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89화 (89/248)

────────────────────────────────────

Episode 32: 협회의 그림자 (2)

Episode 32: 협회의 그림자 (2)

이상덕의 권력이 공고해지면서, 한국에서는 길드 간 갈등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는 길드 간 갈등이 폭발했다.

12월 4일, 샌터바바라(Santa Barbara)에서 미국 길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동부 연합(Eastern Union) 소속 구원자 15명이 샌터바바라에 쳐들어와서 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인 것이다.

‘총을 든 구원자’는 과연 경찰력 정도로는 막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소속 구원자 다섯 명이 사망하자, 서부 전선(West Front)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멀리 캘리포니아까지 원정을 온 동부 연합 침입조는 반수가 죽고, 반수가 도주했다.

서부 전선의 보복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캔자스 시티에서 시작하여, 덴버, 알링턴, 테네시, 올란도에서 구원자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상처를 입으면 힐링 포션을 마시기 위해 차원문 안으로 도망가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차원문이 전략적 거점으로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양측의 전쟁은 차원문을 서로 뺏고 뺏기는, 거점 공략전으로 변해갔다.

- 총을 든 구원자. 어떻게 막을 것인가?

- 구원자에 한해서 총기 소유를 제한하는 법안 상정. 그러나 실효성 없어.

- NYPD, 구원자 진압 작전 거부. “너무 위험해.”

미국에서 벌어지는 내전 소식이 매일 전해 들으면서, 구원자들은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와, 우리나라도 이 꼴 날 뻔했던 거잖아? 박충기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면 말야.”

“그러게. 내전이 발생하면, 우리들은 물론이고 보통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이 다치겠어.”

“미국에서는 벌써 경찰이 백 명도 넘게 죽었다면서?”

“인천 공항 차원문이 전화위복이 된 거네.”

“와이번 모나크가 일등 공신이네. 와이번 모나크가 독가스로 다 죽인 거라면서?”

문아린은 병원 침대에 누운 채로, 인천 공항 차원문 클리어 소식을 접했다.

소속 길드 마스터 전용택을 비롯해서 여섯 명이 죽어 나간 던전.

생존자 명단에서 이준기를 본 문아린은 우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다.

‘이번 던전까지 해서, 길수연도 준기 오빠와 두 번이나 던전 공략을 함께 했네. 길수연보다 내가 앞서는 건 이제 없나?’

병원 치료를 마치고 나온 뒤, 문아린은 이준기를 딱 한 번 만났다.

이준기의 오피스텔 바로 앞까지, 문아린은 자신의 머시디즈를 끌고 왔다.

매니저 최정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정장을 빼입고 이준기에게 바짝 붙어 서 있는 최정윤을 보니, 이준기가 전보다 더 멀어 보였다.

인사를 건네면서, 문아린은 자신의 웃음이 어색해 보일 거라는 걱정을 했다.

“잘 지냈지?”

“그럼. 이제 치료는 다 끝난 거야?”

“별것도 아니었는데, 뭘.”

주문대로 커피를 들고 최정윤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의자를 빼내 앉으면서, 최정윤이 문아린에게 말했다.

“아린 씨, 더 예뻐지셨네요! 연애하는 줄 알겠어요, 누가 보면.”

“하하. 매니저님 농담은 여전하시네요.”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나서, 문아린이 이준기에게 물었다.

“오빠, 다음 던전은 언제 가?”

“내일. 내일 오후에.”

“정말 쉬지도 않는구나.”

“용병이니까.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최정윤이 끼어들었다.

“걱정 마세요, 아린 씨. 제가 준기 씨 스케줄 관리는 확실히 할 테니까요. 너무 무리 가지 않게요.”

문아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잘 좀 챙겨주세요, 최정윤 매니저님.”

*****

“후아!”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리면서 이준기는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1박 2일의 던전을 클리어하고 저녁 늦게 들어온 것이 어제다.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이제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일도 어려워졌다.

유명 식당 음식 배달 서비스가 있어 그나마 식도락을 즐길 수 있는 상황.

늘 하던 대로 밀가루 음식을 잔뜩 먹어서 그런지, 뱃속에 조금 부대낀다는 생각을 했다.

현관의 초인종 음악이 울렸다.

최정윤이었다.

재빨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이준기는 문을 열었다.

“오! 커피! 역시 매니저님!”

“어제 던전 저녁 늦게 끝났으니까요. 오늘 아침에 커피 당기실 거 정도는 예상했죠.”

