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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7: 용병 계약 (2)
Episode 27: 용병 계약 (2)
협회와의 용병 계약서는 최정윤 매니저가 마무리했다.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던 최정윤이 이준기에게 말했다.
“무조건이라는 말은 계약서에서 쓸 수 없어요. 무조건이라는 과격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그런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표현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는요, 한 달에 두 번, 협회에서 지정하는 공격대에 합류한다. 단, 사정이 있을 때는 예외로 한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걸 저쪽에서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주겠죠. 저렇게 단서를 다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저쪽에서 반대할 테니까,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단, 해당 일자에 다른 공격대 합류가 선약되어 있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오! 그거 좋은데요. 그렇게 상식적인 조항을 거부하지는 않겠죠.”
그렇게 말은 했지만, 이준기는 이상덕과의 협정을 신사협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약속을 어길 경우, 피차 강제할 수단이 없다.
협회에서 보내온 초안에 위약금 규정이 있기는 했지만, 이 계약서를 가지고 법원에 가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계약서가 아니고 구원자들 사이의 계약서이기 때문에, 법원으로서는 관할권 없음을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약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서로 간에 생명을 위협하는 적대행위가 종식되기를 바라는 것이 이 계약서의 취지다.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한 달에 두 번, 협회에서 지정하는 공격대를 무조건 뛰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준기는 언제든지 약속을 어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뻔히 보이는 사지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건 이상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광주에서처럼 어리숙한 자객을 보내지는 않겠지만, 이준기를 확실하게 처리할 방법이 생긴다면, 이상덕은 언제든지 이준기의 목숨을 다시 위협할 것이다.
결국 이 계약서는 신사협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적어도, 섣부른 행동은 막아줄 것이다.
적대행위의 재개는 계약의 파기를 의미하므로, 최대한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에야 적대행위를 재개할 테니까.
“그리고 매니저님, 수당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했으면 좋겠어요.”
“네? 왜요?”
“일단 금액이 너무 큽니다. 이 계약서는 비공개로 할 이유가 없으니까 공개된다고 봐야 해요. 아니, 저쪽이 아니더라도 제가 공개할 겁니다. 쓸데없는 의심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개해야죠.”
“그런데 협회 직속 용병이 한 달에 1억 원을 받는다고 하면, 아마 사방에서 적이 우후죽순으로 생길걸요? 안 그래요?”
“하긴. 그렇겠죠.”
“매니저님, 구원자들 소득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충무공 길드 계실 때 그쪽 일도 하셨어요?”
“아뇨. 저는 브리핑하고 언론 담당이어서요. 계약직한테 누가 돈 문제를 맡기겠어요?”
“그렇군요. 저는 제가 받은 것밖에 모르는데. 한 달에 천만 원 정도 받았던 것 같아요. 세전이지만.”
“네. 저도 그 정도로 밖에는 몰라서요. 언론에 나온 것 정도죠. 그래도, 한 달에 천만 원은 정말 최저 임금 같은 거라고 들었어요. 정부에서 협회로 들어오는 보조금 중에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계약금으로 수억 원 받았었죠. 돈이 아니라 차로 받는 바람에 현금화하느라 고생 좀 했지만.”
“하하. 그 마세라티요.”
“네, 그거. 콰트로 머시기 하는 그거요.”
“콰트로포르테. 이탈리아어로 그냥 문 네 개라는 말이래요.”
“아, 그래요? 그것참 이름 성의 없게 지었네요.”
“그래서, 수당 규정은 어떻게 제시할까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합리적인 수준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협회 끄나풀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금액 부분은 제가 여기저기에서 좀 알아보고 안을 만들어 볼게요.”
“나머지 부분은 매니저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네. 그럼 일단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최정윤은 랩탑에 정리한 내용을 별도 모니터 스크린에 띄웠다.
둘이 회의할 때 사용하려고 구입한 40인치 중고 모니터다.
- 협회(갑)와 이준기(을)는 아래 사항에 대해 합의한다.
- 갑의 의무: 1. 일본 협회와의 협동 프로젝트를 모두 취소한다. 2. 협회는 구원자들의 안전 확보에 최선을 다한다.
