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67화 (6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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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4: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마라 (2)

Episode 24: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마라 (2)

배틀로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쉬는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해가 졌지만, 이준기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종각 던전에서는 같은 편인 문아린이 있었기 때문에 교대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던전에서 같은 편이라면 야마시타 시게루.

이준기에게 가장 위험한 적이다.

‘정상적인 던전이라면 밤에는 쉬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이 던전의 본질을 깨달은 자들이라면, 밤이야말로 최상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겠지.’

쓰러진 몬스터가 사람의 모습으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자들, 그중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던전을 클리어하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다른 구원자들의 빈틈을 노릴 터.

밤중에 움직일 이유로는 충분하다.

던전 안의 하늘은 실제 지구의 하늘을 투사해 놓은 모습이다.

차원문을 만들어낼 정도의 과학기술이라면, 지구의 하늘을 시뮬레이션하는 것 정도야 간단한 일.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이준기는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달의 위상을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달의 밝기에 대해 미리 파악해 놓아야, 밤중에 던전에서 어떻게 처신할지 계획하기 좋기 때문이다.

2020년 10월 19일.

나온 지 사흘밖에 되지 않은 초승달이 애처롭게 떠 있다.

‘월몰은 오후 9시 정도. 아직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니라는 이야기.’

상태창의 시계는 여전히 한국 시간을 표시하고 있다.

평소의 던전이라면 시간이 이어지므로 그 시계를 그냥 쓰면 된다.

하지만 이 던전은 세계 각지의 차원문에서 이어지는 던전이라서 다른 시간대를 사용한다.

6시 5분에 진입했을 때 이미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있었으므로, 한국 표준시보다 대여섯 시간이 이른 셈이다.

이준기라고 해도, 태양의 위치를 보고 시각을 추정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달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대략적으로 던전 안의 시간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상태창에 나타나는 현재 시각은 오후 2시 40분.

앞으로 20분 정도가 지나고 초승달이 서쪽 하늘로 지면, 시차는 정확하게 6시간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 정보를 가지고 야마시타를 기습할 생각이다.

*****

초승달이 지는 것을 확인하고 이준기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추측했던 대로, 한국과 던전 안의 시차는 여섯 시간.

상태창 시계로 6시가 되면 던전 내 시각은 자정, 즉 0시다.

소모된 스킬 책들이 완전히 재생되는 시기.

따라서 그 10분 전 정도에 전투를 개시하면 스킬을 두 배로 쓸 수 있다.

야마시타는 그 정보를 모를 테니, 여유롭게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야마시타와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유지하면서, 이준기는 계속해서 자리를 옮겼다.

예상대로, 야마시타는 해가 뜨기 전에 결판을 내려는 모양이었다.

야마시타가 식사를 하자, 이준기도 식사를 했다.

야마시타가 움직이면, 이준기도 그의 동선을 확인하면서 따라 움직였다.

이준기를 암살하라는 미션, 그걸 야마시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레벨 차이를 보고 그냥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데도 5분 먼저 차원문에 입장하겠다고 했다면, 야마시타는 대단히 신중한 성격이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임무 완수를 최우선으로 하는 그런 성격.

야마시타는 나무 밑에 앉아 잠시 쉬면서 자신의 무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검날이 별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초승달조차 져버린 칠흑 같은 밤.

별빛만으로도, 네네키리마루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네네키리마루.

- 양손검. 전설 등급.

- 50~70의 물리 대미지. 공격속도 7초.

- 착용 효과: 마력 저항 +50.

- 발동 효과: 유효 타격 시 50%의 확률로 적을 무장해제합니다. 무장해제 상태는 10초간 지속됩니다.

네네키리마루, 대단히 훌륭한 무기다.

엄청난 대미지, 마력 저항을 무려 50이나 높여주는 스탯 보너스, 거기에 사기적인 발동 효과까지.

유일한 단점은 역시 매우 느린 공격속도다.

