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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78화 (7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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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9: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들 (1)

Episode 29: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들 (1)

11월 5일 금요일 오후 12시 40분.

이준기는 양재 시민의 숲에 위치한 브릴리언트 길드 관할 차원문 앞에 서 있다.

1시에 모여서 1시 반에 진입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조금 전, 오전 11시에는 인천 공항 차원문에 협회가 조직한 연합 공격대가 진입했다.

공격대라고는 하지만, 던전을 클리어하려는 정규 공격대가 아니라 정찰조다.

평균 레벨 24에 불과한 10명 규모의 정찰조.

던전 공략은 엄두도 못 낼 수준이다.

이준기는 일찌감치 점심을 먹고 지하철로 도착해 있었다.

최정윤 매니저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매니저님 일은 어디까지나 행정적인 서포트입니다. 이런 잡일까지 부탁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로드매니저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요. 하하.”

일찍 도착한 이준기는 상태창에 적어 두었던 메모를 들여다보며 복습 중이었다.

‘원형경기장’ 포맷의 던전이라면, 가장 단순한 포맷 중 하나다.

검투사처럼 싸우기만 하면 된다.

클리어 조건은 경기장 마스터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단체전을 연속으로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블린 투기장’과 같이 속이는 요소는 전혀 없다.

브릴리언트 길마 김범규는 ‘고블린 투기장’에서 이도협이 죽을 고생을 했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전해 들었을 것이다.

비슷한 제목의 ‘원형경기장’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고블린 투기장’ 경험이 있는 이준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1시가 되어서야 공격대원들은 현장에 도착했다.

김나리는 가까스로 시간을 맞추었으나, 김범규 이하 다른 멤버들은 5분에서 10분씩 지각.

간단하게나마 브리핑과 기자 인터뷰를 하고 나면, 1시 30분에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간의 이슈인 인천 공항 차원문으로 기자들이 몰려가기는 했지만, 이곳에도 열 명 남짓의 기자들이 와서 대기 중이었다.

기자들이 이준기를 발견하고 인터뷰를 따려고 했으나, 이준기는 상태창으로 공부 중이라고 말하면서 피했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간혹, 경기장 마스터는 던전 클리어 조건을 세팅할 때 검투사의 의견을 묻는다.

이준기의 경험에 따르면, 약 세 번에 한 번 정도 일어나는 일.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경기장 이벤트를 조금쯤은 입맛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더 쉽게 할 수도 있고,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부분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핑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헬렌한테 들은 얘기라고 하면 쉽기는 한데. 매번 헬렌에게 들었다고 하면 믿어줄까?’

믿고 안 믿고는 사실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격대장이 이준기의 건의를 받아들이는가가 문제.

해운대 던전에서는 이준기의 말이 꽤 잘 먹혔지만, 오늘도 그렇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오늘 멤버들 중에서 이준기의 실력을 직접 본 것은 김나리 힐러뿐이다.

꽤 형식적인 던전 브리핑이 끝나자, 공격대장이자 탱커인 김범규 길마가 기자단과의 인터뷰에 나섰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고.

선배 기자들이 전부 인천 공항 쪽으로 가서 그런지, 양재 시민의 숲으로 온 몇몇 새내기 기자들은 김범규에게 겁 없는 질문을 던졌다.

“인천 공항에 공격대가 들어가는 바로 그 날, 이곳 공격대가 미리 잡혀 있었군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막힌 일 아닌가요?”

“C급 던전 공격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상위 랭커들로만 구성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브릴리언트 길드 최정예가 가는데, 이준기 구원자까지 용병으로 쓰실 이유가 있습니까?”

“김범규 회장님은 안전한 던전만 골라서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범규 회장은 1994년생으로 이준기와 동갑내기다.

주요 길드 마스터 중에서는 유일한 20대.

젊은 나이에도 회장님 소리를 하도 들어서 그런지, 표정 연기가 능숙하지 않았다.

돌직구 같은 난처한 질문들이 쏟아지자, 미소를 지으려는 얼굴에 표정이 자꾸 구겨졌다.

