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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1: 와이번 모나크 (4)
Episode 31: 와이번 모나크 (4)
이상덕의 화염 공격에 쓰러진 박충기가 외쳤다.
“뭐야!”
오른손을 내리지도 않은 채, 이상덕이 응수했다.
“이 도둑놈아! 아이템을 훔치려고 했지!”
이상덕이 더 빠르게 움직였을 뿐, 박충기가 움직이자마자 다른 사람들도 이미 제자리에서 이탈했다.
무기를 손에 든 사람이 반이 넘었다.
하나 같이 상자 쪽으로 움직이는 박충기를 향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박충기와 이상덕이 말싸움을 했다.
“네놈 따위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냐!”
“도둑놈이 제 발 저린다더니!”
박충기가 손을 뻗어 마법 막대, ‘파이어 스타터’를 꺼내 쥐었다.
이상덕도 인벤토리에서 마법 막대, ‘에번 드림(Ebon Dream)’을 꺼냈다.
마치 검투라도 하는 듯이 둘이 서로에게 마법 막대를 겨누고 마법을 펼쳤다.
말릴 새도 없었다.
이상덕이 날린 검은 화살을 맞고 휘청거리던 박충기가 외쳤다.
“힐! 힐을 달란 말야! 한소미!”
갑자기 자기 이름을 불린 한소미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네, 네?”
그러면서 자신의 길마 전용택을 바라보는 한소미.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협회장 파 대 반협회장 파의 싸움을 시작해도 되는 것인지.
전용택은 한 걸음을 내딛어 박충기 옆에 서면서 이상덕에게 외쳤다.
“이상덕! 당장 멈춰라. 아니면 공격하겠다!”
이에 이상덕도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오대영! 남경철! 강명성! 저놈들을 공격해라!”
남경철은 머뭇거렸지만, 오대영은 방패를 쥐고 달려왔고, 강명성도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쥐었다.
언덕을 내려가던 한상태가 뒤를 돌아보았다.
기가 막힌 광경에, 그가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야! 그만두지 못해!”
그러나, 늦었다.
강명성의 손끝에서, 박충기를 향해 창이 날아갔다.
전용택이 방패를 치켜들고 달려와 창을 쳐내자, 창은 부메랑처럼 다시 강명성에게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하성도와 홍세희가 전용택과 박충기 옆으로 와서 나란히 섰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였다.
정두리, 변희영, 조수현이 이상덕과 오대영의 편에 가세했다.
구원자 쪽 정치판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그릴 수 있는 그림.
협회장 파 대 반협회장 파로 진영이 나뉘었다.
김범규가 소리 질렀다.
“다들! 이 상자에서 떨어져! 상자 근처 5미터 내로 접근하는 녀석은 도둑으로 간주하고 내가, 아니 우리 길드가 공격하겠다.”
김범규가 김나리를 쳐다보았다.
브릴리언트 길드에서 이번 공격대에 참여한 것은 그 둘뿐.
랭킹 10위권에 세 명이나 포진한 엘리트 길드 브릴리언트.
개인 사정으로 공격대 참가를 거부한 최현의 부재가 아쉬웠다.
김나리는 김범규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길마님, 뭐 하시는 거예요? 싸움을 말리셔야죠.”
김범규가 대답했다.
“말려? 저것들을? 박충기와 이상덕이 같은 공격대에 편성될 때부터, 이런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멀리에서 한상태가 다시 외쳤다.
“모두들! 그만두시라고요!”
그러나 박충기와 이상덕은 요지부동이었다.
“한상태 회장, 썩어빠진 겁쟁이 놈을 제거하는 일에 동참해.”
“한상태 회장, 우리 쪽으로 붙어. 도둑놈을 잡자고.”
김범규가 한상태를 향해 외쳤다.
“한상태 회장님! 나와 같이 상자를 지켜요! 저놈들이 싸움을 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이렇게 대단한 아이템을 저런 놈들한테 넘겨줄 수는 없잖습니까?”
길수연은 예상대로 옆에 비켜선 채로 있었다.
벌써 차원문 바깥으로 걸어 나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
쿨한 성격으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쿨한 척을 할 만한 아이템도 상황도 아니었다.
이상덕이 그녀에게 외쳤다.
“길수연! 길드 마스터로서 명령한다. 박충기와 그의 일당을 몰아내는 데 합류해라!”
“회장님, 싸움은 그만두시고 아이템 배분을 중재해 주시죠.”
“그러려면 아이템을 훔치려는 도둑부터 처리해야지. 안 그래? 내 옆에 서라!”
“회장님이라고 딱히 큰소리치실 입장은 아니잖아요?”
박충기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공기를 갈랐다.
“으하하하하!”
땅속에서부터 솟아올라온 화염 정령이 박충기의 옆에 섰다.