상대방을 무장해제 해버리는 발동 효과는 대단히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솔로잉시에는 의외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장해제 상태가 지속되는 10초 동안, 네네키리마루는 겨우 한 방을 더 때릴 수 있을 뿐이다.

파티 플레이라면, 무장해제 상태의 적을 파티원들이 두들겨 패겠지만.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는지, 야마시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이 지고, 오직 별빛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 시각에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야마시타는 눈을 감고 귀에 신경을 집중하는 듯하다.

이준기 역시, 최대한 느리게 숨을 쉬면서 소리를 죽였다.

단조로운 풀벌레 소리에 섞여, 쇠붙이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정말 희미한 소리.

숨소리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준기조차도 놓쳤을 정도로 작은 소리.

야마시타도 그걸 감지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실려 오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몇 초 동안 그걸 지켜보던 이준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 현재 시각 오후 5시 29분.

던전 내 시간대로는, 자정까지 31분 남았다.

*****

풀벌레 소리와 풀숲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 외에는 고요한 한밤.

야마시타와 이준기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도착하고 보니, 과연 그 멀리까지 소리가 전해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 그룹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여러 무리가 한 장소에서 그야말로 데스매치를 벌이고 있었다.

달도 없는 한밤, 시야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서로 뒤엉켜 싸우다 보니 이건 한 팀이라고 해서 유리할 것도 없었다.

난전에 뛰어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야마시타는 거리를 두고 나무 뒤에 숨어서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화염구가 터졌다.

갑자기 거대한 불덩어리가 주변을 비추자, 나무 뒤에 서 있던 야마시타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크 중 하나가 야마시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싸우던 몇몇이 서로에게서 떨어지면서 야마시타를 향해 움직였다.

“제기랄.”

야마시타는 그렇게 내뱉으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에 거대한 양손검, 네네키리마루의 형체가 드러났다.

그는 다가오는 오크들을 향해 긴 검날을 휘둘렀다.

*****

수풀 뒤에 자세를 낮게 하고 숨어 있던 이준기는 발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행동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5시 49분.’

이준기가 직접 야마시타를 처단해야 할 이유도 없다.

난전 중에 사망해준다면, 직접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어진다.

그러나, 이준기를 목표로 정하고 들어온 야마시타다.

현재 이 던전에 진입해 온 다른 구원자들에 비해 레벨이 월등히 높다.

게다가 네네키리마루라는 전설템을 휘두르고 있다.

서로 엉켜서 싸우는 근접전.

화염구와 같이 시전 시간이 긴 스킬을 쓸 여유는 없다.

아까의 화염구는 정말 이례적인 것.

상대적으로 덜 화려한 시각효과를 가진, 마나 폭발과 같은 스킬은 간간히 터진다.

그럴 때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빛에 전투의 스냅샷이 전달되고는 한다.

‘바로 앞에서 터지는 저런 빛들은 야간 시야에 큰 지장을 준다. 멀리서 쳐다보고 있으니 다행이지.’

이준기의 목표는 야마시타 시게루, 단 한 사람이다.

네네키리마루와 같이 화려한 무기의 단점은 역시 시선을 끈다는 점.

예컨대 3명이 서로를 적대하는 상황이 될 경우, 3미터가 넘는 무기를 쥔 야마시타가 두 명의 협공을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이준기는 풀숲에서 뛰어나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야마시타!”

*****

이준기가 휘두른 양손검, 패시파이어가 야마시타의 네네키리마루에 막혔다.

유효타를 가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지금의 난전에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여러 명의 적을 상대해서 이길 수는 없다.

야마시타에게 큰 타격을 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적들의 시선을 야마시타에게 집중시키는 공격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몬스터끼리 치고받는 이상한 광경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조금 전의 상황도 마찬가지.

가장 위협적으로 보이는 무기, 네네키리마루를 최대한 부각시켜야 한다.

사람이 몬스터로 보이듯이, 무기도 모양이 바뀌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크기는 그대로 반영된다.

