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80화 (8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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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9: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들 (3)

Episode 29: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들 (3)

테네브리우스라면, 어둠의 정령이다.

이름씩이나 있는 정령이므로 일반 정령에 비해서 세기는 하지만 정령은 정령.

화염 정령이나 바람의 정령과는 달리 원소계 마법을 쓰지는 않는다.

원소계 정령이 나올 경우를 대비해서 오두막 자판기에서 원소계 화살을 사 온 이준기로서는 조금 아쉬운 상황.

하지만 공격력으로 압도하면 되는 상대이므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변수가 있기는 한데.’

멀리서 문이 열리고 자동차 매연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둥실둥실 공중에 뜬 상태로 공격대원들 앞으로 다가온 정령이 낮은 목소리로 주변 공기를 울렸다.

“어리석은 필멸자들이여, 어둠의 고통을 맛보게 되리라.”

검은 가스 덩어리 같은 몸체의 상단부에는,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그 두 개의 구멍이 공격대원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최현, 김나리, 김범규, 신다은, 이준기, 황채성.

모두를 한 번 둘러본 정령의 눈은 다시 돌아와 신다은을 노려보았다.

잠시 멈춰있던 두 개의 붉은 빛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예상대로 되자, 이준기는 조금 불안해졌다.

‘역시나로군. 인간들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는 법.’

정령의 낮은 목소리가 공격대원들의 귀를 울렸다.

“마음속의 어둠을, 이제 풀어 놓아라.”

신다은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피해! 흩어져!”

이준기가 외쳤지만, 신다은이 빨랐다.

신다은이 휘두른 검에 김범규가 어깨를 맞고 비틀거렸다.

*****

“뭐, 뭐야! 신다은!”

“신다은! 정신 차려!”

눈이 붉게 타오르는 신다은에게서 떨어지면서 공격대원들이 외쳤다.

“음하하하하!”

어둠의 정령, 테네브리우스의 낮은 웃음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관중들이 환호하며 외치기 시작했다.

“테네브리우스! 테네브리우스!”

“지금이다! 그 스킬을!”

“테네브리우스여, 비장의 기술을!”

모든 것을 미리 설명할 수는 없다.

어둠의 정령이 나왔다고 해서 그가 쓰는 모든 기술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공격대원이 놀라는 일은 막아야 한다.

이준기가 공격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놀라지 마세요! 평소와 똑같습니다. 무슨 괴물이 나타나든, 오크라고 생각하고 싸우세요!”

테네브리우스가 소용돌이치면서 땅바닥을 뚫고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신다은을 제외한 공격대원들 각자의 앞에 적이 하나씩 나타났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흑같이 색을 입힌 모습이지만, 자신과 같은 모습의 도플갱어.

그들이 검과 창을 휘두르며 각자의 상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신다은.

검을 휘둘러 김범규에게 일격을 가했던 신다은은 잠시 동안 얼이 빠진 것처럼 서 있었다.

테네브리우스가 다섯 개의 도플갱어로 분신하자, 신다은의 눈에 다시금 붉은 빛이 돌았다.

신다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도플갱어와 싸우는 이준기를 발견하고, 그녀는 외쳤다.

“석이 오빠의 원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한의 대상이 자기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조금 벙찐 것도 사실이다.

결국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정당방위라든가 긴급피난이라는 것은 단지 법리적인 이야기.

전체로서의 효율과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사회가 판단하는 부분일 뿐, 사람들의 마음은 다르다.

보이그룹에서 활동을 했더라도 정상급 인기를 얻었을 외모의 주석.

게다가 언제나 웃는 얼굴.

인기도 많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는 원한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 던전에 들어오고, 그 던전에서 어둠의 정령을 만나서, 그 정령이 원한 소환술을 쓰게 되는 일련의 우연이 계속될 줄이야.

어둠의 정령은 마음속 어둠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조종한다.

여기 있는 여섯 명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원한은, 바로 신다은이 이준기에 대해 품은 악의라는 것이다.

적어도 정령 테네브리우스의 판단은 그렇다.

이준기는 자신의 도플갱어와 검을 맞대는 동시에 신다은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도플갱어. 실상은 그저 감각을 현혹시키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어느 정도의 신체적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본체에 대항할 능력은 애시당초에 없다.