“하하. 감사합니다.”

둘은 회의실 테이블에 앉았다.

오피스텔 방 하나를 개조한 회의실은 이제 나름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벽걸이 스크린에 컨퍼런스 콜 장비는 물론이고, 값비싼 방음 시스템까지 갖췄다.

자리에 앉자마자, 최정윤이 말했다.

“우선, 간밤에 들어온 해외 뉴스 정리했어요.”

“감사합니다. 간밤에도 많은 일이 있었군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니까요.”

“미국 쪽은 어때요?”

“원래도 서부 전선 쪽이 우세인데, 캐나다 서부 길드들이 참전하는 바람에 균형이 더 기울어졌어요. 이제 곧 서부 전선의 승리로 끝나지 않을까요.”

“캐나다 쪽이라면?”

“밴쿠버 소재 길드 캐넉스(Canucks)가 서부 전선에 합류했어요. 프리실라 세딘티가 소속된 바로 그 길드죠.”

아는 이름이지만, 이준기는 모르는 척 물었다.

“프리실라 세딘티?”

“1999년생. 밴쿠버 출신입니다. 캐나다 랭킹 1위인 탱커죠. 미인이고요.”

“여성 탱커에 미인이면 인기 좀 있겠군요. 게다가 랭킹 1위라니.”

“당연하죠! 구원자 셀럽 중에서도 탑 클래스죠. 여성 구원자 중에서는 헬렌 카자크 다음으로 인기가 많을걸요?”

“인기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조슈아 테일러는요? 서부 전선 쪽에서 싸우는 중인가요, 지금?”

“아뇨. 조슈아는 내전에 가담하지 않고 있어요. 내전에서 활약 중이라면, 뉴스가 쏟아졌을 텐데요.”

“그래요?”

성흔, ‘카인의 징표’가 없더라도 몬스터보다는 인간, 즉 구원자를 사냥하는 편이 경험치가 더 많다.

그런데 카인의 징표를 가진 조슈아 테일러가 내전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뭔가 다른 방법으로 구원자들을 죽이고 있겠지.’

“중국 쪽은요?”

“그쪽도 일방적이군요. 홍콩 측에 마카오, 상하이에 이어 선전이 가세했지만, 베이징 쪽이 워낙 세니까요.”

“중국에서 내전이 난 것 자체가, 중국 정부로서는 당혹스럽겠죠?”

“사설 내용이 대개 그런 식이에요. 요즘 세상에 비밀주의가 언제까지 통하겠냐, 정부 쪽이 모든 걸 통제하려고 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등등. 물론, 홍콩에는 언제나 민주화 요구가 있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지만요.”

“상하이에 선전까지 가세할 줄은 몰랐겠죠. 중국 정부가 많이 놀라지 않았을까요?”

“중국 정부 입장은 여전합니다. 반정부 집회에 참여하는 건 탈영이고, 탈영병은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해요. 그래서 오히려 결사 항전하는 것일 수도 있죠.”

“민주화 운동 얘기가 나왔으니, 분리독립 운동 쪽은 어떤가요?”

“흥미로운 기사가 있네요. 중동, 아프리카, 스코틀랜드 쪽은 그렇다고 치고, 일본 얘기가 있더라고요.”

“일본요?”

“오키나와 출신 구원자 1명 경찰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오키나와 독립 지지 선언을 자기 블로그에 올렸다나 봐요.”

“오키나와 쪽이라면, 중국도 관심이 좀 있겠군요.”

“중국요?”

“네. 댜오위다오는 원래 류큐 제도랑 한몸이니까요.”

“댜오··· 아! 센카쿠 열도 말씀이군요.”

“네. 일본도 은근히 영토 문제가 많은 나라니까요. 독도를 제외하더라도, 센카쿠에 사할린 쪽까지.”

“사할린 얘기하시니까, 러시아 소식도 있네요. 러시아는 완전히 마피아 내전 같은 분위기인가 봐요.”

“우크라이나, 조지아 같은 나라들도 엮여 있고요.”

“네. 중국이나 러시아 내전 사진 보면, 우리나라가 조용한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죠. 내전··· 끔찍하죠.”

12월 22일.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세계는 연말 분위기 대신 피바다에 휩싸여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내전에서 한국은 아직 청정지대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이준기가 기억하는 역사에서, 한국에서 내전은 내년 1월이나 되어야 발생한다.

