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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4: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마라 (1)
Episode 24: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마라 (1)
‘오두막 바깥 어딘가에 숨어서 기습하려는 생각이겠지만, 번지수가 틀렸다.’
기자들은 5분의 시간이라도 더 이준기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 했지만, 이준기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전용택, 문아린, 김나리가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표정으로 그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먼저, 전용택이 말했다.
“준기 씨, 괜찮겠어, 정말?”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은 김나리.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세요? 5분 먼저 들어가 있겠다는 거, 누가 봐도 뻔한 수작이잖아요?”
“저도 나름대로 조사를 좀 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결론이에요.”
이번에는 문아린.
“정말? 안심해도 되는 거야? 조사는 어떻게 한 건데?”
“일본에 가서 외국인 구원자들 전화번호를 많이 받아왔잖아. 그 사람들한테 물어봤지.”
“헬렌 카자크한테?”
“응. 헬렌 카자크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평소에는 아침을 먹지 않는 이준기였지만, 새벽 찬 바람을 맞으며 그는 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차원문 안으로 들어가면, 당분간 단맛과는 안녕이다.
‘이 정도 호사는, 예외로 인정해줘야지.’
이준기는 상태창을 열었다.
조금 전 야마시타와 함께 나란히 앉아 기자회견을 할 때, 그는 이미 ‘이르헬의 눈’을 발동했다.
그때 얻어낸 정보를 다시 살펴보았다.
- 33레벨.
- 전문화: 바람 11, 흙 22.
- 힘 50. 민첩 60. 체력 70. 정신력 10. 물리 저항 30. 마력 저항 30.
- 성흔: 리사이클러.
- 획득 스킬: 모래폭풍, 공성타, 흙의 정령 소환.
- 인벤토리: 네네키리마루, 인챈티드 롱보우, 강화 화살 20개, 오니무샤의 투구, 칼바람 흉갑, 대련용 다리보호구, 용가죽 장갑, 닌자의 발싸개, 중급 힐링 포션 4개, 기본 식량 팩 3개.
스탯 합계로 추정해 보건대, 구원자 살해 전력이 있다.
흙의 정령 소환이라는 상당히 희귀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가장 흔한 부류의 성흔이지만, 성흔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사용한 스킬 책을 낮은 확률로 돌려받는 성흔. 분명히 도움이 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무기다.
네네키리마루.
거의 창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리치를 가진 양손검이다.
‘한일 전쟁 때도, 놈의 무기가 상당히 애먹였었지.’
*****
기억하던 대로다.
차원문에 들어선 이준기의 눈앞에 숲이 펼쳐졌다.
FFA 포맷 던전과 마찬가지로, 차원문을 건너온 사람들은 무작위의 위치에 뿌려졌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준기는 야마시타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오두막 근처에서 기습을 준비하려고 했겠지만, 그럴 여지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FFA 포맷은 전 세계에서 한국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고, 아직 몇 개 되지도 않는다.
일본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야마시타는 상황 적응부터 애를 먹고 있을 것이다.
이준기는 상태창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수의 적을 해치워야 하는가는 던전 입장 이후에 정해진다.
던전이 열려 있는 것은 한 시간 동안.
그 한 시간이 끝나야 목표치가 정확하게 표시된다.
- 차원문 고유번호 09055. 랭크 C. ‘배회하는 오크들’.
- 차원문 입장 조건: 최대 입장 인원 2명.
- 차원문 소멸 조건: 오크 사냥. (52분 후에 사냥 목표치가 공개됩니다.)
- 차원문 소멸 보상: 에픽 등급 이상.
- 퇴각 페널티: 1레벨 강등.
- 특이사항: 본 차원문 입장은 특정 시간대에만 가능합니다. 현재 입장이 가능하며, 52분 후에 입구가 폐쇄됩니다.
FFA 포맷과 마찬가지로, 시작 전에 소모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 역시 52분 후에나 가능하다.
소모품 구입은 자판기가 아니라 상태창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해도 상관없다.
이준기는 기다리는 동안 던전 내부를 정찰하기로 했다.
던전 내부 지형은 일반적인 숲 스타일.
