하시죠. 협회 쪽에서 관광 일정을 잡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차원문 정리 끝내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까요.”

“와이번 전문가이신 이준기 상이 오셨으니까, 순조롭게 클리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전문가라뇨. 별말씀을. 그래서, 여기로 오시는 중국 분은, 저와 함께 가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럼 비행기에는 저랑, 중국 분이랑, 조종사는 두 분?”

“네. 조종사 두 분에 승무원 세 분. 그리고 일본 협회에서 다섯 분. 이렇게 모두 열둘입니다.”

“일본 협회 분들은 모두 구원자들이시고요?”

“아뇨. 일본 측 구원자들은 이미 오키나와에 집결해 있습니다. 함께 탑승하는 일본 협회 쪽 사람들은 행정요원들입니다. 브리핑도 비행기 안에서 드릴 거고요.”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

린핑 루가 도착했다.

역시 일본 협회 측 접객 요원들이 그녀를 구름같이 둘러싸고 VIP 라운지로 들어왔다.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린핑 루 본인과 단 한 사람만 라운지 안에 자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이준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린핑 루예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길수연, 헬렌 카자크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최후의 6인’ 멤버이자 예전의 동료, 린핑 루다.

키는 조금 작지만, 중국 인형 같은 외모로 세계 구급 인기를 몰고 다니는 구원자다.

외부로 나오는 정보가 통제되는 중국 출신 구원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팬덤은 헬렌 카자크와 조슈아 테일러에 버금간다는 말이 있다.

이준기는 ‘이르헬의 눈’을 발동해서 그녀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 42레벨.

- 전문화: 불 22, 물 18, 마나 2.

- 힘 40. 민첩 40. 체력 75. 정신력 90. 물리 저항 20. 마력 저항 40.

- 성흔: 샨티라의 거울.

- 획득 스킬: 도깨비불, 옥시모론, 플레임 스트라이크, 화염 정령 소환, 물의 정령 소환, 하이드로펌프.

- 인벤토리: 파이어 스타터, 제갈 연노, 강화 쇠뇌 20개, 빙점, 서궁 서클릿, 마나 회전 장갑, 곤두운, 응급 주사 키트, 상급 힐링 포션 4개, 중급 힐링 포션 6개, 기본 식량 팩 4개.

중국 랭킹 2위의 린핑 루.

레벨도 레벨이지만, 획득 스킬, 그리고 장비까지도 화려하다.

중국 공산당에서 체계적으로 지원한다는 말이 사실인 듯.

중국 정부에서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구원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이 넘게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는 이유는, 집안 배경이 엄청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2021년 12월 현재 그녀의 포지션은 누커.

헬렌 카자크나 권영호, 박충기와 마찬가지로 대미지를 쏟아붓는 역할이다.

아직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

나중에 이준기 팀에 합류한 후로는 헬렌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그녀 자신도 충분히 누커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팀의 전체 효율을 생각해서 보조 역할로 물러난 것이다.

“어딜 보더라도 헬렌이 누커를 하는 게 맞지. 재능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말하고는 했지만, 그녀가 헬렌에 대해서 가지는 감정은 건강한 승부욕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헬렌에게 ‘하이드로펌프’를 걸어주는 순간, 전장에는 적막한 기운까지 감돌았다.

하이드로펌프 버프를 받은 헬렌은 언제나 상식을 초과하는 대미지를 뿜어냈다.

자리에 앉아 이준기와 린핑 루는 덕담을 나누었다.

“린핑 루 님은 물과 불 전문화라고 들었습니다. 화력, 기대하겠습니다.”

“이준기 님 명성이야말로 귀가 아프게 들었어요. 한 수 가르침 받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보다 레벨이 한참 높으신데.”

“한 달만 지나면 저보다 더 레벨이 높아지실 거잖아요?”

중국 공안이라면 그 정도 정보쯤은 실시간으로 확보하고 있을 터.

그게 아니더라도 국가별 구원자 랭킹 정도는 인터넷에도 떠도는 정보다.

더구나 차원문 공략을 함께하게 된 사람이라면, 외국인이라고 해도 미리 정보를 검색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자신에 관한 정보가 너무 널리 알려져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준기는 조금 불편했다.

빠른 렙업과 실력 향상도 중요하지만, 너무 이른 시점에 적의 주목을 끄는 것은 위험하다.

‘조슈아 테일러. 현재 레벨 44.’

