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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88화 (8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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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2: 협회의 그림자 (1)

Episode 32: 협회의 그림자 (1)

“또 보니 반갑구만, 이 실장! 이틀만이지만 정말 반가워!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네.”

“감사합니다.”

“이 실장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나. 이번에도 정말 수고했어.”

“과찬이십니다.”

또다시 차원문 하나를 정리하고 나온 이준기.

이상덕이 그를 앞에 두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고 있었다.

한국 구원자 길드협회 사무실.

인천 공항 차원문 공략 이후, 협회 사무실은 삼성동에서 도곡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인천 공항 차원문에서 벌어진 대사건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반협회장 파벌을 이끌던 문경새재와 신선자 길드가 공중분해 되고, 길드간의 합종연횡이 벌어졌다.

협회의 대형 길드 우대 정책에 맞추어, 작은 길드들은 대개 큰 길드로 흡수되거나 서로 합치면서 사라졌다.

대형 길드 우대정책은 경제적으로도 사리에 맞는 일이고, 정부와도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그 누구도 쉽게 반대할 수 없었다.

박충기를 구심점으로 하는 반협회장 파벌이 사라졌다.

한상태와 김범규가 중심이 되어야 할 중도파는 뭉치지 못하고 사분오열을 거듭하는 가운데, 이상덕은 공고한 권력을 다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상덕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인물은 단연 이준기였다.

인천 공항 차원문 안에서 벌어졌던 패싸움의 결과를 묵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상덕에게 기울어진 세력균형이 굳어지는 데 있어 이준기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던전 ‘와이번 네스트’에서 벌어진 패싸움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는 모두 14명.

이상덕을 필두로 하는 협회장 파가 여섯 명.

반협회장 파는 한소미 단 한 명이 살아남아 목숨을 구걸했다.

나머지는 중립, 내지는 떨거지라고 불려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 전부를 합치면 일곱 명이나 되었지만, 그들은 뭣 하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한상태는 언제나처럼 마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려 했다.

대형 길드 브릴리언트의 길마, 김범규는 전설급 아이템 ‘사자의 서’를 갖고 싶다는 욕망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정치적 입장이 없기는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길드임에도, 나현우와 김나리는 한상태나 김범규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드래곤볼 길드의 마스터 장대한 역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중소길드의 마스터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 어정쩡한 입장으로 머뭇거리는 사이에, 오직 이준기만이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세웠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준기를 잠재적 반협회장 파벌로 생각했다.

이상덕에게 반기를 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

그런데, 그랬던 그가 돌연, 이상덕 협회장을 지지하는 듯한 스탠스를 취한 것이다.

박충기 일파가 쓰러지고, 아이템 배분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이상덕을 한상태가 막아섰다.

브릴리언트라는 대형 길드를 이끄는 김범규가 자기편을 들어주면 좋겠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이준기와 길수연이라면, 이상덕의 불의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기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덕도 그렇게 예상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준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정도를 지나, 길수연을 말리기까지 했다.

그걸 보고, 이상덕은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이준기와 나 사이에는 이면 계약이 있다!”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준기는 생각했다.

박충기와 이상덕,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국 구원자 계의 분란이 사라진다.

그래서 이준기는 잠자코 있는 것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사실입니다.”

한상태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지지하기는커녕, 이준기가 오히려 저쪽 편에 붙어 버렸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되었다.

한상태가 물러나자, 사람들은 김범규를 쳐다보았다.

당시 던전 안에는 오직 두 명뿐인 브릴리언트 길드지만, 어떤 길드보다도 상위랭커를 다수 보유한 거대 조직.

김범규에게는 오직 아이템 욕심뿐이었다.

아이템 배분이 공평할 것이라는 약속에, 그는 중립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이템 배분이 시작되기도 전에 길수연이 차원문을 나왔다.

아이템 배분 대상은 에픽 흉갑 ‘가시나무’, 그리고 전설 등급 소모품 ‘사자의 서.’

피해를 반사하면서 어그로까지 쌓아주는 방어구, ‘가시나무’.

이상덕은 궤변을 앞세워 ‘가시나무’를 김범규에게 넘겼다.