*****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다.
두 개의 파벌로 나뉜 한국 구원자 계에 언젠가는 일어났을 싸움이다.
어떻게든, 협회 내분으로 이어질 일이나 일본 측에 침략 빌미를 줄 만한 사건들을 차단해 왔던 이준기.
그러나 그럴 때마다, 사건은 다른 곳에 비슷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세종고등학교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막았지만, 일본에서 열린 구원자포럼에서 한일 연합 공격대가 발족된 것처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더 큰 물줄기가 어딘가에서 몰아쳐 다시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미시적으로는 자유의지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통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몇 차례에 걸쳐 던전 내에서 패싸움이 나는 것이 원래의 역사였다면, 이번에는 그 에너지가 응축되었다가 한꺼번에 분출되는 모습이었다.
인천 공항 던전에서는 원래 역사에서도 패싸움이 났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이 사망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단 한 번, 한상태가 전용택의 공격을 방패로 막았다.
그러자 분노한 전용택이 한상태를 향해 소리쳤다.
“한상태! 또다시 나를 막아선다면, 너도 나의 적이다!”
한상태는 양손을 들어 보이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멀리 걸어가 바닥에 앉으면서 말했다.
“나도 할 만큼 했다. 이제 싸움 구경이나 해야겠군.”
길수연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준기에게 물었다.
“힐이라도 넣었다간 싸움에 가담하는 꼴이 되겠죠?”
“네. 그럴 것 같네요.”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이준기는 생각했다.
길드 간의 전쟁으로 인해 한국 내 구원자의 수가 크게 감소하고, 일본은 유유자적 한국 내 차원문 관리에 ‘도움’을 주겠다는 핑계로 쳐들어온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웃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내전을 최소한의 피해로 막은 중국이, 중일 간 분쟁 지역인 댜오위다오를 점령한 것이다.
일본 측에서 군대와 구원자들을 보냈지만, 중국도 똑같이 군대와 구원자들을 동원해서 방어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결과인지, 중국의 낙승.
댜오위다오를 탈환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키나와까지 빼앗긴 일본은 본토로 퇴각했다.
규슈에 이어 고베 전투까지 지고 나서야 일본은 중국과 굴욕적인 ‘계약’을 맺는다.
전일본 구원자협회와 중국 구원자연합 간 사계약의 형식이지만, 사실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조약이나 다름없는 내용.
댜오위다오는 중국령으로 편입되고, 오키나와는 양국 공동 관리구역이 되는 내용이다.
차원문에 한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이야기지만, 사실상 국경 획정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일본은 한국 침략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중국에 털린 것이다.
이후에 조슈아 테일러가 전세계 구원자들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일본은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한국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은 후였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조슈아의 검은 군대가 일본을 무혈점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반면, 내분과 일본의 침략으로 조기에 무너져 내린 한국 구원자 계는 길드 세계대전에서 별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세력을 그나마 보존하게 되고, 이준기와 길수연으로 대표되는 한국 구원자 계는 대 조슈아 테일러 전에서 주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결과 아닌가.
이준기의 최종 목표는 조슈아 테일러를 저지하는 것.
그것만 생각해 본다면, 협회장 파 대 반협회장 파의 내분이나, 일본의 침략 따위, 그냥 내버려 둬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흘러간 역사가 조슈아 테일러를 막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뭔가 다른 변수를 만들어야만, 조슈아 테일러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순간, 뭔가가 이준기의 마음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갔다.
“힐이라도 넣어야겠어요. 죽는 건 막아야죠.”
그렇게 말하면서 힐 시전을 하려고 길수연은 손을 들었다.
이준기가 그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길수연은 이준기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이준기는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
길수연이 화를 내면서 이준기에게 외쳤다.
“뭐 하는 거예요?”
“피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말릴 수 없어요.”
“그래서,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있으라고요?”
“와이번 모나크를 해치우고 나서 내분이 일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시겠어요?”
“네?”
“보스를 잡기도 전에 싸움이 났다면 전부 사망했을 겁니다. 전멸했을 거라고요. 우리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 전부,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박충기와 이상덕. 한국 구원자 계에 머리가 둘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오늘 결판을 내도록, 지켜보죠.”
“주, 준기 씨!”
길수연은 넋을 잃고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평소와 달라진 모습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디에선가 찬 기운이 몰아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서서 이준기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화염과 폭풍이 몰아치고, 쇠붙이들이 부딪쳐 불꽃이 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갑자기 얼음같이 냉랭해진 이준기의 기(氣)에 서늘함을 느끼면서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
“하하하! 드디어 내가 이 새끼를 없애는구나!”
“으으··· 사, 살려줘···”
펑!
마치, 포로로 잡은 적장을 즉결처분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상덕은 박충기의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쏘았다.