- 을의 의무: 한 달에 두 번, 갑이 지정하는 공격대에 참여한다. 단, 해당 공격대와 일정이 겹치는 다른 공격대와의 선약이 있는 경우는 예외로 하며, 이 경우 공격대 참여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 보수 수준: (최정윤 매니저가 조사 후 보강)
- 계약 기간: 2021년 11월 1일부터 2022년 10월 31일까지. 계약 기간 종료 한 달 전에 일방의 통보로 계약은 종료될 수 있으며, 종료 통보가 없을 경우 자동으로 1년 더 연장된다.
“좋습니다. 역시 전문가라 다르시네요.”
“과찬이세요. 그 외에 테크니컬한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용어 정의라든가 관할법원 같은 것들이요.”
“네. 감사합니다.”
“전 오늘 거기 가신다고 해서 내심 걱정했거든요. 오후에 윤동직 구원자님이 전화도 하셨고.”
“동직이 형님이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하셨대요?”
“아뇨, 알고 하신 건 아니고. 그냥 이준기 구원자님 전화가 꺼져 있다면서 저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참. 동직이 형님도.”
“이상덕 협회장 만나러 가셨다고 하니까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제가 뭐 어린애도 아니고. 동직이 형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요.”
“그러게요. 처음에 충무공 길드에서 뵈었을 때는 너무 우락부락하게 생기셔서 좀 겁도 났었는데. 천성이 착하신 분 같아요.”
“수고 많으셨어요, 매니저님. 내일 일찍 나오셔야 하니까 이제 들어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내일 아침에 뵐게요.”
“네. 너무 새벽 시간이라 좀 죄송하긴 한데, 부탁드립니다.”
*****
이상덕 협회장과 담판을 하고 최정윤 매니저와 계약서를 검토한 그다음 날.
10월 28일 금요일.
아침 5시에 최정윤은 이준기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인천 공항까지 이준기를 차로 데려다줘야 한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준기는 왜 거기에 가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을 아는 최정윤도 굳이 묻지 않았다.
“새벽부터 운전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무슨 말씀이세요. 일인데요. 좀 주무세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을 달리다 보니, 며칠 전 광주 금남로 던전이 생각났다.
초승달이 지고 난, 칠흑 같은 오밤중에 벌어진 전투.
아침 일곱 시까지는 도착해야 해서 서둘렀다.
2년 전의 과거로 회귀하고 나서, 이준기는 잊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을 꼼꼼하게 메모했다.
무게도 부피도 없는 상태창이라는 포터블 컴퓨터.
메모장에 이렇게 메모가 되어 있다.
- 2021년 10월 28일. 7AM. 와이번 네스트 오픈.
과거의 10월 28일이라면, 아직 20레벨도 달지 못했던 때다.
그러나 차원문과 관련된 일이라면 꼼꼼하게 조사하고 메모를 하던 때다.
공시족 생활로 인해 생긴 메모 습관.
그것이 지금 과거로 돌아온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여기, 내려주세요. 매니저님은 이대로 돌아가세요. 나중에 저는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제1터미널 중간쯤에 내렸다.
6시 10분.
아직 어둡고, 10월 말이라서 그런지 꽤 춥다.
정확한 위치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여기쯤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쓸데없이 추위에 떨 필요는 없다.
이준기는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공기가 이준기를 감쌌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원래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오늘은 예외로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던전에서 퇴각할 생각이다.
이 정도 일을 벌이는데, 커피 한 잔 정도 보상으로 받아도 상관없지 않은가.
커피가 딱히 맛있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 마시던 괴상한 커피와 비교하면 마실 만했다.
이준기는 상태창을 통해 현재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남들이 보면 뭐 하는 건가 할 것이다.
허공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 27레벨.
- 전문화: 어둠 5, 바람 10, 마나 12.
- 힘 42. 민첩 83. 체력 55. 정신력 21. 물리 저항 20. 마력 저항 20.
- 성흔: 이르헬의 눈.
- 획득 스킬: 리버설, 블러.
- 무기: 패시파이어(에픽), 오캄(에픽), 카데쉬(에픽), 흑요석 칼날(에픽).
- 방어구: 헌팅캡(레어), 이광의 장갑(에픽), 애쉬 슈라우드(레어), 경기병 바지(레어), 아킬레우스의 샌들(전설).
- 장신구: 카멜레온 디텍터(에픽), 오크 학살자의 반지(레어).
- 인벤토리: 강화 곡궁. 일반 화살 20개, 독 저항의 영약 1개, 중급 힐링 포션 12개, 기본 식량 팩 6개
최적의 상태로 미세조정되었다고는 말 못 해도, 나름대로 생각과 계획을 하면서 찍은 스탯.
