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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5: 번져가는 불길 (1)
Episode 25: 번져가는 불길 (1)
자정이 지나고도 한참을 끌던 전투는 던전 내 시각으로 새벽 1시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야마시타는 한 시간 이상을 싸운 것이고, 그 이전부터 서로 싸우던 사람들은 그 이상을 싸웠다.
간간히 터지던 원소계 마법의 시각 효과가 점점 뜸해지더니 사라졌다.
조금 뒤에는 소리까지 멈췄다.
‘아직 살아있다.’
난전에 끼어들어 이준기가 날린 유효타는 셋.
패시파이어로 오크를 적중시킨 것이 하나이고, 나머지 둘은 단검으로 야마시타의 등에 먹인 것이다.
적이 쓰러지면, 입힌 대미지에 비례하여 경험치가 들어온다.
12시 반경 경험치가 조금 들어왔다.
동시에 오크 카운터가 하나 하락했다.
오크 카운터가 하락하지 않고 경험치가 들어왔다면, 최적의 결과였을 텐데, 아쉽게 됐다.
야마시타 시게루는 아직 살아있다.
늦기 전에, 추적해야 한다.
잠을 잔 것은 아니지만 바닥에 앉아 충분히 오래 쉬었다.
이준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벌레 소리에 발걸음 소리를 숨기면서 조금 전까지 치열했던 전장 쪽으로 걸었다.
다가갈수록, 피 냄새가 진해졌다.
- 차원문 소멸 조건: 던전 내 오크 전멸. (현재 3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의 앉은키보다 크게 자란 풀들이 무성한 숲.
풀 사이에 큰 대자로 누워 자는 적이라고 해도 찾아내기 어렵다.
그러나 야마시타의 경우는 예외다.
힐링 포션 겨우 네 개를 들고 난전 중에서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다.
맞을 때마다 비명을 질러 몇 번이나 유효타를 맞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중급 힐링 포션 네 개를 모두 마셨다고 해도, 반피 이하일 것이다.
맞을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녀석이니까, 지금도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 위치를 다 드러내면서.
한밤이 되고 풀벌레 소리가 더 시끄러워졌지만, 이준기는 야마시타를 쉽게 찾아냈다.
최대한 억누르고 있기는 하지만, 심한 부상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부르셨습니까.”
전 일본 구원자협회 사무실 남동쪽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구라모토 신스케 협회장의 방.
야마시타 시게루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인사했다.
구라모토 신스케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어서 오세요. 야마시타 시게루 구원자님.”
야마모토 시게루는 자리에 앉으면서 협회장실을 둘러보았다.
방안에는 비싸 보이는 고가구들이 가득했다.
책상 바로 뒤편으로는 샤미센이 장식되어 있다.
이즈 반도 어딘가에 숨어 산다는 괴팍한 성질머리의 장인이 만든 것이라고 들었다.
구라모토 협회장은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취향이 마치 노인 같았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던전 들어가신 지 얼마나 되셨는지.”
“던전이야 2주 전에도 다녀왔습니다. 그때, 33레벨 달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 또 하나 부탁드리면 실례가 될까요?”
“아닙니다. 던전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네네키리마루는 언제든지 피를 마시고 싶어 하니까요.”
“아아, 네네키리마루. 그 아름다운 검. 한 번 보고 싶군요.”
던전 바깥에서는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꺼낼 수가 없으니 보여줄 수가 없다.
구라모토 협회장은 박물관에 있는 네네키리마루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야마시타는 자신의 검과 박물관의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만 두었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가 들어갈 던전은 어디입니까?”
“광주에 있습니다.”
“광주요?”
“한국 광주. 일한 연합 공격대 제2탄. 거기에 야마시타 상이 합류해 주세요.”
“몇 명 규모의 공격대입니까? 일본에서는 누가 참가하나요?”
“일본에서는 야마시타 상뿐입니다. 2인 공격대라서요.”
“2인 공격대요?”
2인 공격대라는 것은 처음 들었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 구원자 한 사람씩, 두 명이 한 팀이 된다는 이야기.
촉이 좋은 야마시타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특수 작전이군요?”
“하하. 역시 야마시타 상.”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목표는···”
“한국인이군요.”
“네. 부탁합니다.”
