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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6: 현재의 동료, 미래의 동료 (1)
Episode 26: 현재의 동료, 미래의 동료 (1)
“김창수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준기와 악수를 하는 김창수의 표정은 한마디로 얼어 있었다.
그가 알던 모습의 김창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텐데, 언제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조금 모자라는 그런 모습.
“오늘 던전은 서초구청 뒷길에 있습니다. 우면산 입구에요. D급 던전입니다. 26레벨로 전국 랭킹 8위인 이준기 구원자님이 리드하실 거니까, 걱정하실 것이 전혀 없습니다.”
윤동직이 구룡회 멤버들에게 브리핑했다.
구룡회. 서초구, 수원, 성남을 근거지로 하는 길드라고는 하지만 규모가 매우 작다.
서울 남부는 물론, 수원과 성남 분당을 관할하는 다른 길드도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길드는 다름 아닌 브릴리언트.
일본에서 함께 싸웠던 김나리, 그리고 종각 던전에서 살인마로 다시 태어났던 주석이 이 길드 출신이다.
총인원 6명에 불과한 구룡회의 길드 멤버 전원이 모였다.
양재역 사거리에는 맛집이 많다면서, 구룡회 길드 마스터 최석주는 오랫동안 단골이라는 칼국숫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은 이미 지난 오후 1시.
그런데도 유명한 집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홉 명이 함께 앉을 자리는 없다고 해서, 일행은 두 테이블로 나누어 앉았다.
윤동직을 따라온 행정직원이 4인용 테이블 한쪽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불편하게 앉았다.
최석주가 단골이라고 말은 했지만, 식당 사람들은 최석주를 알아보는 눈치가 전혀 아니었다.
“하하. 사장이 오늘 바쁜가 보네요. 제가 사장한테 말해서, 칼국수 사리는 공짜로 좀 달라고 하겠습니다.”
최석주가 사람 수대로 칼국수를 시키고 테이블마다 보쌈을 하나씩 주문했다.
식당 안을 구경하느라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이준기의 눈에 자그마한 글씨로 쓰여진 안내 문구가 보였다.
‘칼국수 사리는 무제한 공짜로 리필해 드립니다. (사람 수대로 칼국수를 주문하신 테이블에 한함.)’
유명세를 타서 그런지, 식당 직원들은 꽤 불친절했다.
하도 거들먹거려서 사장인가 했던 사람도 나중에 보니 그냥 직원이었다.
사장은 식당에 나오지도 않는 모양.
이준기는 묵묵히 칼국수를 먹었지만, 윤동직은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식당 안의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하! 장사 좀 된다고 아주 불친절한 식당이군. 언제까지 장사가 잘되나 내가 지켜보겠어.”
윤동직을 따라온 길드 행정직원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윤동직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구룡회 길마 최석주가 불편한 웃음을 지으면서 윤동직에게 말했다.
“사장이 바쁜 모양입니다. 얼른 드시고 나가서 맛있는 커피 하시지요.”
칼국수는 맛있었다.
사람이 많은 것이 이해가 될 정도.
불친절한 것만 빼면, 다시 와보고 싶을 정도의 맛이었다.
선글라스에 자꾸 김이 서려서 먹기가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이 쓰고 있어야 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윤동직이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구룡회 길드 멤버들이 왜 선글라스를 벗지 않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식당을 나와서 근처 카페로 갔다.
10월 하순이지만 해가 좋아서 바깥 자리에 앉았다.
‘발해의 후예’ 길드 행정직원이 브리핑을 했다.
구룡회에는 행정 직원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늘 던전은 단순합니다. 기본적으로 상위 랭커의 경험을 전수받는 자리라고 생각해 주세요.”
차원문 근처에 가서 상태창을 열면 나오는 정보지만, 행정직원은 노트북을 열어 화면을 보면서 브리핑했다.
- 차원문 고유번호 09877. 랭크 D. 1층 구성. ‘고블린 사냥’.
- 차원문 소멸 조건: 고블린 200마리 사냥.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등급 이상 아이템 1개.
- 퇴각 페널티: 인벤토리 물건 랜덤 1개 소멸. 레벨 업 이후 경험치 소멸.
행정직원은 평균 레벨 15 정도로 구성된 5~6명 파티라면 이런 던전은 얼마든지 깰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최석주 길마와 김창수 탱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행정직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9월 초, D급 던전 ‘고블린 광산’을 정리하러 들어왔던 당시 충무공 길드 파티가 그런 구성이었다.
18레벨의 윤동직을 제외하면 전원 15레벨 이하였다.
그러나 그건 윤동직을 비롯한 파티 멤버들이 어느 정도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구룡회 멤버들에게는 어려운 이야기다.
‘이르헬의 눈’을 통해 이준기는 김창수를 바라보았다.
- 16레벨.
- 전문화: 빛 9, 흙 7.
