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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5: 번져가는 불길 (2)
Episode 25: 번져가는 불길 (2)
최대한 조용하게 광주를 뜨려고 했지만, 이준기는 문아린을 마주쳤다.
로비에 앉아 있던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프런트를 향해 걷는 이준기를 보고 다가왔다.
그녀가 쿨하게, 아니 쿨한 어조를 가장해서 물었다.
“레벨업 했어요?”
왜 말없이 떠나려고 했냐거나, 던전을 클리어했으면 연락을 줬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기대했던 이준기는 벙쪄서 얼떨결에 대답했다.
“응.”
단순한 질문에, 단순한 대답.
문아린은 이준기를 쳐다보던 눈을 거두어 호텔 바닥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빠라서 혹시 했는데, 그걸 정말로 닫고 나와버리네요. 3개월 동안 아무도 못 들어갔던 건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자세한 얘기는 언제 해줄 거예요?”
“글쎄. 언제가 될까?”
초점이 맞지 않는 대화가 이어지자, 문아린은 화제를 바꿨다.
“어디로 가요?”
“서울로 가겠지?”
“정하지도 않고 떠나요?”
“나야 뭐, 떠돌이 신세니까.”
“일단, 체크아웃부터 해요. 마침 기다리는 사람도 없네요.”
“응. 그래.”
이준기는 프런트에 카드키를 반납하고 직원과 한두 마디를 나눴다.
문아린은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준기가 프런트 직원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다.
평소의 발랄함은 없고, 문아린의 주변으로 차분한 기운이 흐른다.
이준기가 물었다.
“우리, 커피라도 마실까?”
“그럴까요?”
*****
문아린과 헤어지고, 이준기는 택시를 타고 광주송정역에 도착했다.
문아린은 웬일인지 직접 바래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커피숍에서 헤어지고, 문아린은 길드 사무실로, 이준기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에 앉아 이준기는 자료를 정리했다.
우선, 언론사와 길드협회에 보낼 차원문 보고서를 정리했다.
‘위장된 배틀로얄’ 포맷에 대한 내용을 보고서에 포함시킬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포함시켰다.
기밀 사항이라는 단서를 달고, 협회 보고자료에만 포함시켰다.
언젠가는 누설될 내용이겠지만, 당분간은 미확인 루머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편이 낫다.
위장된 배틀로얄 포맷은 국가별로 한 번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인 구원자들이 그 포맷에 대해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금남로 던전에 대한 보고서를 정리하고 나서도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그래서 다음 주에 열릴 차원문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10월 28일 금요일에 열릴 테니까, 일주일 정도가 남았다.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이준기의 뜻대로 공격대를 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일단, 동료가 될만한 구원자들의 목록을 정리해 보았다.
10월 20일 현재 시점, 한국 구원자들의 공식 랭킹은 다음과 같다.
1. 한상태. 32레벨 탱커. 퇴마문 길드 마스터.
2. 전용택. 31레벨 탱커. 신선자 길드 마스터.
3. 박충기. 30레벨 딜러. 문경새재 길드 마스터.
4. 김나리. 28레벨 힐러. 브릴리언트 길드.
5. 김범규. 28레벨 탱커. 브릴리언트 길드 마스터.
6. 이상덕. 27레벨 딜러. 6PM 길드 마스터.
7. 오대영. 27레벨 탱커. 발해의 후예들 길드 임시 마스터.
8. 이준기. 27레벨 딜러. 무소속.
9. 길수연. 27레벨 힐러. 6PM 길드.
10. 강명성. 27레벨 딜러. 코리아 길드 임시 마스터.
생각보다 허약하다.
30레벨 이상 구원자가 겨우 세 명.
해운대 던전에서 권영호가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도톤보리에서 고성하, 이도협이 사망하는 등 고레벨 구원자들의 손실이 커서 그렇다.
묘하게도 권영호, 고성하, 이도협 모두 딜러들이다.
결과적으로 최상위 레벨 딜러가 모자라는 상황.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선 힘을 합치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10위권 상위 랭커들 중에서 협회장 파벌은 이상덕, 오대영, 강명성 등 세 명이다.
반협회장 파벌은 박충기와 전용택 두 명.
그러나 이상덕의 농간에 죽을 뻔한 김나리도 이제는 반협회장 파벌로 봐야 한다.
나머지 넷, 그러니까 한상태, 김범규, 길수연, 이준기는 중립적인 입장.
하지만 협회장 파벌은 이준기를 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아직 언론사에 정식 보고서를 보내지도 않았지만, 이준기는 다시 뉴스 검색 상위에 올랐다.