분노한 한상태는 차원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뇌물이나 다름없는 아이템 배분을 받은 김범규가 침묵하는 가운데,

이상덕은 너무나도 손쉽게 ‘사자의 서’를 획득했다.

구원자라면 누구라도 갖고 싶어 할 아이템을, 던전 보스 공격에는 참여하지도 않았던 그가 가져간 것이다.

던전에서 나오고, 이상덕은 이준기와의 이면계약을 사실로 만들려고 했다.

헤네시 XO를 들고 오피스텔로 찾아온 신학길 사무총장에게, 이준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이면계약 같은 것, 필요 없습니다. 그건 협회장님이나 저를 오히려 옭아맬 뿐일 테니까요.”

말을 전해 들은 이상덕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둘 사이에 의견의 일치가 존재하지만, 그 사실을 기록한 문서는 어디에도 없다.

증거가 어디에도 없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이면계약이 어디 있겠는가.

이상덕과 이준기는 서울 모처에서 밤을 새우며 함께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준기는 그렇게 이상덕의 오른팔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최대의 정적 박충기를 제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충직한 자객까지 확보한 이상덕의 입은 귓가에 걸렸다.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격이지. 수어지교라는 게 바로 이 실장과 나 사이를 두고 하는 말 아니겠어. 으하하!”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이준기 그놈이 이도협보다 더한 놈이었군.”

“고성하, 이도협이 죽어서 오대영이 최측근이었는데, 이준기가 단숨에 오대영을 밀어냈어.”

“안량, 문추를 잃었지만 관우를 얻었다고 떠들고 다닌다던데. 고성하, 이도협 대신 이준기를 얻었다고.”

“이상덕 명령이라면,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이 군다던데?”

“이상덕 마음에 들려고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한 거였어?”

총회에 안건을 올릴 때마다 사사건건 간섭을 하던 반협회장 파벌이 사라지자, 협회는 사무실을 이전했다.

사무실을 넓은 곳으로 이전한 것은 물론이고, 직원도 단박에 두 배로 늘렸다.

더 넓어진 사무실에는 이상덕 협회장의 방과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는, 호화로운 방이 준비되었다.

바로 이준기의 방.

신학길은 이준기가 사무실에 나올 때마다 알랑거렸다.

“하이고, 이 실장님.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차원문 입장까지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요!”

이준기의 매니저, 최정윤은 그럴 때마다 의아했다.

“협회 쪽에서 요즘 너무 잘해주는 것 같은데, 왜죠?”

*****

박충기와 전용택이 사망하면서 그들이 마스터로 있던 길드, 문경새재와 신선자는 해체되었다.

소속 길드원이 많았던 문경새재는 레인메이커즈(Rainmakers)와 기파랑, 두 개의 길드로 분리되었다.

부산을 거점으로 하는 레인메이커즈는 전 문경새재 길드원들을 중심으로 창단했고, 대구에 사무실을 차린 기파랑은 전 문경새재 길드원 외에도 타지역 구원자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기파랑이 스카우트한 대표적인 인물은 다름 아닌 길수연.

- 힐러 길수연, 신규 길드 ‘기파랑’ 합류. 기파랑은 단숨에 전국구 위상 확립.

- 이상덕 회장과 길수연 힐러 사이의 불화설, 사실로 드러나나?

- 바야흐로 길드의 합종연횡 시대!

신선자는 그야말로 공중분해 되었다.

전용택, 하성도가 사망했지만 문아린, 한소미라는 상위 랭커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신선자.

인천 공항 던전을 클리어해서 길드 내 최고 레벨이 된 한소미가 돌연 길드 해체 선언을 해버렸다.

병원에 있던 문아린은 돌아갈 길드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해야 했다.

갑자기 무소속 신세가 된 문아린에게 신규 길드 레인메이커즈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비슷한 시기, 한소미는 한상태가 새로 창립하는 길드, 프라이드(Pride)로 이적했다.

던전 안에서 생명을 위협당했던 그녀는 탑랭커 한상태가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 믿고 그렇게 했다.

인천 공항 차원문 사태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한상태였다.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왔건만, 그건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언제나 전체 랭킹 1위로서 최강자로 군림해 왔는데, 이상덕 일파에게 힘으로 밀린 것이다.

세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길드 ‘퇴마문’을 정리하고 새 길드, ‘프라이드’를 창단했다.