구라모토 협회장의 심부름을 하는 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몇 차례나, 그의 협회 장악에 걸림돌이 되는 불평분자들을 처리한 적이 있는 야마시타였다.
이번에는 한국인 구원자를 처치한다니, 야마시타는 색다른 도전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놈입니까? 실력은 좀 되나요?”
“좋은 질문이에요. 만만찮은 자입니다. 레벨이 낮기는 하지만.”
“레벨이 낮다고요?”
“쉽게 보면 안 되는 상대입니다. 다케다 상이 그렇게 말했어요.”
“다케다 시게히데 말씀입니까? 전 일본 랭킹 1위 다케다 시게히데?”
“네.”
“도대체 누굽니까, 다케다 상이 만만치 않다고 말한 그 상대가?”
“이준기라는 자입니다. 상태창으로 정보를 보낼 테니, 읽어보세요.”
구라모토 협회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상태창을 조작했다.
야마시타에게 정보가 전송되었다.
상태창을 띄우고 읽으려는데, 구라모토 협회장이 한 마디를 더 했다.
“그놈 때문에 제 체면이 아주 말이 아니에요. 잘 좀 부탁합니다, 야마시타 상.”
그 만남이 있었던 것이 지난주 금요일 오후다.
나름대로 자료 조사를 더 해보려고 했지만, 정보가 많지 않았다.
구원자로 각성한 지 두 달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보가 별로 없다고.
‘너무 쉽게 봤다. 난, 내가 신중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아파 숨을 몰아쉬자, 나무에 기대앉은 자세가 비뚤어졌다.
다시 상반신을 일으키려 하니 반사적으로 기침이 나왔다.
입을 가린 손바닥에 피가 묻어 나왔다.
‘제기랄.’
야마시타는 상태창을 켰다.
구라모토 협회장이 건네주었던 조사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 이준기. 1994년 10월 21일생. 남자. 출생지 서울.
- 26레벨. 소속 길드 없음.
- 2021년 8월 29일 각성. 각성 직후부터 던전 경험을 쌓은 것으로 추정됨. 길드 충무공 (현 발해의 후예들) 가입 당시 6레벨. 부산 해운대 던전 공격대 15인 중 하나로 크게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냄. 서울 종로에 생성된 세계 최초의 FFA 포맷 던전에서 살아나왔음.
- 일한 연합 공격대가 공략하기로 했던 오사카 도톤보리 던전에 무단 진입, 억지로 공격대의 일원이 됨. 도톤보리 던전을 클리어하고 생환한 4명의 구원자 중 한 명.
- 다케다 시게히데의 메모: 상황 판단이 빠르고 변칙적인 전투에 능함. 던전 및 몬스터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임. 구원자를 죽이는 데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음. 숏소드와 단검의 이도류를 사용.
다시 읽어 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다.
아니, 어쩌면 다케다 시게히데의 메모 중 한 줄을 유의 깊게 봤어야 했다.
던전과 몬스터에 대한 폭넓은 지식.
‘이 던전에는 준비 오두막이 없다는 것, 아무 데나 흩어져서 시작한다는 것도 알았겠지. 그래서 내가 5분 먼저 진입하겠다는 것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야마시타는 다시 입을 틀어막고 피를 토했다.
난전에서는 어떻게든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은 어렵다.
힐링 포션 몇 개만 더 있었어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텐데.
준비 오두막에서 물자를 보충하려고 생각한 안이함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구원자를 죽이는 데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음.’
과연.
살려 달라고 빌어봤자 소용없겠지.
다케다는 어떻게 살아나온 걸까.
피를 흘리면서 컴컴한 어둠을 바라보고 있자니, 점점 졸음이 몰려온다.
*****
2022년 2월 29일 목포.
이제는 표준 형식이 된 길드 전쟁 포맷에 따라, 한일 양국의 구원자 20명이 목포의 D급 던전에 진입했었다.
한일 전쟁의 네 번째 전투였다.
한국팀 평균 레벨은 39레벨. 탱커는 41레벨의 이준기.
일본팀 평균 레벨은 40레벨. 탱커는 43레벨의 마에다 야스히로.
당시 일본팀 소속 에이스 댐딜러는 42레벨의 야마시타 시게루였다.
