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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9: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들 (2)
Episode 29: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들 (2)
관중석의 제일 좋은 자리에, 경기장 마스터 에픽테투스와 사회자 콘첸투스가 나란히 앉았다.
피, 또는 황금을 선택했다면 등장하지 않았을 인물들이 차례로 걸어들어왔다.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두건과 망토로 온몸을 휘감은 그들.
모두 세 명인 그들은 사회자와 마스터의 자리 바로 아래쪽에 자리를 잡았다.
사회자가 콘첸투스의 목소리가 경기장의 공기를 갈랐다.
“오늘의 심사위원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가운데 앉아 계신 심사위원장, 라크리무스!”
라크리무스라면, 드라마는 비극이어야 한다고 믿는 자다.
가장 좋아하는 시나리오는 전멸.
이 자가 심사위원장이 되다니, 운이 없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다음은 라크리무스의 오른쪽입니다. 프로세르피나!”
프로세르피나는 등장인물이 많이 죽어야 드라마가 산다고 생각한다.
가장 자주 심사위원으로 나온다.
“라크리무스의 왼쪽은, 팍티키무스!”
팍티키무스는 압도적인 힘, 절대적인 징벌, 질서를 거스르는 자에 대한 단호한 처단을 선호한다.
오늘 공격대 구성을 생각해보면, 팍티키무스가 심사위원장이었다면 가장 좋았을 것.
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검은 두건을 쓴 인물들이 차례차례 자리에서 일어나 관중의 환호를 받았다.
김범규가 불만인 듯 중얼거렸다.
“심사위원 소개라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심사위원 점수 총합 150점을 달성해야 던전 목표가 달성된다.
거기에서 30점이 추가될 때마다 보상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인데, 심사위원장이 라크리무스로 정해졌으니 포기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법.
이준기는 공격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압도적인 승리를 좋아하는 팍티키무스가 심사위원으로 있습니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줍시다.”
김나리가 물었다.
“압도적인 승리라면 뭘 말하는 거죠?”
“무손실 승리죠.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는.”
“그게 가능할까요?”
“뒤로 갈수록 강한 상대가 나올 테니, 초반에 점수를 쌓아야 합니다.”
“하지만 팍티키무스는 심사위원 셋 중 하나일 뿐이잖아요?”
“세 명의 기호를 전부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어리둥절해진 신다은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사회자 콘첸투스가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오프닝 게임 삼아 첫 상대는 말랑말랑한 녀석들로 준비했습니다. 늑대들입니다!”
늑대를 상대로 드라마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다림에 지친 관중들은 본 게임이 시작된다는 말에 환호성을 보냈다.
신다은을 돌아보면서 이준기가 대답했다.
“평소와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죠.”
*****
늑대들은 열 마리나 있었지만, 곧 조용해졌다.
선공 몬스터도 아닌 늑대들을 굶겨서 강제로 싸움에 동원한 것이니 당연하다.
베기 한 번, 도끼질 한 방에 한 마리씩 나가떨어졌다.
사회자 콘첸투스가 외쳤다.
“좋습니다. 첫 라운드는 무사통과! 심사위원들 점수를 확인해 볼까요?”
심사위원들의 점수가 그들 머리 위에 표시되었다.
팍티키무스 10점, 프로세르피나 6점, 그리고 라크리무스 1점이다.
라운드당 15점은 따야 하는데, 17점이라면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첫 라운드라는 걸 생각하면 좋은 출발은 아니다.
비극적인 전개를 원하는 라크리무스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두 번째 상대입니다. 고블린 용병단!”
사회자의 외침에 따라 문이 열리고 고블린 용병 열 마리가 뛰쳐나왔다.
쌍 단검을 들고 달려든 이준기가 채 진형을 잡지도 못한 고블린 한 마리를 고꾸라뜨렸다.
빠른 한 방에 고무된 공격대원들이 고블린들을 향해 돌진했다.
너무 의욕이 앞선 황채성이 허리쪽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곧 김나리의 힐이 들어왔다.
두 번째 라운드도 가볍게 정리.
사회자의 신호에 따라 심사위원들의 점수가 공개되었다.
팍티키무스 10점, 프로세르피나 7점, 그리고 라크리무스 1점이다.
팍티키무스가 기분이 좋은지, 황채성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음에도 10점을 주었다.
두 라운드 합쳐서 35점이라면, 아직은 순조롭다.
세 번째 라운드부터 오크들이 나왔다.