던전 퇴각 페널티로 레벨이 밀리게 되면, 그에 비례하여 스탯이 깎여 나간다.
그런데 그게 무작위로 깎여 나간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최적화가 흐트러진다.
가정을 해보자.
현재 27레벨인 이준기가 26레벨로 강등이 되었는데 스탯 포인트 5점 감점이 전부 민첩성에서 빠진다고 하자.
그러면 이준기는 과거에 26레벨이었을 때와는 다른 회피율과 치명타율을 가지게 된다.
아무래도 전투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스킬 트리도 흐트러진다.
역시 랜덤으로 책이 사라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 익힌 기술이 함께 날아갈 수도 있다.
예컨대 바람의 책 10권이 필요한 스킬을 익혔는데, 레벨이 강등되면서 바람의 책이 한 권 빠진다면?
주 무기를 잃는 것에 버금가는 수준의 페널티다.
그런 페널티를 감수하고, 이준기는 이번 던전에서 정말로 정찰 후 퇴각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던전이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협회장 이상덕과 고용 계약까지 한 상태.
이준기에게 할당되는 협회 지정 첫 공격대의 대상은 바로 이 던전이 될 것이다.
‘중간쯤이라고밖에는 생각이 안 난다. 7번 입구에서 양쪽을 잘 살피면서 보면 보이겠지.’
차원문의 지름은 5미터에 육박한다.
발생할 때나 소멸할 때는 크기가 조금 더 작기는 해도, 그게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마침내 7시 정각이 되었다.
밝아오는 아침을 배경으로, 6번 출입구 바로 바깥에서 희푸른 색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
서둘러 상태창을 확인하는 이준기.
설마 아닐 리는 없겠지만, 이 차원문이 맞는지 확인은 하고 들어가야 한다.
퇴각할 때 퇴각하더라도, 다른 차원문에 들어가서 헛수고를 할 수는 없으니.
- 차원문 고유번호 14777. 랭크 B. 1층 구성. ‘와이번 네스트’.
- 차원문 입장 조건: 최대 입장 인원 20명. 최저 입장 가능 레벨 20.
- 차원문 소멸 조건: 와이번 모나크의 죽음.
- 차원문 소멸 보상: 에픽 등급 이상의 아이템 2개.
- 퇴각 페널티: 2레벨 강등.
이준기는 심호흡을 했다.
2레벨 강등이라.
만만치 않은 페널티다.
협회와의 고용 계약에 그런 규정은 없지만, 어떻게 보면 신뢰 보호 위반이 될 수 있는 부분.
27레벨 구원자와 계약을 했더니, 계약이 발효하기도 전에 25레벨이 되어버린다면?
‘협회로서는, 25레벨이라도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니면 정말 또 일본을 끌어들일지도 모르고.’
와이번이라는 말만으로도 모두가 겁을 집어먹을 만하다.
그런데 던전 소멸 조건이 무려 와이번 ‘모나크’의 죽음이다.
와이번을 한 마리만 잡아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한 상황.
사람들은 와이번에 대한 정보를 찾아 헤맬 것이다.
다행히도, 와이번은 한국이 처음이 아니다.
며칠 전에 헬렌 카자크에게서 받은 메모를 이준기는 상태창에 띄웠다.
- 와이번. 익룡 형태의 몬스터. 머리에서 꼬리까지는 3미터 정도이고, 날개를 쫙 펴면 7미터 정도 된다. 꼬리가 길고 가는 편이라서 몸길이가 3미터라고는 해도 그렇게 위압적이지는 않다.
- 주요 공격 패턴은 깨물기, 날개로 바람 일으키기, 꼬리 독침 공격이 있다. 꼬리 독침 공격의 경우 50% 정도의 높은 확률로 중독이 되므로, 힐러의 해제 스킬이나 해독제를 충분히 준비할 것. 진형을 흐트러뜨리는 날개바람도 조심해야 한다. 힐러가 갑자기 적의 공격 범위에 노출될 수 있다.
이제 이 차원문에 대해서 알게 되면, 협회도 정보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국제 구원자협회 연맹에서 비슷한 정보를 보내올 것이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던전에 진입한다든가, 겁을 먹고 차원문 입장을 거부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와이번 모나크 만큼은 아직 아무도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와이번 모나크를 조금 큰 와이번이라고 생각했다가는 크게 다치지.’
27레벨의 이준기.
와이번 한두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와이번 모나크라면 얘기가 전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