하지만 그걸 원천 봉쇄했다고, 이준기는 생각하고 싶었다.

세력균형의 추를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게 만들어 내전의 불씨 자체를 꺼버리는 것, 그것이 이준기의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방관했다.

더 나아가, 불의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번에는 과연 성공한 것일까?

아직 한 달은 더 기다려 보아야 한다.

*****

12월 23일. 목요일.

협회 사무실은 썰렁했다.

직원들이 대거 휴가를 간 것이다.

연말에 휴가를 적극 활용하라는 정부 지침에, 협회도 통 크게 단체 휴가를 허락했다.

신학길이 이준기를 맞았다.

가족들이 전부 외국에 나가 있는 기러기 아빠라서, 신학길은 휴가를 갈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회장실로 가시죠.”

“회장님이 직접 얘기하실 문젠가 보죠?”

“네. 이번 건은 직접 설명하신다고 합니다.”

“아, 네.”

회장실에 들어서자, 이상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를 맞았다.

‘반가움’을 표현하는 그만의 방식일 테지만,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이 실장! 어서 와! 자리에 앉게!”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이 직접 브리핑하시겠다니···”

자리에 앉자마자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신학길이 종이컵에 담긴 커피 두 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린 보틀 커피입니다.”

“그래, 그린 보틀. 이 실장이 워낙 커피 마니아니까, 내가 신경 좀 썼지. 이거 꽤 멀리 가서 사 온 거라고.”

“하하, 회장님도. 감사합니다.”

“일단 커피부터 들라고. 여기 쿠키도 있네.”

예전에 마카롱을 준비해 놓은 것을 보고 무심코 싫다는 뉘앙스를 풍겼더니, 어느새 그게 쿠키로 바뀌었다.

이상덕 협회장이 이준기에게 나름 신경을 쓴다는 증거다.

입안의 혀처럼 움직여주는 이준기에게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만함을 개인적 신조로 생각하는 이상덕에게는 파격적인 것이다.

“쿠키가 참 맛있군요.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또 며칠 던전 식량 패키지 먹어야 하는 일이겠죠?”

“이 실장 농담은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단 말이지. 하하. 맞아, 맞아. 차원문을 하나 또 정리해 줘야겠네.”

“어딥니까?”

“그게 말야··· 오키나와에 있어.”

“오키나와요?”

이준기는 발끈했다.

현재 이준기와 이상덕의 관계는 계약 관계를 넘어선 일종의 공모 관계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용병 계약에 기초한 관계다.

그 용병 계약에, 일본과의 연합 작전은 뭐든지 중지한다는 조항이 들어있다.

처음에 그런 조항을 덥석 받아들인 이상덕은 여차하면 계약을 깰 생각으로 그런 것이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 버린 이준기를 화나게 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이상덕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실장, 잠깐··· 일단 내 얘기를 좀 들어보게. 절대 나쁜 얘기가 아냐.”

“용병 계약서, 잊어버리셨습니까? 지금이라도 보여드릴까요?”

“아냐, 아냐. 잊지 않았어. 하지만 이번 일은, 일본 측에서 정중하게 부탁해 온 것이고, 무엇보다 조건이 아주 좋아.”

“누구한테 좋다는 겁니까?”

“우리나라에, 대한민국에 좋은 조건이라네. 자네는 애국자니까, 조건을 들으면 납득할 거야.”

애국자?

이준기는 피식 썩소를 지을 뻔했다.

“알겠습니다. 우선 전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준기가 다시 자리에 앉자, 이상덕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문 기사가 조그맣게 났는데, 봤는지 모르겠네. 일본인 구원자 중에, 오키나와 분리독립주의자가 있는 모양이야. 지금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게 그냥 한 사람의 치기 어린 생각이 아니라는 거지.”

“흥미롭군요.”

“오키나와를 홍콩 같은 것으로 만들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라는군. 그러려면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서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지. 자네라면 어느 나라를 끌어들이겠나?”

“그게 한국이란 말입니까?”

“그래. 한국, 아니면 중국. 일본 협회 쪽 생각은 두 가지야. 하나는 오키나와에 열려 있는 차원문을 닫아버려야 오키나와 구원자들의 발언권이 약해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요?”

“오키나와 분리독립주의자들에게, 기댈 언덕이라는 게 원래부터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한국과 중국은 일본 편이라는 걸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거야.”

“그래서, 한중일 연합 공격대로 오키나와 차원문을 닫는다?”