3라운드에 고블린 버서커, 4라운드에 오크 도적단, 5라운드에 사냥개들을 동반한 오크 사냥꾼 부대, 그리고 6라운드에는 엘리트 오크 경비병 형제.
모두 아무런 문제 없이 클리어했다.
7라운드에 나온 오크 주술사를 상대로 신다은이 조금 다쳤지만, 중급 힐링 포션으로 대처가 되는 수준의 가벼운 부상.
라크리무스는 계속해서 1점을 주었지만, 팍티키무스가 9점 이상을 계속 주는 바람에, 점수는 양호하게 쌓이고 있었다.
7라운드를 마치고 106점. 순조로운 흐름이다.
스킬 책 소모도 거의 없이 7라운드째를 돌파하자, 사회자가 조금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좋아요, 좋아. 다음 상대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를 겁니다. 날개 달린 괴수를 상대로 검투사들은 어떤 대결을 펼칠지? 기대가 됩니다. 여덟 번째 상대는, 와이번!”
원형경기장에 야수형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와이번이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어차피 브릴리언트 길드도 ‘와이번 네스트’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연습의 기회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점수가 낮게 나올 것이다.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준기가 팀원들을 향해 외쳤다.
“탱커 두 분은 와이번 정면에서 방패로 최대한 방어하세요. 머리와 꼬리 공격이 주로 들어올 겁니다. 딜러분들은 날개를 공략해야 합니다. 제가 오른쪽 날개를 맡을 테니, 두 분이 왼쪽 날개를 맡아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김범규가 방패를 높이 들고 와이번을 향해 달려 나가자, 신다은이 그를 따라 달렸다.
이준기는 오른쪽 날개 쪽으로 파고들었다.
황채성이 미늘창을 들고 왼쪽 날개를 향해 달려가고, 최현 역시 와이번의 왼쪽 날개 쪽으로 자리를 잡고 화염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캬하아!”
와이번이 위협음을 내며 꼬리를 치켜들어 김범규를 향해 내리꽂았지만, 김범규는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잘 막았다.
다음으로 와이번은 날개바람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준기가 맹공을 퍼부은 오른쪽 날개에 출혈이 심했다.
와이번이 날갯짓을 하려다가 오른쪽으로 쓰러지자, 왼쪽 날개를 향해 황채성이 미늘창을 찔렀다.
“뀨에엑!”
와이번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꼬리를 들어 올려 닥치는 대로 아무 곳이나 찔러댔다.
김범규, 이준기, 신다은이 차례로 와이번의 꼬리를 피하거나 막아냈다.
다음 순간, 와이번이 꼬리를 들어 올려 황채성을 향해 내리찍었을 때, 그는 왼쪽 날개에 박힌 미늘창을 꺼내려고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크억!”
황채성이 미늘창을 손에서 놓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닿자마자, 그는 사방으로 몸을 굴리며 고통스럽게 절규했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도, 독이!”
김범규의 뒤쪽에 서 있던 김나리가 차분하게 ‘해제’ 스킬을 시전했다.
그러는 사이, 이준기는 양쪽 손에 든 단검을 와이번의 옆구리에 찔러 넣고는 곧바로 ‘마나 폭발’을 터뜨렸다.
꿈틀거리던 와이번의 몸짓이 잠잠해졌다.
독이 해제되자, 황채성은 인벤토리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 꿀꺽꿀꺽 들이켰다.
“휴!”
신다은이 숨을 내쉬면서 이마에 땀을 닦았다.
“오늘 선수들 컨디션이 정말 좋군요! 9라운드에도 검투사들의 행운은 계속될까요? 다음은··· 놀 챔피언입니다!”
*****
“어엇! 저것이 놀!”
“키가 엄청 크네요.”
“무기도 엄청 긴데요. 5미터는 되겠네요.”
키가 3미터에 달하는 놀을 처음 보는 공격대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고블린이나 오크는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서 많이 접하는 몬스터이고, 예상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놀은 그렇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다양한 매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놀이지만, 대개 놀은 오크보다 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르다.
무엇을 어떻게 정하든, 던전을 설계한 자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오크보다는 놀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놀의 얼굴은, 알다시피 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개라는 종의 생김새는 천차만별이다.
던전에 등장하는 놀의 얼굴은 셔틀랜드 십독이나 콜리를 닮았다.
전반적으로 긴 얼굴, 갈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긴 털.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세트(Seth)가 연상되는 모습.
놀 챔피언은 먼 거리에서 공격대원들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긴 창을 꼬나잡고 곧바로 돌진해 들어왔다.
