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28: 와이번 네스트 (2)
Episode 28: 와이번 네스트 (2)
“책, 책을 대신 주면 되겠지?”
한 방만 더 맞으면 죽을 걸 알고, 바람 정령이 잡음 섞인 기계음으로 말했다.
바람 정령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돌던 커다란 크기의 책, 즉 그리모어 중 하나를 주겠다는 것이다.
획득 스킬이 적힌 책을.
이준기가 노리고 들어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널 쓰러뜨리면 네가 가진 책 전부를 빼앗을 수 있다. 내가 왜 널 살려줘야 하는지 말해 봐라.”
뻔한 대사를 하는 것이 다소 뻘쭘했지만, 정해진 대사를 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주변에 보는 사람도 없는데, 연극 좀 한다고 해서 창피할 것도 없다.
바람 정령이 대답했다.
“네가 원하는 그리모어를 내가 허공의 폭풍에서 직접 가져다주겠다.”
뻔한 대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킬 그리모어는 줍자마자 저절로 사용되며,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곧바로 사라져버린다.
아이템과 달리 스킬을 다른 사람을 통해 구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바람 정령 희귀몹을 쓰러뜨려 그리모어 열 권이 나온다 한들, 익힐 수 있는 스킬이 없다면 말짱 헛수고가 되는 것이다.
“좋다.”
“원하는 스킬을 말해라.”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한참 동안 생각했다.
소멸은 어둠 책이 일곱 권이나 필요하므로 현재 익힐 수가 없다.
텔레키네시스는 활용도가 크게 떨어진다.
결국 현재 가장 유용한 스킬은 주석이 즐겨쓰던 스킬, ‘귀검’.
귀검은 어둠 책 네 권, 바람 책 여섯 권이 필요한 스킬이다.
현재 이준기는 27레벨이지만, 경험치 바가 거의 다 찬 상태.
와이번은 대개 혼자 돌아다니므로 28레벨을 달성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28레벨을 달고 어둠 책을 하나 더 찍으면 이준기의 스킬 트리는 다음과 같게 된다.
- 전문화: 어둠 6, 바람 10, 마나 12.
이렇게 만들고 나면, 던전에서 퇴각하면서 페널티를 받더라도 어렵게 구한 ‘귀검’ 스킬이 날아가는 일은 없다.
어둠 책 두 권, 또는 바람 책 두 권, 어떻게 책이 소거되더라도 귀검 스킬 발동 요건을 충족한다.
웅웅 거리는 소리가 마치 우는 소리처럼 들리는 바람 정령에게, 이준기는 말했다.
“귀검.”
멈춘 팽이처럼 한쪽으로 누워 있던 바람 정령이 꼭짓점으로 서서 맹렬하게 회전했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돌아가던 책들의 색깔이 순간순간 바뀌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던 소용돌이가 다시 잠잠해지면서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어느새 소용돌이에 휘말려 돌던 검록색 표지의 책이 바람 정령에게서 튀어나와 이준기의 손안으로 떨어졌다.
“고맙다.”
이준기의 그 말과 동시에, 바람 정령이 맹렬하게 돌면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허공의 폭풍인가 하는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리라.
*****
오후 늦게 28레벨을 달고, 이준기는 어둠의 책을 선택했다.
스킬 트리가 이렇게 되었다.
- 전문화: 어둠 6, 바람 10, 마나 12.
2레벨 강등과 함께 어둠의 책 두 권이 소멸된다 하더라도 획득 스킬 ‘귀검’은 영향받지 않는다.
동쪽 끝에 있는 와이번 서식지를 주의하면서 정찰을 끝냈다.
입구로 돌아와 바깥으로 나오려고 문을 열었다.
- 정말로 던전을 포기하시겠습니까?
- 퇴각 페널티: 2레벨 강등.
‘예’를 선택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빛의 터널을 통과하는 이준기.
인천 공항 6번 출구 바로 앞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그를 에워쌌다.
“어엇, 사람이 나왔다!”
“벌써 정리한 거야?”
“아닌 것 같은데. 차원문이 그대론데?”
중위 계급장을 단 군인이 경례를 하면서 이준기를 막아섰다.
“신분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준기입니다.”
공항 앞길이 좁아서 차원문 포위가 얇은 건지,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다 들렸다.
“이준기라는데.”
“그런데 왜 차원문이 그대로야?”
“공항에 차원문을 열어 놓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협회 놈들은 일도 안 하나!”
“구원자 놈들은 우리 세금으로 엄청난 연봉을 받잖아!”
중위가 물었다.
“퇴각··· 하신 겁니까?”
“네.”
“정찰만 하고 나오시는···?”
“네. 그렇습니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정찰 결과는 협회를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 여긴 눈과 귀가 너무 많군요.”
“네··· 알겠습니다.”
