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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8: 와이번 네스트 (1)
Episode 28: 와이번 네스트 (1)
상태창을 통해 차원문의 정체만 확인하고, 이준기는 주저 없이 희푸른 소용돌이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차원문이 커져가는 걸 구경하던 사람들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와앗, 저 사람 뭐야!”
“구원자다! 차원문이 생기는 도중에 걸어 들어간다!”
“이준기, 이준기 아냐? 언뜻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
빛의 터널을 지나, 던전 안쪽.
언제나와 같은 준비 공간, 오두막이다.
B급 던전이라서 그런지 조금 더 큰 느낌.
이준기는 자판기로 가서 해독제를 여러 개 샀다.
인벤토리에 독 저항의 영약이 한 개 있지만, 그렇게 희귀한 아이템을 쉽게 소비할 수는 없다.
저렴한 해독제로 버텨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그때 사용할 생각.
이번 던전 안의 공간은 황토색이 메인이다.
황무지와 같은 느낌이지만, 선인장을 제외하면 식물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고블린이나 오크 같은 인간형 몬스터라면, 멀리에서라도 구원자를 발견하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
반면, 와이번은 짐승으로 분류되는 몬스터.
짐승 몬스터라면, 공격성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구원자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다.
영역을 침범당하거나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경우에 주로 공격한다.
와이번의 공격성은 중간 정도.
너무 가까이 다가갈 경우,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
와이번의 날개 반경 두 배 정도의 거리는 두는 것이 현명하다.
오두막 바깥으로 나오자, 목책 같은 것이 산발적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황무지 포맷 던전인 경우, 워낙 지형이 트여 있으니까 오두막에서 나오자마자 공격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초기 정찰에도 대단히 유용하게 활용되는 물건.
이준기는 목책 뒤에 몸을 숨기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풀과 같은 것은 전혀 없지만, 선인장과 같은 외계 식물이 꽤 많이 분포해 있다.
크기만 생각하면 뒤에 숨기에 나쁘지 않지만, 지구의 선인장과는 차원이 다른 날카롭고 커다란 가시가 나 있다.
그 때문에 몸을 밀착시킬 수 없어 엄폐물로 활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크기가 제각각이기는 하지만, 엄폐물로 쓸 수 있는 것은 널려 있는 바위들이다.
공격대 전체가 숨어도 좋을 만한 큰 바위도 보인다.
목책 뒤에 숨어서, 이준기는 눈에 보이는 큰 바위들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했다.
바위에서 바위로 옮겨 다니면서 정찰을 하려는 것이다.
맵 전체를 돌아보며 엄폐물 지도를 완성하는 것이 이번 정찰의 목표 중 하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은, 로밍 몹들의 씨를 말리는 것이다.
그가 아는 한도에서 ‘와이번 네스트’ 포맷에 등장하는 로밍 몹의 대부분은 오크와 고블린이다.
이들을 정리하고 나면, 나중에 정규 공격대가 진입했을 때 훨씬 편해진다.
애드의 위험이 없으므로, 와이번 사냥에 집중할 수 있다.
로밍 몹들을 모조리 찾아내야 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이준기가 레벨 강등을 각오하고 이곳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고블린 상단을 발견하고, 이준기는 바위 뒤에 숨어서 기다렸다.
상단 보호를 위해 고용된 용병들만 처리하면, 전리품이 넉넉하게 쏟아진다.
걸어 다니는 보물 상자나 다름없다.
무기나 방어구 같은 게 떨어질 확률은 얼마 안 되고, 대개 소모품과 골드를 드랍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바위 뒤에서, 이준기는 주먹을 쥐어 만든 작은 구멍을 통해 멀리에서 다가오는 상단을 관찰했다.
작은 구멍을 통해 보면, 멀리 있는 물체가 잘 보이는 핀홀 효과.
구원자로 각성하자, 0.7을 오락가락하던 시력이 갑자기 3.0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핀홀 효과를 더하면 멀리 있는 것도 충분히 관찰이 가능하다.
일본의 닌자들도 이런 손가락 구멍을 이용해서 정탐을 하고는 했다고 한다.
다가오는 상단에는 총 여섯 마리의 용병이 포함되어 있다.
낙타인지 라마처럼 생긴 동물도 총 여섯 마리.
온순한 동물이니 짐만 내리고 쫓아 버리면 된다.
용병들이 쓰러지면, 상인들도 덤빌 생각은 못 할 것이고.
고블린 용병이라면, 도톤보리 던전에서 보았던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협상의 여지는 없고 해치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장 상태나 체력 수준은 같다고 보면 된다.
‘이번에는 적이군. 그게 전쟁의 본질이니 어쩔 수 없지.’
이준기는 금남로 던전을 정리하고 받은 에픽 장갑을 상태창에 띄웠다.
우면산 던전에서는 화살을 쓸 일이 없었으므로, 이번 던전이 이 장갑에게는 데뷔전이다.
- 이광의 장갑.
- 장갑. 에픽 등급.
- 착용 효과: 활 공격 시 대미지 +1.