인천 공항 던전에서 이상덕에게 수모를 당할 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던 길드원, 나현우를 내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랭킹 20위권의 나현우는 곧바로 브릴리언트 길드가 채어 갔다.

김범규의 브릴리언트 길드는 인천 공항 사태에 연관되고도 해체되지 않은 유일한 길드가 되었다.

김범규 역시 한상태와 비슷한 생각으로 구원자들을 영입했다.

중견급 이상의 구원자는 퇴마문 소속이었던 나현우뿐이었지만, 20레벨 미만의 ‘유망주’들을 대거 데려왔다.

김범규는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다.

“주석. 그놈이 제일 아깝네. 정말 키워볼 만한 녀석이었는데.”

인천 공항 사태 이후 사상 최대의 길드가 새로 생겼다.

이도협이 예전에 이루려고 했던, 충무공-탑픽-코리아 3개 길드 연합을 단박에 성사시킨 것이다.

이름하여 ‘서울연합’.

이름이 유치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지만, 이상덕은 단호했다.

“서울 소재 3개 길드의 연합이다. 그러니까 서울연합이라는 이름은 당연하지.”

서울에 연고를 두고 있던 대형 길드 네 곳 중 브릴리언트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연합한 길드.

예전의 문경새재를 능가하는 최대 규모의 길드가 하룻밤 새에 만들어졌다.

상대적으로 작은 길드를 이끌면서 여러 길드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치장하던 예전의 방식을 버리고, 이상덕은 신규 대형 길드의 길마 자리를 스스로 움켜쥐었다.

- 초대형 길드, ‘서울연합’ 탄생. 이상덕 협회장이 길드 마스터로 취임.

- ‘서울연합’은 올스타 길드? 랭킹 14위권 내에 길드원 7명 포진. 사상 최강 전력.

- ‘협회 용병’ 이준기가 서울연합 소속이 아닌 이유는?

“정말, 그 이유를 알고 싶네요.”

차원문 입장 전, 간략하게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박대기 기자가 이준기에게 물었다.

“협회 관할 던전을 그렇게 들락거리시면서, 이준기 구원자님은 왜 무소속인 겁니까?”

이준기가 억지웃음을 웃으면서 대답했다.

“용병으로 남기 위해섭니다. 그래야 더 많은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거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무소속이라서 더 많은 던전에 들어가고 계시기는 합니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척후병 역할을 맡으신 걸로 들었습니다. 무소속이라서 괄시당하시는 건 아닌가요? 길드가 있었다면, 공격대장 역할을 맡으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전 용병입니다. 부탁받은 일을 할 뿐입니다.”

같은 질문을, 이상덕도 이준기에게 했었다.

“그러니까, 왜 무소속으로 남겠다는 거냐고.”

인천 공항 차원문, ‘와이번 네스트’ 클리어 기자회견 직후, 아직 삼성동에 있던 협회 사무실 자기 방에서, 이상덕은 이준기에게 그렇게 물었다.

한 달 만에 상전벽해와도 같이 다른 분위기의 만남, 신학길은 생각했다.

‘예전에는 서로 죽일 것처럼 으르렁거리더니, 이건 뭐 화기애애하군.’

이준기가 이상덕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회장님의 그림자로 남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전면에 나서는 것이, 때로는 행동에 제약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이상덕은 알듯 말 듯 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자, 이준기는 비슷한 말을 반복할 것이다.

이상덕은 호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도쿠가와 막부의 핫토리 한조가 되겠다는 건가?”

“하··· 한조요?”

“그래, 닌자 한조.”

“협회장님, 무협 소설 좋아하시나 봐요?”

“하하하. 내가 그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하하. 정말 그렇군요.”

이상덕은 이준기에게 ‘전략실장’이라는 기괴한 이름의 직함을 주었다.

경호실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준기가 반발할 것이 두려웠다.

어찌 된 일인지, 인천 공항 던전 안에서 갑자기 자기편을 들었던 이준기다.

섣부른 짓을 해서 품 안에 들어온 새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이 실장의 구국적 결단이 우리나라 구원자 계의 미래를 밝게 할 걸세!”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것은, 머지않아 밝혀진다.

12월 4일, 미국에서 길드 간 내전이 발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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