KTX 객실의 작은 화면으로 단편 뉴스 제목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 이준기, 차원문 또 하나 소멸 시켜.
- 3개월간 방치되었던 차원문, 관계자들 놀라움 표명.
- 한일 연합 공격대, 또다시 던전 공략 성공.
- 두 달 만에 최상위권에 오른 이준기, 그는 누구인가.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이준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전역까지는 비어 있던 이준기의 옆자리에 사람이 앉았다.
다행히도, 커다란 헤드폰을 쓴 그 사람은 이준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옆 사람이나 다른 승객들의 관심을 끌지 않은 것은 다행.
하지만, 카톡은 그렇지 못했다.
기차에 탄 것을 핑계로, 전화는 수신 거부 상태로 해 놓았지만, 카톡 메시지가 날아드는 탓에 전화는 계속해서 진동했다.
- 전용택: 아린 씨한테 말은 들었어. 그래도 그냥 올라가 버리니까 서운하네. 암튼 던전 클리어 축하해.
- 최정윤: 저 최정윤이에요. 기억하세요? 던전 클리어 축하드려요. 어려운 던전이었다는데, 이준기 구원자님은 역시 대단하세요.
- 윤동직: 준기, 축하!
- 김나리: 준기 씨 축하해요. 너무 대스타라서 카톡 보내기도 겁나네요. 언제 또 던전 공략 함께해요.
- 정이채: 저 기억하세요? 발해 길드 정이채예요. 예전에 던전 함께 하셨었는데. 축하드리려고 메시지 보내요.
이준기는 상용구로 저장한 ‘감사합니다’라는 구절을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쏘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한 마디씩을 더했다.
- 전용택: 내가 감사하지. 광주시장이 저녁 사겠다네. 준기 씨도 같이 갔어야 하는 건데.
- 최정윤: 언제 식사라도 함께하실 수 있을까요? 예전에 한턱 쏘셨으니까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
- 윤동직: 올라오면 연락해. 밥이라도 같이 먹자.
- 김나리: 오, 준기 씨의 답변을 받다니 황송 황송. 맛있는 파스타 집 아는데 같이 가실래요? 제가 쏠게요.
- 정이채: 길드 나가셔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제가 밥이라도 한번 사드리고 싶은데.
일단 밥은 먹어야겠고, 정보도 좀 모아야 한다.
특히, 이도협과 고성하가 죽은 뒤 협회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했다.
이준기는 윤동직에게 카톡을 보냈다.
- 형님, 그럼 오늘 점심은 어떠세요? 서울역에 한 시쯤 도착할 것 같아요.
- 좋지. 내가 시간 맞춰서 서울역으로 갈게.
- 서울역에 차를 어떻게 대시려고요. 제가 택시 타고 갈게요. 어디로 갈까요?
- 그럼 그렇게 할까? 뭐 먹고 싶어?
- 조용한 데가 좋겠어요. 얘기 좀 하려고요.
- 그래? 조용한 거라면, 우리 건물 라운지가 최곤데. 길드 사람들밖에 없으니까. 길드 나간 처지라서 좀 불편한가?
- 아뇨. 불편한 건 없어요. 그런데 제가 거기 들어갈 수는 있어요?
- 내가 말해볼게. 잠깐만 기다려봐.
- 네.
종로타워 라운지라면, 이제 발해의 후예들 길드 소유다.
다른 사람들이 없으니 조용히 이야기하기에는 좋은 장소.
단지, 길드 관련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이도협이 길마로 뽑히자마자 일본에 가서 죽었으니, 분위기도 별로일 것 같고.
그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는데, 윤동직의 카톡이 왔다.
- 오케이. 됐다.
- 종로타워로 가요?
- 그래. 1층 로비에서 보자구.
*****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이준기는 서울역을 빠져나왔다.
서문을 나와 일부러 조금 걷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사실, 종로 정도라면 뛰어가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 같아 그냥 택시를 탔다.
종로타워 로비에 윤동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점심 먹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창가 쪽 테이블 두 개에, 모두 해서 다섯 사람 정도가 노닥거리고 있었다.
사람들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이준기는 모자를 눌러 쓴 채로 샐러드 바의 음식만 담아 자리로 왔다.
윤동직이 그걸 보고 말했다.
“역시, 불편한가? 다른 데 갈 걸 그랬나?”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긴 그렇겠군. 준기가 이제 유명세가 있다 보니. 뭐, 스테이크나 그런 거 시켜다 줄까? 요리사가 알아볼까 봐 샐러드 바만 다녀온 거 맞지?”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길드 얘기나 좀 해주세요.”