“우연입니다. 이 던전 공략은 벌써 한 달도 전에 계획됐던 겁니다. 그렇지, 박 실장?”

“저희 길드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이준기 구원자가 이번 던전 포맷에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오해입니다. 안전한 던전만 들어갔다면, 제가 어떻게 지금 랭킹을 유지하겠습니까?”

기자들을 물리고, 김범규는 길드에서 미리 설치한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박 실장이라는 사람이 김범규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장님.”

“아, 이런 제기랄, 박 실장. 오늘 온 기자들은 왜 다 저따위야? 버르장머리 하고는···”

“미리 챙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대로 된 기자들은 전부 인천 공항으로 가버리고, 여기에는 좀 이상한 기자들이 온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미리 챙기라고 있는 게 박 실장 아냐?”

“죄송합니다, 회장님. 면목 없습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아랫사람에게 버럭 화를 내는 김범규.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길드 멤버들은 다른 일을 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못 듣는 체했다.

이준기 역시 물을 연신 들이키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범규 역시 길드 전쟁 초기에 사망한 인물.

협회장 파벌과 반협회장 파벌로 나뉘어 있는 한국의 구원자 계에서 중립 파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상덕, 박충기와 마찬가지로 그도 훌륭한 지도자감은 아닌 듯 보인다.

*****

던전 내부 구조는 대단히 단순했다.

차원문 안쪽으로 들어와서, 오두막에서 기본적인 물품을 챙기고, 바깥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부터 바닥은 포장도로다.

로마 시대 느낌이 나는, 호박돌(cobble stone) 포장 도로.

이런 던전은 처음 보는지, 공격대원 중 가장 어린 신다은 탱커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아! 길이 너무 예뻐요. 유럽 도시 같은 느낌이네요. 죽 따라가면 카페라도 나올 것 같아요.”

길을 죽 따라가자, 카페 대신 육중한 원형 성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콜로세움, 바로 그 모습이다.

로마에 있는 유적처럼 한쪽 벽이 깨진 모습은 아니고, 경주 같은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말끔한 모습의 건물.

문 앞에 그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경기장 안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준기를 제외한 나머지 공격대원들이 찔끔했다.

“이거, 들어가도 되는 건가?”

“네. 들어가시죠.”

“준기 씨는 어디에서 그런 정보를 구하는 거예요? 이런 던전에 들어와 본 건 아니잖아요?”

“오사카 포럼에서 명함 교환한 외국 구원자들한테 물어본 정보예요.”

“아아.”

이준기의 대답에 수긍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질문을 멈추었으므로, 기대했던 효과는 있는 모양.

경기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

도르래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거대한 창살 문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공격대원 몇몇이 흠칫했다.

동시에, 구원자들의 상태창이 저절로 켜졌다.

- 오늘의 검투사 명단입니다!

- 김나리. 28레벨.

- 김범규. 28레벨.

- 최현. 26레벨.

- 이준기. 26레벨.

- 신다은. 25레벨.

- 황채성. 25레벨.

상태창 화면으로 공격대원 명단이 레벨 순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쪽에서 내보내는 명단이니 정확하다.

같은 레벨인 경우라도, 경험치 바가 얼마나 차 있는지를 반영한 순위.

탱커이자 길드 마스터임에도 불구하고 김범규는 명단 맨 꼭대기에 나오지 못했다.

기자회견장에서 보인 모습을 생각해보면, 지금 김범규가 평온한 상태일 리가 없다.

체면이 구겨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준기 씨, 총 여섯 명으로 할 건데, 탱커가 두 명이라도 괜찮죠?”

“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다섯 명이라도 될 던전이니까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신다은이라고, 우리 길드 서브 탱커인데. 같이 가려고요.”

이준기는 신다은을 슬쩍 쳐다보았다.

19학번 대학생이라는데, 아직 한창 사춘기인 건지,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하다.

가볍게 컬이 진 갈색 머리칼을 두 갈래로 묶어서, 마치 만화 캐릭터 같은 느낌이다.