근거 없는 두려움에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쉽게 해치울 수 있는 상대다.

신다은의 돌진을 보고, 이준기는 도플갱어를 발로 차 자신에게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돌진해오는 신다은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받아넘겼다.

‘아깝지만, 더는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다.’

이준기는 스킬 ‘귀검’을 발동했다.

- 귀검. 어둠 4, 바람 6 소요. 즉시 시전. 자신의 이동 속도를 400%, 공격 속도를 100% 증가시킵니다. 2초 동안 지속됩니다.

순식간에 도플갱어의 뒤로 돌아가 백스탭을 먹인 이준기.

곧바로 신다은의 오른팔을 낚아채고 그녀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떨어뜨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

신다은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무기가 사라진 자신의 오른손을 보고 경악했다.

“으아아!”

신다은은 예비 무기로 인벤토리에 들고 있던 ‘오크 학살자의 검’을 빼 들었다.

26레벨인 이준기를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허접한 무기.

이준기는 도플갱어의 등에 찔러 넣었던 단검을 빼 들면서 신다은을 막아 섰다.

“지금 일은 나중에 기억하지도 못할 테지만. 신다은 씨! 어쩔 수 없이 공격하겠습니다.”

“석이 오빠의 원수! 죽여버릴 거야!”

신다은의 무기를 한번 쳐낸 다음, 이준기는 경기장의 한가운데를 흘끗 쳐다보았다.

마른 땅 위에 검은 구름이 부글거리고 있다.

아직은 바닥에 깔린 정도.

이준기를 제외하면, 아직 아무도 자신의 도플갱어를 처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모든 도플갱어가 쓰러지면, 테네브리우스가 다시 자기 형체를 되찾게 된다.

신다은은 현재 정신 지배 상태다.

어차피 쓰러뜨려야 한다.

테네브리우스가 자기 형체를 되찾기 전에 무력화시키는 것이 정석 전략이다.

“공격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용서하세요.”

“석이 오빠의 원수! 죽어라!”

복사품이 아닌 본체인 신다은이야말로 현재 최강의 적이다.

형체만 닮았을 뿐, 훨씬 열악한 전투 능력을 가진 도플갱어에 비하면 모든 점이 우월하다.

스킬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점이 무엇보다 위협적이다.

이준기에게 허접한 무기를 휘두르던 신다은이 갑자기 멈춰 섰다.

“저지!”

어두운 극장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가 내리꽂히듯이.

이준기에게 굵다란 빛의 줄기가 내리쬐었다.

이준기의 몸이 뒤로 5미터 날아갔다.

동시에, 그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신다은이 탱커 스킬, ‘저지’를 발동한 것이다.

이제 무려 15초 동안이나 이동 속도가 20% 느려진다.

“죽어! 죽어! 죽어!”

신다은이 칼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면서 다가오며, 외쳤다.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발을 떼었지만, 이준기의 발목은 모래주머니라도 찬 것처럼 무거웠다.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전투는 역시 만만치 않군. 이 상태로 스킬 책을 계속 낭비하는 건 곤란한데.’

이동 속도가 20% 느려지기는 했지만, 달아나는 이준기를 따라잡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신다은은 연이어 스킬을 발동했다.

“둔화!”

이동 속도는 물론 공격 속도까지 느려지게 하는 스킬.

“늪!”

결국에는 아예 발을 묶는 스킬까지 발동했다.

결국 이준기도 스킬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

“회오리!”

다가오던 신다은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권총을 들고 골목길을 쫓아오던 자객을 상대로 썼던 바로 그 스킬.

이준기는 땅바닥에, 신다은은 하늘에 떠올라 고정된 상태로 서로를 노려보는 상황이 되었다.

“이준기! 용서하지 않겠다!”

15초 동안 둘이 서로를 주시하며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공격대원들이 하나둘 도플갱어에게서 풀려났다.

황채성을 시작으로, 김범규, 그리고 최현.

“조금 있으면 신다은이 회오리에서 풀려납니다. 황채성 님은 김나리 힐러를 도와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저를 도와주세요!”

이준기의 발이 먼저 풀리고, 곧이어 신다은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김범규가 방패로 뒤통수를 강타하자, 신다은이 쓰러졌다.

조금 후에는 황채성의 도움으로 김나리가 도플갱어를 물리쳤다.

