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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9: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들 (4)
Episode 29: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들 (4)
“그, 그런 것도 외국인 구원자들에게 들은 정보입니까?”
“네. 유럽어 쓰는 사람들에게 라틴어는, 우리말 쓰는 사람들에게 한자와 같은 거니까요. 그쪽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무슨 얘기인지 대강 알 수 있죠.”
“팍티키무스는 뭐예요, 그럼?”
“팍티키우스는 실용을 뜻합니다. 실용적인 승리를 원하는 거죠.”
김나리가 끼어들었다.
“프로세르피나는 죽음? 그리스 신화에서 들은 것 같아서요.”
“네. 저승의 신 하데스의 아내 이름이 페르세포네죠. 많은 사망자, 잔혹한 죽음을 원하는 심사위원입니다.”
다시 김범규.
“180점이 돼야 보상이 업그레이드된다는 거죠?”
“네.”
“지금 159점이니까, 한 게임 더 뛰고 180점 되기를 바라는 건 무리겠군요.”
“지금까지 최고 점수가 20점이니까요. 무리라고 봅니다.”
“두 경기를 더 뛰면, 인명피해가 발생할까요?”
“제가 그걸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죠.”
“신다은 탱커가 계속해서 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김범규의 말에 모두들 신다은을 쳐다보았다.
경기장 한쪽 구석에 털썩 앉은 채, 멍하니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음속에 감추고 있던 말을, 몬스터의 정신 지배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뱉어낸 다음이다.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준기에게 덤벼들었던 것 역시 어떻게 뒷감당을 해야 할지 난감할 것이고.
경기장 마스터, 에픽테투스가 물었다.
“보너스 스테이지를 뛸 것인지, 그대 검투사들에게 내가 묻노라.”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이어졌다.
“보너스! 보너스!”
“다음 상대도 때려눕혀!”
“여기서 멈추지 마라!”
“이준기! 이준기!”
사회자 콘첸투스가 멘트를 날렸다.
“자, 우리의 검투사들. 어떤 선택을 내릴지?”
관중들의 환호성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
그야말로 경기장 전체가 관중들의 환호성에 파묻혀버린 상황.
이준기가 공격대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경기장 건너편의 도르래 문이 올라간다.
그 너머 어둠 속에서부터, 희끄무레한 모습이 나타나 점점 윤곽이 분명해진다.
온몸에 회색 잿가루를 바른 듯한 모습의 거한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온다.
“기대해 주십시오! 검투사들에게 도전하는 열한 번째 도전자! 놀 주술사 헥수스!”
관중들의 환호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공격대원들이 의문을 표했다.
“에에? 놀 주술사? 놀이라면 아까도 잡았는데?”
“저놈이 어둠의 정령보다 세다는 거야?”
“뭔가 숨겨진 요소가 있는 건가요?”
이준기가 대답했다.
“아뇨. 숨겨진 요소는 없습니다. 저놈이 센 거예요.”
경기장 마스터, 에픽테투스가 일어나 팔을 뻗어 보이자, 관중들의 환호가 가라 앉았다.
에픽테투스가 놀 주술사를 향해 외쳤다.
“주술사 헥수스여, 안녕하십니까?”
“나는 아직 정정하다네, 에픽테투스.”
“이렇게 누추한 자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내 노력 함세.”
에픽테투스의 손짓을 따라, 다시 관중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헥수스! 헥수스!”
“검투사 꼬맹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라고!”
“압도적인 힘을!”
관중들의 환호성이 잦아들어 가자, 사회자 콘첸투스가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열한 번째 시합. 주술사 헥수스 대 검투사들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사회자의 시작 선언에도 불구하고, 헥수스는 가만히 공격대원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최현이 물었다.
“왜 가만히 있죠? 선빵을 날릴까요?”
“아뇨.”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요?”
“막강한 상대입니다. 지금은 빈틈이 안 보여요.”
주술사는 갑자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의 손에 나무 말뚝 여러 개가 쥐어졌다.
구원자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놀 주술사도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꺼낸 것이다.
그는 구원자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땅바닥에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말뚝을 땅에 대고, 들고 있던 지팡이의 머리 부분으로 탁탁 쳤다.
“저, 저게 도대체 뭐 하는?”
“주술에 필요한 도형을 그리는 겁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어야 돼요?”