그의 전설급 무기, 네네카리마루가 한국팀 구원자들을 연이어 무장해제 시켰다.
탱커 이준기에게도 큰 어려움을 안겼다.
전설급 방패, ‘파울리의 원반’이 계속해서 이준기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스킬 ‘빛의 방패’를 발동해서 탱킹을 이어갔지만, 상당한 페널티를 안고 방어에 나서야 했다.
그랬던 그가, 넉 달이나 미리 광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야마시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는 피를 토했다.
피를 토하면서 기침을 해서 자세가 흐트러지면, 고통에 못 이겨 신음을 내기도 했다.
결국 그 소리가 다른 적을 끌어들였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어둠 속에서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낮게 숨죽인, 그러나 오크 족 특유의 꽥꽥거리는 목소리로 잠깐의 대화가 오고 갔다.
허공을 가르는 둔기의 소리, 이어서 그것이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가 났다.
이준기의 상태창에 경험치 획득 메시지가 떴다.
양손에 단검을 쥔 이준기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
- 10월 20일 0시 59분.
던전을 정리하고 나와서 확인한 시간이다.
던전 안쪽에서는 새벽 6시 59분이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에 마지막 생존자를 처리하고 이준기는 던전을 클리어했다.
새벽이 밝아오자, 이준기는 하나 남은 적을 색출하러 나섰다.
생각보다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넓은 숲속에 단둘만 있었으니 찾기가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차원문은 정리해야 했다.
몬스터 사냥이라고 생각하고, 칼을 뽑아 들고 덤벼들었다.
뭔가 아주 복잡한 표정이 오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실력이 아니라 요행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이 던전에 대해 알고 들어온 이준기가 아니었다면, 던전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
생명에 우선순위가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에는 분명히 우선순위가 있다.
어디로 들어온 어느 나라의 구원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준기의 사명은 한국 광주에 열려 있는 차원문을 닫는 것이다.
‘안 됐지만, 남의 사정을 봐줄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이준기의 강습에 오크는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모습은 라틴계 남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도 점차 윤곽선이 흐려지면서 사라져갔다.
작은 키에 왜소한 남자였다.
구원자로 각성하기 전에는 전투 같은 걸 해볼 일이 없었으리라.
- 던전 내부를 배회하던 오크들이 전멸하였습니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1시간 내에 차원문이 소멸합니다.
-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상자에서는 에픽 등급 장갑이 나왔다.
필요하던 부위다.
그런데도 왠지 기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피곤했다.
아이템을 챙기고, 이준기는 바깥으로 나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차원문 밖에 기자라고는 없었다.
아무리 톱뉴스라고 해도,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무작정 대기를 시키는 언론사는 없었다.
그러나,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이준기는 차원문 담당 중령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리를 떴다.
“함께 들어가셨던 일본 분은···?”
“교전 중에 사망했습니다.”
“그렇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기는 했지만, 좀 늦은 퇴근이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다.
그저 긴 하루였다고 생각하면 될 일.
택시를 불러 호텔로 돌아왔다.
문밖에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안내문을 걸어 두고, 휴대전화도 껐다.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자리에 누웠다.
‘이번 주는 이 정도로 끝내고 좀 쉬어야지. 다음 주에는 드디어 그 차원문이 열린다.’
많은 일을 했다.
일본인 고등학생들이 몬스터들에게 살해당하는 ‘세종고 사건’을 원천 봉쇄했다.
내정 간섭 대신, 일본 협회는 한국 협회와 공동 프로젝트라는 카드를 들고나왔지만, 이준기는 그것조차도 분쇄했다.
두 나라의 협회장들이 사주한 것이 틀림없는 자객들이 이준기를 쫓아왔다.
차원문 바깥에서도, 차원문 안쪽에서도.
그러나 이준기는 그들 역시 피하고 살아남았다.
이준기로 인해, 많은 사건들이 원래의 역사와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다음 주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미시적으로 보면 조금 다른 사건들이 발생하겠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같은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될 것이다.
원래와는 다른 사람들이 배역을 맡게 되겠지만, 같은 각본이 공연될 뿐이다.
‘일단, 모자라는 잠을 보충해두자. 뭐든지 체력이 받쳐줘야 하니까.’
길냥이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고양이들의 다양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