두 줄로 차원문을 둘러싼 육군 부대, 그리고 그 바깥으로 전경 부대가 서 있었다.
일반적인 차원문 포위에 비해 촘촘하고 좁은 포위망.
이준기가 기억하는 예전의 ‘인천 공항’ 차원문 포위진의 모습 그대로다.
하루에 30만 명이 이용한다는 인천 공항.
활주로가 아니라 터미널 앞이라 그나마 다행이지만, 경제적 파급 효과는 엄청나다.
경제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차원문 포위진의 크기를 최대한 작게 만든 것이다.
‘2레벨 강등은 처음 아닌가? 예전에는 저레벨 때 저등급 던전에서나 퇴각을 해봤으니.’
이준기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 26레벨.
- 전문화: 어둠 5, 바람 10, 마나 11.
- 힘 42. 민첩 81. 체력 54. 정신력 19. 물리 저항 20. 마력 저항 20.
- 성흔: 이르헬의 눈.
- 획득 스킬: 리버설, 블러, 귀검.
- 무기: 패시파이어(에픽), 오캄(에픽), 카데쉬(에픽), 흑요석 칼날(에픽).
- 방어구: 헌팅캡(레어), 이광의 장갑(에픽), 애쉬 슈라우드(레어), 경기병 바지(레어), 아킬레우스의 샌들(전설).
- 장신구: 카멜레온 디텍터(에픽), 오크 학살자의 반지(레어).
- 인벤토리: 강화 곡궁. 일반 화살 20개, 독 저항의 영약 1개, 중급 힐링 포션 12개, 기본 식량 팩 6개
새롭게 얻은 획득 스킬, ‘귀검’은 안전하다.
어둠의 책과 마나의 책이 한 권씩 빠졌고, 스탯은 민첩, 체력, 정신력이 조금씩 빠졌다.
‘26레벨이라.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났겠군. 하하.’
택시를 잡아타고 이준기는 집으로 향했다.
새로 이사한 서초구 오피스텔의 주소를 잘 몰라 검색을 해야 했다.
“어차피 서울로 가시는 거죠? 출발합니다.”
“네, 네. 주소는 빨리 찾아서 불러 드릴게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공항 손님 받기도 힘들어지겠네요. 웬일입니까, 이게. 공항에 차원문이라니.”
“사람 사는 데는 가리지 않고 다 나오는 것 같습니다.”
“뉴스 틀어도 될까요, 손님?”
“네. 틀어주세요.”
운전사가 라디오를 켜자, 인천 공항 차원문에 관한 뉴스가 쏟아졌다.
“계속해서 인천 공항 현재 상황 연결해 보겠습니다. 황상규 기자?”
“네. 황상규입니다.”
“상황이 어떤가요?”
“차원문이 활주로에 생긴 것은 아니라서, 현재까지는 심각한 연착은 없습니다. 하지만 공항으로 들어오는 길이 대단히 복잡하므로, 비행기를 타실 분들은 평소보다 한두 시간 먼저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항공사보다는, 승객들에게 불편함을 끼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항공사도 우려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착륙보다는 이륙이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승객이나 승무원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해서 제시간에 이륙하지 못하는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다른 차원문들도 마찬가지지만, 빨리 정리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천공항 공사 측은 오늘 한국 아침 구원자 길드협회 쪽으로 긴급 공문을 보내, 조속한 정리를 요청했다는 소식입니다.”
“아침에 구원자 한 분이 이미 진입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맞습니까?”
“네. 여러 시민분들이, 차원문이 생기자마자 차원문으로 사람이 들어갔다는 제보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자가 조금 전에 차원문에서 나왔는데요, 많은 분들이 예상했던 대로 이준기 구원자였습니다.”
“이준기 구원자라면, 요즘 장안의 화제 아닙니까?”
“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기대를 하신 것 같은데요. 이준기 구원자는 차원문 정찰만 끝내고 나온 것으로 조금 전 공식 확인되었습니다. 육군 본부에서 직접 확인해준 사항입니다.”
“그렇군요. 조금 아쉽습니다. 언제쯤 정리가 될지, 혹시 입수한 소식이 있습니까?”
“협회 측에 조금 전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아직 공식 입장은 없다고 합니다. 이준기 구원자의 정찰 내용을 보고 받고 입장을 정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뉴스는 현장 연결을 끝내고 전문가 인터뷰로 넘어갔다.
경제적 파급효과가 막대하므로 빨리 처리를 해야 한다는 뻔한 얘기가 이어졌다.
“공항에 차원문이 열린 사례가 있습니까?”
“네. 중국 광저우 공항 진입로에 차원문이 열렸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요? 정리됐나요?”
“현재는 정리가 됐습니다. 정리까지 한 달 반 정도가 소요됐습니다만, 그동안 발생한 경제적 손실은 천문학적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 예상입니다.”