- 힘 25. 민첩 20. 체력 50. 정신력 20. 물리 저항 10. 마력 저항 0.
- 성흔: 없음.
- 획득 스킬: 없음.
- 인벤토리: 오크 분쇄자의 검, 하급 힐링 포션 8개, 기본 식량 팩 4개.
빈익빈 부익부.
작은 길드의 탱커 김창수가 가진 아이템은 ‘오크 분쇄자의 검’ 하나뿐이다.
광란 상태에 빠진 오크를 처치하면 보상으로 주어지는, 아주 흔한 아이템.
성능이 나쁘지는 않지만, 20레벨을 향해 갈수록 슬슬 한계가 느껴지는 무기.
윤동직이 옆자리에 앉은 김창수에게 물었다.
“방패는 어떤 걸 드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네? 아, 방패요? 제가 아직 방패를 구하지 못해서··· 던전 입구 오두막에 그, 선반 있잖습니까. 거기에서 소형 방패를···”
대답을 하는 김창수는 물론, 길마 최석주와 다른 길드 멤버들의 얼굴도 붉어졌다.
서울연합에서 만났을 당시 김창수 역시 전반적으로 템빨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판단력이 준수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다른 팀원들에 대한 배려가 좋았다.
‘아직 가공되기 전의 김창수는 이런 모습이었군.’
*****
“저기 여섯 마리짜리 무리 보이시죠? 풀링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윤동직의 지시에 따라, 김창수가 활에 화살을 메겼다.
그런데 구룡회 멤버 중 한 명인 류석태가 윤동직에게 말을 걸었다.
김창수는 들었던 활을 내렸다.
“잠깐, 저 윤동직 구원자님!”
“네?”
“이렇게 계속하는 건가요?”
“뭐가요?”
“김창수 탱커가 풀링하고, 우리가 잡는... 식으로 계속하는 건지, 궁금해서요.”
“네. 뭐가 잘못됐나요?”
류석태가 우물쭈물하는데, 힐러 양시원이 대신 대답했다.
“길마님한테 들은 거랑 좀 달라서요. 저희는 이거 그냥 버스 타는 거라고 생각하고 들어왔거든요.”
“버스요?”
“네. 우리 길드가 발해 길드랑 합치면서, 버스 한 번 태워주는 거라고···”
윤동직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좋지만, 가끔 발끈하고는 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그런 주장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윤동직의 머리에서 김이 나기 시작하는 것 같아, 이준기가 끼어들었다.
“그런 게 도움이 될까요?”
양시원이 조금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20레벨 넘는 분이 둘이나 있는데, 16레벨 탱커랑 13레벨 힐러가 탱킹하고 힐 하는 거, 너무 비효율적이잖아요?”
구룡회 길마 최석주가 작심한 듯이 말했다.
“이준기 구원자님, 실력을 기르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 게 맞긴 하죠. 그런데 저희는 오늘 버스 타는 거라고 생각하고 와서요.”
“그렇게 얘기가 됐던 건가요? 윤동직 탱커님.”
“음··· 뭔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나요. 전 버스가 아니라 도와드리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럼, 도와주셔야죠! 지금 우리끼리 고블린 잡고 있는데요?”
“저랑 이준기 구원자가, 정찰하는 거라든가 풀링하는 방법 같은 거 가르쳐 드리고 있잖아요.”
“도와준다는 말이 여러 가지 뜻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오늘 버스 타러 온다고 생각해서 가볍게 온 거고요.”
“힐링 포션도 별로 안 샀어요.”
“게다가 두 시에 들어왔잖아요. 이렇게 늦게 들어와서 우리끼리 하면 오늘 던전 밖으로 못 나가는 거 아닙니까?”
“네? 오늘 중에 던전 클리어하실 생각이셨던 겁니까?”
“고블린 200마리 정도쯤이야, 이준기, 윤동직 두 분이 잡으시면 두 시간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 그러면 도대체 여기 왜 오신 겁니까? 겨우 던전 클리어 보너스 경험치 드시려고요?”
그렇게 말하는 윤동직의 얼굴은 적어도 차분하다고 할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구룡회 멤버들도 모두 조금씩 뚜껑이 들리는 모양.
김창수만 제외하고.
윤동직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던전 들어오신 게 언제쯤인가요?”
“지난달이었지, 아마?”
“네. 9월 14일입니다. 수원역이었죠.”
수원역 차원문이라면 아직 열려 있다.
수원 역시 브릴리언트 길드의 나와바리다.
왜 그 던전을 구룡회에 넘겨줬을까?
관할 구역이 겹치는 경우, 협회에서는 난수 추첨으로 차원문을 배분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부 및 인근 경기 지방 차원문을 독식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브릴리언트 길드가 몇 개 양보한 모양이다.
“지금 저희 무시하시는 거죠?”
돌아보니, 최석주의 말이었다.