해운대에서 보았던 여성 탱커, 성나린에 비하면 조금 더 통통하고 키는 약간 더 작다.

성나린 수준의 인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여성 탱커라는 희귀성은 분명히 대중에게 어필하는 요소다.

관중석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소에 경기장 마스터가 나타났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과 마찬가지로, 후드와 튜닉으로 머리와 온몸을 가린 모습이다.

이래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존재가 인간인지 오크인지도 알 수 없다.

고글을 쓴 두 눈이 번쩍거리는 것이, 영락없이 유령 느낌이다.

“검투사들을 환영하노라. 나는 경기장 마스터, 에픽테투스다.”

에픽테투스.

검투사에게 선택권을 주는 마스터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선택의 영광을 너희들에게 주노라. 묻노니, 원하는 것은 피인가, 황금인가, 아니면 드라마인가?”

*****

“선택은 어느 쪽인가?”

원형경기장의 마스터, 에픽테투스가 안광을 번쩍이며 물었다.

선택지는 세 개.

피, 황금, 그리고 드라마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얼마든지 기다려 준다는 마스터의 말에, 이준기는 공격대원들에게 선택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외국 구원자들에게 얻은 정보라고 말했다.

“피를 선택하면, 단순히 살육전을 계속하면 됩니다. 열 번 정도의 시합을 이기면 돼요.”

“황금을 선택하면요?”

“전투 상대마다 가격이 정해져 있습니다. 정해진 상금에 도달할 때까지 사냥을 계속하면 됩니다.”

“피와 다른 점이 뭐예요?”

“피를 선택하면 정해진 수만큼 전투를 해야 돼요. 아마 열 번일 겁니다. 그런데 황금을 선택하면, 전투를 더 적게도 많게도 할 수 있죠.”

“현상금이 높은 적이 나오면, 10번보다 적게 싸워도 된다는 거죠?”

“네. 그겁니다.”

“드라마는요? 제일 이상한 이름인데.”

“드라마를 선택하면 극적인 전투를 해야 합니다. 꽤 주관적인 이야기이기는 한데, 전투가 끝날 때마다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매겨요. 드라마성이 있는 전투였다고 생각하면 더 높은 점수를 주죠.”

“그래서 일정 점수를 모아야 하는 거군요?”

“네.”

“다른 선택지에 비해서 쉬울까요?”

“제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좋은 드라마인가 하는 문제는 주관적인 거니까, 우리가 미리 예상할 수는 없어요. 피를 선택한다면, 그냥 10번의 전투를 하는 것. 황금을 선택한다면, 전투 횟수가 변할 수 있는 것이고, 드라마를 선택한다면 전투 횟수뿐 아니라 전투의 내용까지 결과에 반영된다고 보면 됩니다.”

김나리가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피, 황금, 드라마. 뒤로 갈수록 변수가 더 많아지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변수가 많은 게 더 좋은 걸까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공격대 구성을 생각하면요. 더 좋은 보상을 노릴 수 있는 거죠.”

“더 좋은 보상이요?”

“그렇습니다. 황금이나 드라마를 선택하면 추가 보상을 받을 수 있어요. 물론, 추가 보상을 받으려면, 단순히 던전을 클리어하는 수준보다 더 많이 싸워야 합니다.”

“얼마나 싸울지, 그건 지금 정해야 하는 거예요?”

“아뇨. 나중에 정해도 돼요.”

“그럼 무조건 황금이나 드라마로 가야 되겠군요.”

“그렇죠. 피를 선택한다면 선택권이 없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에픽테투스가 나왔다면 황금이나 드라마를 선택해야죠.”

김범규가 공격대원들을 돌아보자, 모두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드라마로 가죠.”

“드라마, 괜찮을 거 같아요.”

“압도적인 힘을 보여줍시다.”

“저도 찬성합니다.”

김범규가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이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범규나 이준기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에픽테투스가 관중석을 향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늘의 검투사들은, 드라마를 원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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