“예상이라면, 중국 정부 발표는 어땠습니까?”
“중국 정부의 손실 발표액이 워낙 작아서, 전문가들은 그 몇 배의 손실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그렇군요. 광저우 공항에 생겼던 차원문 등급은 어땠습니까?”
“C급 던전이었습니다. 이번에 인천 공항에 생긴 차원문은 B급 던전이죠. 그래서 정리가 더 어렵지 않겠냐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정상급 구원자들이 많이 사망해서 더 어렵겠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네. 9월에 권영호, 10월에 고성하, 이도협 길드 마스터가 사망했습니다. 한국 최고 수준의 구원자들이었기 때문에 전력 손실이 큽니다.”
종각역 사거리나 해운대에 생긴 차원문도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인천 공항 차원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부는 협회를 계속해서 압박하겠지만, 섣부른 판단은 더 큰 화를 초래할 것이다.
현재 한국 랭킹 20위권 구원자 전원이 공격대를 구성하는 것으로는 모자란다.
전원의 손발이 맞아야 한다.
*****
이준기는 집에 돌아와서 뉴스를 검색했다.
카탈루냐 독립 전쟁이 끝난 시점이라면, 이제 본격적으로 전 세계의 화약고들이 터지기 시작할 때다.
크고 작은 분쟁의 씨앗이 발아하면서, 결국에는 커다란 불덩어리가 되는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전, 이웃 나라 사이의 분쟁, 그리고 결국에는 세계 대전.
테마가 조금씩 바뀌면서 점점 더 커져가는 눈 덩어리.
그 첫 번째 테마는 다름 아닌 민족주의다.
- 터키, 쿠르드족 안전 지역에 대대적인 공격 감행.
- 지금 팔레스타인은 지옥. 구원자도 아닌데 어디론가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 컬럼비아 내전 격화. 반군 측에 구원자 다수 합류 사실 확인돼.
- 우크라이나 반군 지휘부에 러시아 출신 구원자, 알렉세이 믈라디노프가 참여 중인 듯. 우크라이나 정부 비난 성명.
이준기는 원래 텔레비전이라는 걸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오피스텔에는 옵션으로 벽걸이 TV가 포함되어 있다.
이준기는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시사 채널에서 댜오위다오 분쟁 관련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댜오위다오. 발음이 어렵군요. 보통 센카쿠 열도라고 부르는 곳이죠?”
“네.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렇군요. 일본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 자체가 그쪽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군요.”
댜오위다오의 지도가 텔레비전 화면에 떴다.
“일본 본토에서는 정말 멀리 떨어져 있군요. 일본 정부는 도대체 어떤 주장을 하는 겁니까?”
“오키나와현 소속이라는 겁니다.”
“아, 오키나와에서 가깝군요.”
“하지만 오키나와보다는 대만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아, 말씀 듣고 보니 그렇네요. 현재 이 지역은 누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독도에 대해서도 일본은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으니까요. 댜오위다오 열도는 현재 어느 쪽이?”
“일본 측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자위대가 가끔 순찰을 돕니다.”
“그런데 중국 어선들이 근처에서 조업을 하지 않습니까?”
“네, 중국 정부가 어선들을 경호하기도 하니까요. 양국 간 신경전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구원자라는 변수가 등장한 거죠.”
“네. 그렇습니다. 지난달에 일어난 사건인데요, 이 지역에서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에 대해 일본 경비정이 경고 방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일본 경비정이 공격을 받고, 선박 일부가 불에 탔습니다. 중국 정부는 부인하고 있지만, 일본 측은 중국 어선에 탑승하고 있던 구원자가 공격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경비정에 카메라는 없었나요?”
“경비정 카메라도 파괴되었습니다. 파괴된 모양으로 보아, 구원자의 스킬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계속됐었죠. 그런데 영상이 없어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인터넷에 영상이 유출된 겁니다. 중국 어선 쪽에서 휴대폰으로 촬영한 영상으로 보이는데요, 구원자의 모습은 찍혀 있지 않지만 염력으로 무기를 탈취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좋아요를 엄청 눌러대는 바람에 유명해졌죠.”
화면에는 휴대폰으로 촬영된, 세로로 긴 영상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일본 경비정을 올려다보는 시각에서 촬영된 것이라서, 중국 어선에서 촬영된 것이 분명하다.
일본 측 경비정은 배수량 200톤 정도의 소형 건보트.
배의 한쪽 끝에서 함포가 뜯겨 나가더니, 카메라 쪽을 향해 공중을 건너오는 모습이 찍혀있다.
소파에 누워 화면을 쳐다보던 이준기가 생각했다.
‘저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위쟈오였던가··· 린핑 루가 저 사람 얘기도 해줬던 것 같은데.’
새벽부터 움직여서 그런지 피곤이 몰려왔다.
이준기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