비록 변형은 되더라도, 야마시타의 네네키리마루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큰 무기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양손검 패시파이어를 거둬들이고, 이준기는 뒤로 점프했다.

이준기를 향해 돌아선 야마시타의 등을 향해, 몇몇이 공격해 들어왔다.

긴 손잡이를 이용해서 검날을 뒤로 돌리는 야마시타.

날아드는 검날 중 하나를 튕겨냈지만, 다른 하나에 왼쪽 어깨를 베였다.

“컥!”

야마시타가 자세를 바로 세우고 길가 쪽의 적들에게 네네키리마루를 마구 휘둘러댔다.

공격해 들어오던 적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물러서는 적들에게 또 다른 적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야마시타가 등 뒤 어딘가로 사라진 이준기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우린 한 편이야!”

씨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다니, 상황이 절박하기는 한 모양이다.

조용히 있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은 야마시타의 심기를 흩트려 놓는 것이 중요하다.

이준기는 야마시타의 등 뒤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뛰면서 대답했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 다 알고 있다.”

“뭐··· 뭘 알고 있다는 거야? 당신, 미쳤어?”

“날 죽이려고 한국에까지 오다니, 감탄했다. 하지만 던전을 잘못 골랐어. 그렇지?”

“무··· 무슨 소리냐? 뭐라는 거야?”

큰 소리를 내다 보니, 이준기에게도 적들이 달려왔다.

이준기는 패시파이어를 휘둘러 한 명을 쓰러뜨리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뛰었다.

패시파이어에 맞아 느려진 적이 어둠 속으로 후퇴하는 것이 보였다.

“그건 오해야! 빨리 나를 구해라! 나는 네 편이다!”

야마시타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외쳤다.

오크들과 싸우면서 이준기까지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그는 자기 위치를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큰 소리를 냈다.

“이준기 상! 도와줘!”

조금 전까지는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무기를 휘둘러대던 싸움.

이준기가 뛰어 달아나자 다른 적들 몇몇도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발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이준기는 마음껏 ‘점멸’을 써서 적들 사이사이로 점프를 하며 움직였다.

이제 1분만 지나면 던전 내 시각으로 0시.

스킬 책들이 리젠된다.

이준기가 외쳤다.

“오해라고?”

야마시타가 대답했다.

“그래, 오해야! 도대체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지?”

야마시타도 아까 그 위치에서 몇 발자국 움직인 모양이다.

목소리로 야마시타의 위치를 파악한 이준기는 ‘점멸’을 써서 그의 바로 뒤로 점프했다.

“크헉!”

무기를 바꿔 쥔 이준기.

양손에 쥔 그의 단검이 야마시타의 등을 베고 지나갔다.

이준기는 발을 멈추지 않고 공격과 동시에 자리를 이탈했다.

야마시타가 고통을 무릅쓰고 커다란 양손검을 뒤로 돌렸지만, 이미 이준기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준기! 이··· 이 배신자!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쿨럭!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냐!”

이준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한 타격을 가했다.

나머지는 다른 적들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준기는 두 차례 더 점멸을 해서 전장 바깥으로 멀리 벗어났다.

발을 멈추고 숨도 억눌러 가며 멀리에서 들려오는 전장의 소란함에 귀를 기울였다.

야마시타는 이제 이성을 잃은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욕설을 해대고 있었다.

“제기랄, 이준기! 너만은··· 너만은!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 크억!”

이준기는 상태창을 열었다.

- 차원문 소멸 조건: 던전 내 오크 전멸. (현재 9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아직 숨이 붙어있군. 하지만 오래는 못 버티겠지.’

야마시타가 가지고 있던 힐링 포션은 모두 네 개.

던전 입장 후 자판기에서 보충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자들의 일터, 던전에서는 사소한 실수가 죽음을 부른다.

모르는 포맷의 던전에 진입할 때는, 그만큼 더 준비를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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