- 발동 효과: 30분마다 처음 쏘는 화살은 적의 회피율을 무시합니다.
30분마다 쏘는 화살은 거의 적중한다는 말이다.
중국 한나라 때의 명사수, 이광의 이름을 딴 장갑이니 그 정도 옵션은 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활 공격에만 적용되는 옵션뿐이라서, 스나이퍼에게 더 어울리는 장갑이다.
이준기로서는 더 나은 장갑이 나올 때까지만 쓰게 될 장갑.
그러나 지금과 같은 솔로잉 상황에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
드넓은 황무지에 와이번이 드문드문 날아다닌다.
와이번의 주식은 선인장 수액.
먹을 걸 찾아 배회하는 것이다.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받을 일은 별로 없다.
벌집을 건드리지 않으면 벌에게 쏘일 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블린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와이번이 보일 때마다 멀리 돌아서 피해 다닌다.
그걸 역이용하면, 손쉬운 사냥이 가능하다는 이야기.
다가오던 고블린 상단이 와이번 한 마리를 마주치고 비켜 가려는 찰나.
이준기는 화살을 메긴 활시위를 놓았다.
흙먼지가 이는 황야를 가로질러 날아간 화살이 고블린 상인의 팔에 적중했다.
“끼야악!”
화살을 맞은 고블린 상인은 팔을 부여잡고 폴짝거리면서 주변을 뛰어다녔다.
용병이라면 저렇게까지 호들갑을 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블린 상인에게 쏜 것이다.
화살을 맞은 팔이 아파 정신줄을 놓고 뛰어다니던 고블린 상인이 와이번에게 다가갔다.
용병들이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갑자기 뛰어드는 고블린 상인을 보고 놀란 와이번이 날갯짓을 하며 꼬리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고블린 상인이 꼬리 독침에 몸이 꿰뚫려 공중으로 솟구쳤다.
다른 고블린들은 날개바람에 쓰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짐을 운반하던 짐승들은 그나마 네 다리로 버티고 있었지만, 놀라서 크게 울부짖기는 마찬가지였다.
용병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와이번에 맞섰다.
두 마리가 와이번을 앞에서 탱킹하는 사이, 네 마리는 와이번의 날개 쪽을 향해 측면에서 덤벼들었다.
와이번이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미 고블린들이 달라붙었다.
고블린의 공격에 날개를 다친 와이번이 독침과 이빨로 공격을 계속했다.
고블린 탱커 둘 중 하나가 쓰러지고, 날개를 공격하던 딜러들도 둘이나 나가떨어졌다.
날개를 다쳐 바닥에 버둥거리던 와이번은 입과 꼬리로 공격을 계속했지만, 이미 판세가 기울어졌다.
탱커가 방패로 와이번의 이빨 공격을 맞받아치는 동안, 딜러들이 도끼와 창을 휘둘러 와이번의 몸통을 공격했다.
꽤액 소리를 내면서 와이번이 풀썩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이준기의 손에서 날아간 화살이 고블린 탱커의 다리를 직격했다.
발을 쩔뚝거리면서 탱커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딜러들도 같은 방향을 보면서 경계 태세를 취했다.
바위 뒤에서 나오면서 이준기는 매직 미사일을 난사했다.
허벅지에 화살을 맞은 채로 구부정하게 서 있던 탱커가 매직 미사일 다섯 개를 모두 맞고 쓰러졌다.
고블린 딜러들이 이준기를 보고 달려왔다.
이준기는 흑요석 칼날과 카데쉬, 단검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
초고속 레벨업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준기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
레벨과 템빨에 비해 획득 스킬이 부족하다.
마나 폭발, 매직 미사일, 점멸 같은, 특성만 찍으면 자동으로 얻는 기본 스킬로 버티는 중이다.
획득 스킬은 리버설(Reversal)과 블러(Blur), 둘 뿐.
- 리버설. 마나 책 10권 소요. 즉시 시전. 적 하나 대상. 적과 자신의 버프와 디버프를 모두 모아, 버프는 자신에게, 디버프는 적에게 몰아줍니다.
- 블러. 바람 책 5권, 마나 책 3권 소요. 시전 시간 5초. 자신 대상. 1분 동안 회피 확률이 50% 포인트, 마력 저항이 25% 포인트 증가합니다.
어둠 쪽으로 책을 다섯 권이나 찍은 이유는 역시 희귀 스킬 ‘귀검’과 ‘소멸’을 노린 것이다.
‘귀검’은 종각 던전에서 주석이 그 위력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공격 속도가 두 배, 이동 속도가 다섯 배가 된다.
몬스터를 상대로 해도 충분히 강력한 기술이지만, 인간을 상대로 할 때 더 강력하다.
빠른 움직임에 필요 이상으로 겁을 집어먹기 때문이다.
‘소멸’은 해운대 던전에서 남궁훤이 썼던 기술.
시야에서 사라져서 은신 상태로 접어드는 스킬이다.
소멸을 익힌 구원자들은 공격대가 전멸해도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 있다.