“주술사의 마나가 바닥나기 전에는, 우리가 뭘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요.”
“마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겁니까?”
“그게 최선의 수입니다.”
최현은 그 말을 듣고 앓는 소리를 냈다.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그러나 일단 이준기의 말대로 기다린다.
오히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황채성이 창을 꼬나잡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성질 급한 사람이 요긴한 상황도 있는 법이지.’
주술사가 땅바닥에 말뚝을 전부 박는 걸 기다리는 것보다 더 나은 상황이 있기는 하다.
그걸 대놓고 주문하기가 어려워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채성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죽지는 않을 테니까.’
이준기는 달려 나가는 황채성을 주시했다.
이제부터, 마나 계산을 해야 한다.
블랙잭에서 카드 카운팅을 하듯이.
*****
자기 성질을 못 이기고 뛰어나가는 황채성을 바라보면서, 이준기는 후배 구원자들을 상대로 했던 자신의 예전 강의 내용을 떠올렸다.
“똑같이 주술사라고 불리지만, 놀 주술사는 오크 주술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훨씬 세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상대하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요. 오크 주술사도 꽤 강력한 마법을 쓰지만, 압도당한다는 느낌까지는 받지 않잖습니까?”
“놀 주술사는 압도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게임 많이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투에 돌입하자마자 마구 연쇄적으로 마법을 터뜨리는 그런 마법사가 있잖아요? 놀 주술사가 바로 그렇습니다. 저주 걸고 나서, 화염구 날리고, 그 다음에 이어서 매직 미사일 쏘고, 이런 게 아니에요. 그 모든 게 한꺼번에 날아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시간이 멈추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경기장 한가운데 말뚝을 박는 놀 주술사 헥수스.
경기장의 한쪽에는 탱커 김범규, 그리고 사실상 공격대장 역할을 하는 이준기를 중심으로 공격대원들이 서 있다.
헥수스가 말뚝을 세 개째 박으려고 할 때, 더 이상 참지 못한 황채성이 창을 들고 달려 나갔다.
놀 주술사를 기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마나를 고갈시키는 전법을 써야 하는데,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지금 헥수스가 하려는 대로, 마나를 쏟아부어야 하는 대형 마법을 쓰게 놔두는 것이 한 가지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도 문제고, 대형 마법의 결과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더 효과적인 것인데, 문제는 이 방법이 조금 비윤리적이라는 점이다.
“야아앗!”
황채성은 기합을 넣으며 공중으로 점프를 했다.
자신의 체중을 실어, 강력한 창 찌르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황채성의 창끝이 주술사 헥수스의 얼굴 바로 앞, 그야말로 한 뼘 정도의 거리까지 도달했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폭발적인 마법의 연쇄가 일어났다.
일단 공중에서 황채성의 몸이 얼어붙었다.
동시에 주술사 헥수스의 몸을 얼음 보호막이 감쌌다.
그게 다가 아니다.
두 개의 얼음 마법이 벌어지는 동시에, 황채성의 미늘창이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고 떨어져 땅바닥에 박혔다.
미늘창이 박힌 부분의 땅이 울퉁불퉁 움직이더니, 어느새 덩어리가 되어 일어났다.
진흙 골렘이다.
그리고 또, 공중에서 얼어붙은 황채성을 향해 매직 미사일이 연이어 날아가 박혔다.
매직 미사일 다섯 개를 모두 맞고 나서, 황채성은 바닥에 떨어졌다.
놀 주술사는 마나의 책, 단일 계열 마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다른 원소 계열 마법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성흔 ‘라로쉬의 변칙’을 가지고 불의 책만으로 다른 계열의 스킬을 일부 쓸 수 있는 헬렌 카자크와 유사하다.
하지만 소요되는 스킬 책 일부만을 대체할 수 있는 ‘라로쉬의 변칙’보다 놀 주술사의 특성이 훨씬 강하다.
헬렌 카자크는 불 계열과 어느 정도 상관이 있는 스킬만을 융통해서 쓸 수 있지만, 놀 주술사는 마나 계열과 상관없는 어떤 스킬이라도 쓸 수 있기 때문.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마법 공격을 맞고 황채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몸 위로, 김나리의 힐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서 일어난 진흙 골렘이 황채성의 창을 주워들고 김나리에게 달려들었다.