윤동직이 말을 다소 더듬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
“지난달에 들어갔던 던전, 정리 못 했습니다. 한참 다치면서 하다보니, 힐링 포션도 떨어지고 도저히 더 진행할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어쩌겠습니까, 군소 길드니까 그런 거죠. 저희 길드 멤버 전부 해서 여섯 명밖에 되지 않고, 탱커 하나, 힐러 하납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처음부터 길마였는데, 지금까지 멤버 제일 많았던 게 일곱 명이에요. 힘들게 레벨업 해서 10레벨 넘어가면 다른 길드에서 다 채어가 버려요. 그래서 아직도 이 모양입니다. 그래서···”
“최 회장님, 오해십니다.”
“그래서 길마 자존심 다 버리고 이번에 발해 길드로 다 같이 들어가려고 한 거고요. 그래서 한 달 넘게 던전 들어가지도 못하던 우리 길원들 아이템 좀 먹겠구나 하고 따라온 겁니다. 버스 기대하고 온 거 맞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다른 사람 입장도 생각 좀 해보시죠.”
“죄송합니다. 오해하게 해 드렸네요.”
이준기도 지난번엔 군소 길드에서 한참이나 있었다.
처음에 들어갔던 ‘관피아’는 10명이 채 안 되는 규모였고, 그다음에 들어갔던 ‘리베로’는 조금 사정이 나아서 10명 정도였다.
두 길드 모두 자연적으로 와해되었다.
사망자가 속출해서 길드 단독으로 작은 던전조차 들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 경우에 비하면, 구룡회의 최석주 길마는 오히려 운영을 잘해왔다고 할 수 있다.
윤동직에게 계속 맡겨두면 험악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상황.
이준기가 나서서 이야기했다.
“이렇게 하죠. 연습이라고 생각하시고, 몇 무리 정도만 직접 사냥하시는 걸로요. 나머지는 윤동직 탱커와 제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블린 200마리를 잡을 때까지 자신이 탱킹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진 김창수는 훨씬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아직 16레벨이지만, 예전에 그와 함께 공격대를 구성했던 때가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서울연합의 메인 탱커 이준기와 서브 탱커 김창수는 겨우 두 개의 던전을 함께 돌았을 뿐이다.
겨우 두 번이었지만, 이준기는 김창수에게 뒤를 맡기는 것이 언제나 든든했다.
김창수는 던전 바깥에서도 믿음직한 동료였다.
이익을 위해서 동료를 배신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던 길드 전쟁 시기에도, 언제나 신의를 지켰다.
김창수와 함께 던전을 공략하던 중 사망한 구원자는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 정도의 레벨에 오른 구원자로서는 독보적인 기록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언제나 인명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우면산 던전에서 구룡회 팀은 총 세 무리, 19마리의 고블린을 스스로 사냥했다.
탱커가 모든 대미지를 흡수해야 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김창수는 적의 모든 공격을 자신에게만 집중시켜야 한다는 듯한 강박관념으로 행동했다.
몸도 바쁘지만, 정신적으로 대단히 힘든 일이다.
적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며 초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하니까.
그걸 김창수는 해내고 있었다.
지켜보던 윤동직이 말했다.
“저 정도까지 해야 하나? 왠지 내가 좀 찔리네. 준기는 어떻게 생각해?”
“탱킹 스타일은 다 다른 거죠. 정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준기 생각은 어떤가 해서 물어본 거야. 난 저 정도까지 팀원들을 챙길 자신이 없거든.”
“김창수 탱커의 스타일이 정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하지만?”
“굉장히 이타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탱킹이긴 합니다.”
윤동직은 이준기의 대답을 잠깐 음미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저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걸까? 딜러들이 단 한 대도 맞지 않게 하려고?”
“글쎄요. 정답은 없으니까요.”
“내가 뭐 다른 사람들 탱킹하는 걸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참 힘들게 탱킹하는 것 같아서.”
“탱커의 에너지 소모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죠. 탱커가 주저앉으면 팀 전체가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내 생각도 그래. 저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윤동직은 말하면서 스스로 수긍하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준기가 물었다.
“동직이 형님은 이상덕 협회장을 신뢰하십니까?”
“응? 무슨 소리야 그게. 일본에서 전용택 회장 죽이려고 했던 거 말야?”
“그런 일이 없었다고 가정해보죠. 형님은 던전 안에 들어가서 이상덕 협회장에게 등 뒤를 맡기실 수 있나요?”
“허.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섬뜩하네. 그러지 못할 것 같은데.”
“김창수 탱커라면요?”
“김창수 탱커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면, 김창수 탱커의 탱킹 스타일이 꼭 비효율적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겠죠.”
잠깐 생각한 다음, 윤동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군. 그래. 탱커라는 포지션은 팀워크도 생각해야 한다는 거지?”
딱히 탱커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준기가 김창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신뢰라는 것은 분명히 그런 작은 부분에서부터 쌓아 올려진 구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