방어적으로만 사용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은신이라는 것은 선빵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소멸과 귀검, 둘 다 기습에 유용한 스킬들이다.
이도협이 파티 트릭으로나 쓰던 ‘텔레키네시스’도 상황에 따라서는 대단히 유용할 수 있다.
광주에서, 권총을 든 사람이 이준기를 미행했을 때, 만약 그가 텔레키네시스를 가지고 있었다면 상대의 총을 빼앗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나 책 다섯 권으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지만, 획득 스킬이기 때문에 전리품으로 얻어야 익힐 수 있다.
그때까지는 사냥을 하면서 스킬 그리모어(grimore)가 떨어지기를 기다릴밖에 별 도리가 없다.
매우 불확실하고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쪽을 노려야 하는 것이 맞다.
마침, 다른 방법이 있다.
이준기가 이 던전에 들어온 이유가 그것이다.
흔치 않은 선인장 황무지 던전이라서 들어온 것이다.
*****
맵의 남서쪽에 위치한 오두막에서 시작해서, 이준기는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정찰을 계속했다.
고블린 상단 외에도 오크 사냥꾼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오크 사냥꾼은 둘 또는 셋이 한 무리로 돌아다닌다.
고블린 상단보다도 쉽게 처리가 가능한 상대.
이준기는 쉬어가면서, 천천히 사냥을 했다.
사냥보다는 정찰이 주목적이다.
엄폐물로 쓸만한 바위들의 위치를 맵 전체에 표시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
그 일을 하는 데 방해되는 로밍 몹들만 해치우면 된다.
그렇게 로밍 몹들을 정리하던 이준기의 눈에, 드디어 목표물이 포착되었다.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돌아다니고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어떤 대상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모습.
그 정체는 바람 정령의 일종이다.
일반적인 바람 정령은 그저 몬스터일 뿐이지만, 이것은 조금 다른 종류다.
소용돌이 휘말려 돌고 있는 물건 중에 커다란 책이 여러 권 섞여 있는 것으로 구별이 된다.
바람 정령은 소용돌이의 중심에 사람 머리 정도 크기의 바위를 하나 가지고 있다.
보통 정령의 심장 또는 핵이라고 부르는 것.
바로 그 핵을 공격해야 바람 정령을 쓰러뜨릴 수 있다.
회피율이 대단히 높은 바람 정령을 상대로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요령을 익히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80레벨 탱커가 되기까지 몸과 머리로 익힌 모든 것을 가지고 회귀한 이준기에게도 역시 어렵지 않은 일.
바람 정령의 핵을 공격하는 것은 근접 무기로도, 원거리 무기로도 가능하다.
지금 이준기는 ‘이광의 장갑’이라는 원거리 공격 특화 아이템을 장착하고 있다.
당연히 활로 공격을 하려 한다.
회피율이 무시무시한 바람 정령이지만, 이광의 장갑의 발동 효과는 다음과 같다.
- 발동 효과: 30분마다 처음 쏘는 화살은 적의 회피율을 무시합니다.
30분마다 쏘는 첫 한 방은 회피율을 무시하고 들어간다는 것.
화살이 빗나갈 가능성은 5% 이하다.
하지만 바람 정령을 공격할 때는 한 가지를 더 고려해야 한다.
이준기는 바람 정령의 소용돌이 모양을 잘 관찰했다.
이번 바람 정령의 소용돌이는 시계 방향으로 돈다.
정령의 핵을 겨냥해서 활을 쏘면, 왼쪽으로 휘말려 날아가게 된다.
이광의 장갑이 회피율을 무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뻔한 요소까지 무시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적의 회피율을 무시한다는 말이지, 유도탄처럼 화살을 휘게 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화살을 활시위에 메기고, 심호흡을 한 차례 쉰 이준기.
바람 정령의 핵을 바로 빗맞힐 정도 만큼만, 화살을 겨냥한 위치를 오른쪽으로 조정했다.
마지막으로 화살을 쏜 지는 거의 한 시간이 되어간다.
이광의 장갑이 발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셋.
둘.
하나.
황무지의 바람을 가르고 화살이 날아갔다.
그리고, 바람 정령의 소용돌이를 뚫고 정령의 핵에 적중했다.
바람 정령은 새된 바람 소리를 내면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따라 이준기에게 달려왔다.
이준기는 바위 뒤에서 나와 양손에 단검을 들었다.
바람 정령이 이준기를 공격했다.
중심 소용돌이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소용돌이가 이준기를 향해 마치 드릴처럼 회전하면서 달려들었다.
이준기는 왼손의 단검, 카데쉬로 그걸 쳐냈다.
이미 화살을 맞아 기력이 많이 약해진 바람 정령.
이준기의 일격에 중심을 잃고 마치 팽이처럼 휘청거린다.
바람 정령의 뒤를 잡은 이준기가 오른손의 흑요석 칼날을 내질렀다.
바람 정령의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간 이준기의 흑요석 칼날이 정령의 핵을 강타했다.
“자··· 잠깐!”
잡음이 잔뜩 섞인 라디오에서 나오는 듯한 소리.
이준기는 칼날을 거두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