자신을 향해 점프하면서 창을 높이 드는 놀 챔피언을 보고, 김범규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었다.
놀 챔피언은 김범규의 방패를 발로 차면서, 동시에 자신의 오른쪽으로 창을 던졌다.
멀뚱히 서 있던 최현을 향해 놀 챔피언의 창이 날아들었다.
“제법이군.”
놀 챔피언이 그렇게 말하면서 오른손을 들었다.
최현을 향해 날아왔다가 신다은의 방패에 막혀 땅바닥에 떨어졌던 창이 그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망연자실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최현이 자신에게 날아온 창을 막아준 신다은에게 말했다.
“고, 고마워, 신다은 씨.”
놀 챔피언이 공격대원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자, 덤벼라. 인간들이여.”
김범규가 이준기에게 물었다.
“이놈에 대한 정보는 뭐 없어요?”
“우월한 리치를 이용해서 몰아붙일 거예요.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동시에 돌격할까요?”
“좋습니다.”
놀 챔피언은 마치 파리라도 쫓듯이, 긴 창을 좌우로 한 차례 휘둘렀다.
창을 거둘 때, 김범규가 놀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스킬을 더 아껴서 이득 볼 것이 많지 않다. 이제부터 진지하게 해야지.’
이준기는 김범규가 달려드는 순간을 포착해서 ‘점멸’을 썼다.
동시에 앞과 뒤로 파고든 적에게 당황해서, 놀 챔피언은 앞쪽으로 달려든 김범규에게 무릎 킥을 날렸다.
방패로 막았지만, 김범규는 놀 챔피언의 힘에 밀려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 순간, 신다은이 방패로 몸을 보호하면서 달려들어 왔다.
“제, 제법이군!”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이준기의 공격을 막아내던 놀 챔피언이 신다은을 향해 말했다.
신다은이 방패를 내밀고 몸을 밀어붙이면서 오른손의 장검을 내질렀다.
놀 챔피언은 신다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반걸음을 내디뎠다.
그 틈을 타서, 이준기는 놀 챔피언의 단검을 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연속 동작으로 왼손의 단검을 놀 챔피언의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흐억!”
놀 챔피언이 무릎을 굽히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오른손에 든 창을 휘둘러 신다은과 이준기를 타격하려고 했지만, 신다은은 방패로 막았고, 이준기는 뒷걸음질을 쳐서 피했다.
“죽어라, 이놈들! 웨르 하시드 파샤!”
인간형 몬스터들의 주문은 거의 다 외우고 있는 이준기.
놀 챔피언이 어떤 스킬을 쓰려는지 파악하자, 그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배어 나왔다.
- 나선참 난무. 에픽 등급 이상 폴암(pole arm) 필요. 시전 시간 5초. 반경 5미터 이내의 모든 적들을 차례로 공격합니다. 현재 폴암의 선단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적에게 중력가속도의 1.75배로 가속한 속도로 날아가 타격을 입힌 다음에, 첫번째 타격으로 잃어버린 운동량의 75%를 되돌려 받아···
놀 챔피언이 등장하자, 이준기는 오른손 무기를 흑요석 칼날에서 오캄으로 이미 바꾸어 들고 있었다.
- 오캄.
- 숏소드. 에픽 등급.
- 10~16 대미지. 공격속도 2.5초.
- 발동 효과: 자신에게 가해진 ‘설명이 복잡한’ 스킬을 무효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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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 시간이 5초나 걸리는 회심의 일격, ‘나선참 난무’가 오캄의 발동효과에 의해 무효화 되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놀 챔피언을 향해 공격대원들이 몰려들었다.
이준기의 공격에 무릎을 맞고 쓰러진 놀 챔피언에게 검날과 창끝이 날아들었다.
부들거리던 놀의 움직임이 멈췄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거, 검투사들이 또 이겼습니다! 9라운드 돌파!”
관중석의 환호성이 귀를 가득 메우는 가운데, 심사위원들의 점수가 그들의 머리 위에 표시되었다.
- 팍티키무스 8점.
- 프로세르피나 7점.
- 라크리무스 5점.
“오오! 심사위원장 라크리무스가 지금까지 중에서 최고점을 주었습니다. 무려 5점! 이번 싸움에 꽤 비장미가 있었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한 번 싸움에 20점을 얻은 것은 처음이다.
이로써, 9라운드까지의 점수 합계가 140점이다.
10라운드는 어떻게든 돌파만 하면 던전 클리어다.
“자··· 여러분 조용히 해주십시오! 이제 드디어 대망의 10라운드! 그 주인공은, 테네브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