현재 이준기는 38레벨.

이상덕에 이어 한국 랭킹 2위다.

언제나 1위를 지켜왔던 한상태는 4위까지 떨어진 상황.

지난 한 달 반 동안 이상덕, 이준기 듀오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어려운 수준의 광렙을 했다.

어려운 던전은 이준기가, 쉬운 던전은 이상덕이 들어갔다.

거대 길드 서울연합이 관할하는 던전을 둘이 거의 나누어 먹었을 정도.

이상덕이 이준기를 총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린핑 루 님은 와이번 사냥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와이번 모나크는 아니고, 그냥 일꾼 와이번 정도만요.”

“그래도 와이번의 생태 같은 것은 꽤 관찰을 하셨겠죠?”

린핑 루 역시 이준기와 마찬가지로 몬스터의 습성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세심한 관찰력이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실력 차이를 만드는 것.

“네. 어떻게 아셨어요? 동료들이 저보고 동물 다큐멘터리 찍냐고 묻고 그러거든요.”

“린핑 루 님은 세계적 셀럽이시니까, 언론 기사도 읽고 해서 알았죠.”

“아아, 그런 것도 기사에 나는구나. 너무 이상한 행동 하지 말아야겠다.”

“아뇨. 아주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을 아는 건 병법의 기본이죠.”

접대를 맡아 그들과 함께 라운지에 있던 일본 협회 측 사람이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는 일어서면서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리고 둘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서,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비행기가 준비되었습니다. 이동하시죠.”

*****

전용기에 올랐다.

글쎄, 잘은 몰라도 50명은 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코노미 좌석으로 좍 채운다면 말이다.

“생각보다 비행기가 크군요.”

린핑 루가 좌석에 앉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호화로운 비행기를 타보게 될 줄이야.”

이준기의 좌석도 린핑 루와 마찬가지로 호화스러웠다.

널찍한 좌석 하나가 창문 옆에 놓였고, 앞쪽으로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겨우 두 시간 정도의 비행이지만, 피곤할 경우에는 뒤쪽에 마련된 침대에서 자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슬리퍼로 갈아 신은 린핑 루가 뒤쪽 구획에 놓인 침대를 보고 와서 이준기에게 말했다.

“비행기에서 누워 자면 어떤 느낌일까요?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낮잠을 좀 자야겠는걸요.”

이준기의 좌석에도 슬리퍼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준기는 그냥 운동화 채로 있었다.

어차피 두 시간짜리 비행, 신발 끈을 풀고 다시 묶는 것이 귀찮았다.

규정에 따른 안전 수칙 설명, 그리고 비상구 안내 후에 비행기는 이륙했다.

잠시 동안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던 이준기.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곧, 다른 승무원이 다가와 식사 안내를 했다.

“오늘 저녁에는 제대로 된 만찬을 드실 테니, 기내 식사는 가볍게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오는 식사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최고급 참치 대뱃살에, 왕실에 납품한다는 간장과 고추냉이가 준비되었다.

“린핑 루 님도 사시미를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중국 분이시지만, 와쇼쿠 애호가시라고.”

“네, 네! 맞아요. 너무 호화판으로 대접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회 접시가 치워지고, 차와 케이크가 서빙되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홍차로?”

“커피 주시겠어요?”

“저는 홍차로 할게요.”

우유를 데우는 동안, 이준기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기내를 돌아다녔다.

린핑 루는 홍차와 함께 나온 케이크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가 앉은 자리의 창밖으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뭔가, 뭔가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인데.’

“커피, 나왔습니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이준기는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라테가 머그잔에 담겨 이준기의 앞 테이블에 놓였다.

이준기는 입으로 가져가던 머그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무원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이준기에게 물었다.

“뭔가, 잘못됐나요, 손님?”

“고종이라고 아십니까?”

“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기 전, 마지막 왕이었죠. 무능한 놈이었지만.”

“아아··· 네.”

“그런데 그런 사람도 딱 한 가지는 꽤 유능했던 모양이에요.”

“네?”

“그 사람, 다 늙어서 커피를 배운 주제에 커피에 대해서만은 전문가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래서, 누군가가 그 고종을 독살하려고 커피에 독을 탔는데, 다른 건 몰라도 커피 하나만은 잘 알던 그였기에 그걸 알고 뱉었다는 겁니다.”

“네에?”

이준기는 웃으며 물었다.

“누가 사주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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