황채성에게 공격을 퍼붓는 주술사를 향해 달려가던 김범규가 뒤를 돌아보았다.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김나리의 머리 위로 진흙 골렘의 창끝이 날아들었다.
*****
차킹!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다은이 진흙 골렘의 창끝을 방패로 쳐내고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외쳤다.
“흙덩어리 괴물은 제가 상대할게요!”
신다은이 쳐낸 창이 진흙 골렘의 손에서 떨어져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았다.
땅으로 떨어지던 창이 갑자기 공중에서 바로 서더니, 마치 미사일처럼 호선을 그리면서 신다은에게 날아왔다.
놀 주술사가 염력으로 창을 날린 것이다.
방패로 진흙 골렘의 주먹을 맞받아치던 신다은이 옆구리에 창을 맞고 쓰러졌다.
김범규가 주술사에게 검을 날렸지만, 얼음 보호막에 막혔다.
김범규의 반대 방향에서 이준기는 놀 주술사를 향해 돌진했다.
이제 마나가 거의 떨어졌다는 판단.
이준기의 검, ‘오캄’의 발동 효과는 놀 주술사에게 효과적이지 않다.
막을 수 있는 마법이 거의 없다.
하지만 ‘오캄’의 대미지는 그에게도 충분히 아플 것이다.
퍼퍽!
오캄에 이어 카데쉬. 양손의 쌍검이 얼음 보호막에 막혔다.
보호막은 때려 부수어 깰 수밖에 없다.
관중석을 향해 사회자 콘첸투스가 외쳤다.
“검투사들이 제법이군요. 대 주술사 헥수스가 고전합니다!”
헥수스가 오른팔을 내리자 날아다니던 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헥수스는 이제 왼팔을 들고 마치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듯한 손동작을 취했다.
신다은과 최현을 공격하던 진흙 골렘이 공중으로 한 뼘 정도 솟아오르면서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준기가 골렘을 향해 뛰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골렘을 공격하세요. 모두! 빨리 죽이지 않으면 주술사가 마나를 회복합니다!”
*****
관중석이 숙연해졌다.
환호성이 사라지고, 모두들 놀 주술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놀 주술사는 회오리바람에 휩싸인 채 공중에 떠 올라 있다.
그가 이준기에게 말했다.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알고 있구나.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구원자일 뿐이다.”
“이미 열 번의 전투를 이기고도 나에게 도전한 이유는 무엇이냐?”
“더 좋은 보상을 원했을 뿐이다. 검투사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
주술사가 관중석 쪽으로 고개를 돌려 사회자 콘첸투스에게 물었다.
“콘첸투스여, 이들은 드라마를 선택한 것이렷다?”
“네, 그렇습니다. 헥수스님.”
“지금까지 몇 점이나 모았느냐?”
“10라운드까지 159점입니다.”
“그렇다면 21점이 필요하겠군.”
“네, 그렇습니다. 헥수스님.”
“그렇다면 말야, 콘첸투스. 아니, 심사위원 여러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겠소?”
심사위원장 라크리무스가 자신의 양옆을 교대로 돌아보더니 대답했다.
“말씀하시오, 위대한 헥수스여.”
“이들에게 21점을 줄 수 있겠소? 이들은 나를 이겼소.”
“무슨 말씀입니까, 헥수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끝났다네. 내가 졌지. 이제 마나가 하나도 남지 않았어. 더 이상 주술을 쓰지 못하는 주술사는 싸움에 진 게 맞지 않나?”
“흠. 그렇군요. 하지만 21점이나 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21점을 주지 않으면, 이들이 다음 경기를 또 치러야 할 게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걸 왜 헥수스님이 신경 쓰십니까?”
“이들이 살아 있어야, 내가 나중에 명예라도 회복할 게 아닌가? 다음번에는 내가 도전자가 되겠지.”
경기장 마스터, 에픽테투스가 끼어들었다.
“이보게, 헥수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에픽테투스, 친구여. 이자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적은 적일 뿐이야.”
“아니, 그렇지 않네. 에픽테투스. 그건 자네도 알지 않나. 우리에게 진정한 적은 따로 있으니까.”
에픽테투스는 두건 안쪽의 턱 위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잠깐 생각 중이라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는 제스쳐.
잠시 후에, 그는 고개를 들고 관중석을 향해 외쳤다.
“11라운드도 검투사들의 승리다. 그리고 내 직권으로 저들에게 21점을 수여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