“그래! 바로 그거야. 역시 이 실장. 머리가 정말 잘 돌아가는군.”

“한일이 아니라 한중일이라면, 과연 조금 성격이 다르긴 하군요. 하지만 왜 접니까?”

“그건, 오키나와 차원문이 바로 ‘와이번 네스트’이기 때문이지. 지금 와이번 네스트 관련해서 이 실장만 한 전문가는 어디를 찾아봐도 없으니까.”

*****

한중일 공격대의 오키나와 차원문 공략은 12월 29일 수요일로 결정되었다.

일단 크리스마스는 지내고 오라는 배려다.

-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는 연인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해야 한다는 싱글족들의 캠페인이 벌어졌다.

가족?

이준기는 회귀 이후, 단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경황도 없고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의도치 않게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가족의 안전을 생각하면, 가족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준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가족의 존재 자체는 알려졌다.

하지만 이준기의 부탁대로 가족들은 언론 노출을 최대한 피했고, 기자들도 결국에는 포기했다.

딱 한 번, 극성스러운 기자가 이준기의 어머니를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이준기, 길수연, 문아린의 삼각관계가 한창 검색어 순위 상단을 오르내릴 때였다.

“어머님 생각은 어떠세요? 며느릿감으로는 어느 쪽이 좋으신지?”

길수연과 문아린의 사진을 들이밀며 어머니에게 선택을 강요한 기자에게 그야말로 여론의 융단폭격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한국 구원자 계의 원탑 아이돌로 자리를 지켜온 길수연의 팬들은 분노했다.

전투력 최강인 이들 집단을 건드리다니.

이준기와의 열애설만으로도 짜증 나는데, 길수연이 이준기를 놓고 다른 사람과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사실처럼 보도한 기자에게 맹렬 폭격을 가했다.

한창 주가를 올리던 문아린의 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본분에 집중하는 문아린을 그만 괴롭히라고, 기자들을 성토했다.

소란은 있었지만, 이 일로 기자들은 이준기의 가족에게 인터뷰를 따내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준기 입장에서는 최선의 결과가 나온 셈이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사람들의 관심 바깥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상태가 어머니와 동생에게는 가장 안전하다.’

그러니까, 이준기는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면 안 되었다.

고생해서 간신히 확보한 익명성과 안전을 고작 하루의 위안과 바꿀 수는 없었다.

12월 24일.

저녁을 일찍 먹고 자리에 누웠지만, 초저녁부터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세상의 무기물들을 쳐다보며 걸었다.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멀리에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준기는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 있었다.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 그리고 연인들이 한창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 준기 씨!”

길수연이었다.

길드를 옮기고 서울로 이사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다니.

“수연씨··· 서울 참 좁네요.”

“아하하! 정말 그렇네요.”

인천 공항 차원문 정리를 끝내고, 한 달이 넘게 만나기는커녕 카톡조차 하지 않았던 둘이다.

갑자기 이상덕의 편을 드는 이준기에게, 길수연은 냉랭한 시선을 한 차례 던지고 던전에서 나갔다.

그렇게 최악의 감정으로 헤어졌던 그들이지만, 길에서 우연히,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지내요?”

“저야 뭐, 평소와 다를 게 없달까요.”

“요즘도 열렙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누가 들으면 게임 중독인지 알겠네요.”

잠깐 침묵.

“그런데 준기 씨는 사귀는 사람도 없어요? 크리스마스이브에···”

“그건, 제가 할 말인 것 같은데요. 하하. 수연 씨는 팬이 그렇게 많은데···”

“실속이 없는 거죠. 그리고 팬 카페 수는 준기 씨가 절 앞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그럴 리가요.”

“맞아요. 맞을 거예요. 뉴스도 안 보시나 봐요?”

“뉴스는 챙겨봅니다. 매니저님이 챙겨 주세요. 다만···”

“그런 쪽의 뉴스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씀이겠죠.”

“네.”

“여전히 바쁘시죠?”

“저, 낼모레 출국합니다.”

“출국요? 여행이라도 가시는 거예요? 아니면 설마···”

“용병 일 가는 겁니다. 오키나와에 ‘와이번 네스트’가 열렸다고 해서요. 나름 전문가라고···”

‘와이번 네스트’라는 말이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러나 곧, 길수연이 이준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준기 씨, 잘 다녀오세요! 다치지 마시고요.”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수연 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