도플갱어가 쓰러진 자리에서 그림자가 경기장 가운데로 끌려갔다.

그 자리에 소용돌이치고 있던 검은 구름 덩어리가 마지막 그림자 조각을 흡수하자, 어둠의 정령 테네브리우스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이 경기장의 챔피언이다!”

테네브리우스의 오른팔이 부풀어 올랐다.

오른손 검지를 들어 공격대원들을 겨냥하는 테네브리우스.

손가락에서 어둠의 화살이 연이어 발사되기 시작했다.

“뱅! 뱅! 뱅!”

어둠의 탄막. 기본적으로 독화살이다.

“계속해서 쏘지는 못합니다. 녀석의 총질이 끝나면 다 같이 돌진하죠.”

“알겠습니다.”

“김나리 힐러님. 검은 화살 맞은 분들, 중독 해제 부탁드리고요.”

“네. 알겠어요.”

탄환이 다 떨어지자, 정령의 오른팔이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이준기가 양손에 무기를 들고 돌진하자, 공격대원들 전원이 함께 달려들었다.

“좋다. 이번에는 네 친구의 시체와 한번 싸워봐라!”

테네브리우스는 왼손을 들어 쓰러져 있는 신다은을 향해 뻗었다.

테네브리우스의 왼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신다은을 향해 흘러간다.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상대로 강령술을 쓰려 하다니.’

이준기는 스킬 ‘번개 화살’을 날려 테네브리우스의 스킬 시전을 중단시켰다.

테네브리우스의 손가락에서 시작해 신다은을 향해 다가가던 검은 연기가 흩어졌다.

“이, 이놈!”

“그게 다가 아니다!”

테네브리우스가 다시 강령술을 시전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이준기의 왼손 무기, 카데쉬에 의해 시전이 끊겼다.

- 카데쉬

- 단검. 에픽 등급.

- 5~7 대미지. 공격속도 1.25초.

- 발동 효과: 유효 타격 시 일정 확률로 적의 스킬 시전을 끊습니다.

“으아아! 이놈!”

테네브리우스가 울부짖으며 산산이 흩어졌다.

사회자 콘첸투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스, 승자가 결정됐습니다! 검투사들이 어둠의 정령 테네브리우스를 물리쳤습니다!”

*****

“이준기! 이준기!”

테네브리우스의 이름을 연호하던 관중들이 이준기의 이름을 연호했다.

막타뿐 아니라 가장 많은 대미지를 입힌 것도 이준기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스킬을 끊은 것도, 정신 지배를 받은 신다은의 공격을 물리친 것도 이준기다.

공격대원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관중들에게는 스크린을 통해 정보가 전해지고 있던 것이다.

원형 경기장 포맷의 던전에서 몇 차례 경험했던 일이지만, 뻘쭘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검투사라는 이름으로, 공격대원 전체가 힘을 합쳐 쓰러뜨린 것인데, 관중들에게 환호받는 것은 그중 한 사람뿐이다.

스포츠를 즐기는 관중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공격대원들 사이에 분열의 씨앗을 심는 행위이기도 하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심사위원들의 점수표가 공개되었다.

- 팍티키무스 6점.

- 프로세르피나 8점.

- 라크리무스 5점.

합계 19점. 나쁘지 않다.

10라운드 만에 총 159점을 모은 것은 대단히 훌륭한 성적이다.

사망은커녕 심각한 부상을 입은 공격대원도 없다.

신다은이 많이 다치기는 했지만, 힐링 포션으로 충분히 커버되는 상황.

던전 클리어에 필요한 점수는 150점.

그 목표는 이미 초과달성했다.

그러나 보상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21점 이상을 더 모아야 하는 상황.

“150점이면 던전 클리어, 그 이후로는 30점마다 보상이 업그레이드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준기 구원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쉽지는 않다고 봅니다. 보셨다시피, 라크리무스는 점수를 후하게 주지 않아요.”

“정말 저 심사위원 뭡니까? 계속 1점, 2점 주다가 막판에 5, 6점 주네요?”

“라크리마는 라틴어로 눈물을 의미합니다. 눈물 나는 승리에만 점수를 후하게 주겠다는 거죠. 팍티키무스와 라크리무스가 동시에 심사위원이 되었으니, 둘을 다 만족시키는 결과를 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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