“하긴, 궁금하겠군.”
윤동직은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이도협 회장이 그렇게 됐으니.”
“그래서, 상황이 어떤가요?”
“생각보다 나쁘진 않아. 이도협보다 오 회장이 낫다는 사람도 많고.”
“임시 회장이잖아요? 선거는요?”
“다음 주 월요일 임시총회에서 아마 추대 형식으로 할걸.”
“이상덕 지지 선언은 계속 유효한 거고요?”
“아마 그렇겠지? 길드 이름으로 한 거니까. 오대영 회장이나 탑픽 길드도 원래 협회장 쪽이었다니까, 뭐.”
“이도협 회장 죽은 거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준기는 아무래도 그게 제일 껄끄럽겠지. 그런데 사실 별로 신경 안 쓰는 분위기야. 구원자라는 게 원래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나가는, 그런 직업이잖아.”
“차원문 관리는 잘 됩니까?”
“그런 것 같아. 별로 달라진 게 없거든. 행정 담당하는 분들이 지원을 잘해주시니까.”
윤동직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므로, 권력을 향한 암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최정윤 과장이 좀 섭섭해 하던데.”
“네?”
“내가 준기 여기 온다고 하니까, 자기한테는 그런 말 안 했다면서 말야. 나중에라도 밥 한 번 꼭 사야겠다고 말 좀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
“알겠습니다.”
“준기는 연애는 안 해?”
“그럴 여유가 어딨어요.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직업이라고.”
“그건 그렇지. 하지만 준기는 인기도 많으니까. 사람을 좀 만나도 되지 않을까?”
“아뇨. 그럴 생각 없습니다.”
윤동직은 잠깐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이름을 기억하려고 그런 모양이었다.
“문···아린이던가? 그 아가씨 예쁘시던데.”
“그렇긴 하죠.”
“헬렌 카자크는? 전번도 땄겠다.”
“하하. 농담도 참.”
“왜? 준기는 영어도 잘하니까 국제 연애도 상관없지 않아?”
“며칠 만에 만나서 왜 이렇게 짓궂은 질문만 하세요.”
“하하. 그랬나? 난 그저 준기가 부러워서 그런 거지.”
“동직이 형님이 뭐가 모자라서 제가 부러워요.”
“뭐가 모자라긴. 나는 인상도 험악하고 가방끈도 짧잖아.”
“구원자라는 스펙이 있잖아요. 다른 어떤 스펙이라도 씹어먹는. 게다가 탱커시고.”
밥을 먹으면서도 눌러 쓴 모자를 벗지 않았고, 윤동직과의 대화도 소곤소곤 작은 소리로 했지만, 창가 쪽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이쪽을 곁눈질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너 알아보는 모양이다. 통성명이라도 해주는 게 어때?”
“제가 왜요. 이제 여기 길드 사람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 아무튼, 나중에 최정윤 과장에게 연락이나 한번 해봐.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아.”
“예전에 절 많이 도와주셨으니, 제가 밥 한번 사긴 해야죠. 그런데, 형님 던전 일정은 없어요?”
“왜? 또 어디 가려고?”
“저야 뭐 용병이니까, 조건만 맞으면 어디라도 가죠.”
“그래? 사실 다음 주에 D급 던전 하나 들어가기는 하는데. 도우미로 말야.”
“도우미요?”
“군소 길드 하나를 합병하게 될 것 같아. 그 길드가 가지고 있던 던전 도우미 가는 거지.”
“아하. 길드 합병은 누구 생각이에요?”
“이상덕 협회장. 대형 길드에 유리하게 협회 정관 개정을 추진 중이야.”
“지금 길드 숫자가 너무 많기는 하죠. 우리보다 구원자 숫자가 세 배도 넘는 일본과 길드 숫자가 비슷하니까요.”
“이상덕 협회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맞는 말이잖아. 작은 길드가 너무 많아서 비효율이 많다고.”
“맞아요. 길드를 좀 정리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합병하는 길드는 어디예요?”
“구룡회라고, 서초구, 수원, 성남 관할이라고 하더라고.”
구룡회. 김창수가 소속되어 있는 길드다.
예전에 이준기와 함께 서울연합을 이끌었던 김창수.
‘발해의 후예들’이 사실상 서울연합 포지션이니까, 김창수가 합류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인가.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형님, 그거 제가 따라가도 될까요? 무료로 서비스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