박충기가 이마에 검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이상덕이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한소미! 너도 이놈들을 따라서 죽을 테냐?”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쓰러진 채로, 한소미가 신음이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다시는 내게 도전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네··· 네···”
“전용택도 사라진 마당에, 그따위 길드는 당장 해체하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일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 것. 당연한 얘기지만.”
“네···”
“사람들은, 와이번 모나크가 죽으면서 내뿜은 독가스로 죽은 거다. 알겠냐?”
“네··· 물론입니다···”
“좋아. 살려주지.”
아이템 상자를 꼭대기에 얹은 언덕을 중심으로 피바다가 낭자하게 벌어져 있었다.
홍세희, 하성도, 전용택, 그리고 결국 박충기까지 죽었다.
반협회장 파로 분류되는 공격대원들 중 살아남은 것은 한소미뿐.
다시는 거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간신히 힐링 포션을 얻어 마시고 있다.
반면, 처음부터 수적으로 우세했던 이상덕 파벌 쪽은 조수현 한 사람만이 사망했을 뿐.
정두리와 강명성이 부상을 입었지만, 힐링 포션을 들이키는 그들의 모습에는 여유가 넘친다.
그들은 웃고 있다.
정두리에게, 길드 마스터 권한으로 이상덕이 명령했다.
“일단, 한소미 저년을 묶어.”
“뭘로 묶죠?”
“아무 걸로나 묶어! 저기 박충기 녀석의 시체에서 옷이나 신발 끈 같은 거 가져와서 묶으면 되잖아!”
“아, 네. 그렇군요.”
이상덕의 지시에, 정두리가 묶을 끈을 가지러 박충기의 시체를 뒤지러 갔다.
“파이어 스타터! 그렇지. 그 아이템도 잘 보관해 둬라.”
“네, 네.”
“하긴 그렇군. 두리야, 너 화염 쪽이잖아?”
“네! 그렇습니다!”
“파이어 스타터의 다음 주인이 된 걸 축하한다!”
“우왓! 하하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지금까지는 팔짱 끼고 양반다리로 앉아 구경만 하던 한상태가 일어섰다.
“잠깐, 이상덕 회장. 패싸움은 내가 보고만 있었지만, 강도질은 그럴 수 없다고.”
이상덕이 발끈했다.
“뭐야?”
“하하하! 이상덕 회장, 정신 차려야지. 나 한상태다. 한상태.”
한상태가 두 발을 벌려 서면서 팔짱을 꼈다.
그러나 그런 위협은 아직 세력균형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해야 했다.
이상덕은 한상태의 시선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맞받아쳤다.
“한 회장, 경고하겠는데, 끼어들지 않는 게 좋아.”
“이봐, 이상덕. 정신 못 차리겠나? 나 한상태다.”
“흠, 그래? 그래서 네 옆에 누가 있는데?”
이상덕이 큰소리를 치자, 그 옆으로 정두리와 오대영을 시작으로 협회장 파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상태 역시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그 옆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같은 길드의 나현우조차도 멀리 서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상덕이 조소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제 알겠냐?”
“흥. 그렇군.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평소에 정치질 좀 하고 다닐 걸 그랬군. 하지만!”
“하지만?”
“내 옆에 정말 아무도 없을 것 같아?”
“아무도 없잖아?”
한상태가 언덕 위쪽을 쳐다보면서 외쳤다.
“이준기! 길수연! 당신들은 이런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지 않겠지?”
길수연이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이준기가 고개를 내저었다.
길수연이 이준기의 면전에 고함을 질렀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가만히 계시라는 뜻입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준기 씨! 정말 실망했어요!”
“지금, 무엇이 최선일까요? 여기서 또 한 번 두 패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는 것?”
“네?”
대화를 엿듣던 이상덕이 박수를 치면서 웃었다.
“하하하! 이준기!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이군!”
한상태가 이상덕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냐?”
“이준기가, 협회에 고용된 용병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협회뿐 아니라, 누구든지 고용할 수 있는 용병 아닌가?”
한상태가 그렇게 말하면서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이준기는 한상태의 눈길을 외면했다.
이상덕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기는 협회와 특수 고용계약이 되어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언론에 보도된 것은, 계약 내용의 일부일 뿐이야.”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이준기! 대답해라!”
한상태가 다시 이준기를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이준기는 여전히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길수연이 이준기의 팔을 흔들면서 다그쳤다.
“대답해요! 무슨 말이죠, 저게? 준기 씨!”
이준기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이상덕은 냉큼 대답해버렸다.
“이준기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나와 협력하기로 했다. 으하하하!”
당연한 얘기지만, 계약서는 언론에 공개된 내용이 전부다.
이면계약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이준기는 잠자코 있었다.
길수연이 다시 그의 팔을 흔들며 다그쳤다.
“준기 씨! 말을 해봐요!”
길수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준기가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그의 귓가에 악마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