사람 정도는 쉽게 숨을 수 있는 커다란 너비의 나무들이 많이 있고, 제한된 구역에는 길이나 개활지도 존재하는 그런 형태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대상은 없다.
오직, 싸움만이 가능한 공간.
한국 시각으로 오전 7시가 되어야 목표 킬 수가 정해지겠지만, 그 전이라도 ‘몬스터’를 만나면 싸움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준기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움직였다.
일반적인 던전은 차원문 바깥의 세상과 시간이 연결된다.
아침 6시에 차원문을 통과해 들어왔다면, 던전 안쪽에서도 아침 6시다.
그러나 이곳은 다르다.
대낮이다.
평소와는 달리,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새벽이 대낮이 됐다면, 뭔가 의심해봐야 한다.
예전의 이준기 역시 그랬다.
이미 FFA 포맷의 던전을 경험한 다음이기도 해서, 던전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할 것 같은 경우의 수를 모두 생각해 봤다.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이 전개되었었지.’
그 뜻밖의 상황, 그걸 마주한다면 야마시타는 아무래도 동요할 가능성이 크다.
그 빈틈을 노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야마시타는 33레벨이나 되는 구원자.
전투 경험도 많고, 구원자 살해 전적도 있다.
웬만한 상황에는 놀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두고 봐야겠지만.’
이준기의 귓속으로 가벼운 종소리가 울렸다.
상태창의 알림음.
한 시간이 경과해서, 던전 목표가 정해진 것이다.
이준기는 나무줄기에 기대고 앉아 상태창을 켰다.
- 차원문 소멸 조건: 던전 내 오크 전멸. (현재 26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
오크를 사냥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이준기에게 최우선 사냥 대상은 바로 야마시타 시게루.
그건 야마시타도 마찬가지다.
‘그 거대한 검을 뽑아 들고 다니지는 않겠지. 하지만 오크에 비하면 야마시타는 이 숲에서 눈에 띄는 존재.’
멀리서 들려오는 금속성 소음을 따라 이준기는 몸을 숨기고 움직였다.
오크 두 무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2대2 상황.
늘 보던 그 뻐드렁니나 녹색 피부는 물론, 도끼나 검을 무식하게 힘으로 찍어 누르고 휘두르는 모습이 영락없이 오크다.
한참을 끌던 싸움은, 한쪽이 조금씩 우세를 쌓아가면서 마무리되었다.
2대2의 상황이 2대1로 바뀌고, 얼마 못 가 홀로 싸우던 오크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예상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승리한 오크 둘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정말로 역겨운 소리.
하지만 이준기는 알고 있다.
그들이 지금 느끼는 충격과 공포, 그리고 곧이어 찾아올 정신적 황폐함까지도 모두.
쓰러진 오크 둘의 사체가 서서히 희미해지면서 사라졌다.
이 던전 포맷은 루팅을 허용하지 않는다.
던전을 클리어하면 보상 상자가 나오기는 하겠지만, 오크 사냥을 통해 얻는 부수입은 없는 셈이다.
그것도 고려에 넣어야 할 부분.
몬스터 사체에서 화살이라도 보충해서 쓸 생각이었다면, 크나큰 계산 착오다.
물품 보충이 가능한 것은 하루 한 번 주어지는 소모품 구입 시간에, 상태창을 통해서 하는 것뿐이다.
싸움에서 승리한 오크 두 마리가 큰소리를 꽥꽥 질러대는 통에, 다른 몬스터들이 주변에 나타났다.
또 다른 오크 무리들.
너무 많은 오크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자,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지 못하고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중과부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무리는 왔던 곳으로 다시 달아났다.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일부는 서로를 향해 도끼를 들고 덤벼들었다.
이준기는 상태창을 켜고 상황을 확인했다.
- 차원문 소멸 조건: 던전 내 오크 전멸. (현재 19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어차피 상태창을 통해 상황은 파악할 수 있다. 야마시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준기는 싸우는 오크 무리를 뒤로하고 숲 건너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야마시타의 무기, 네네키리마루의 검날이 오후의 강렬한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
역시, 야마시타 시게루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오크 둘을 상대로 이기고도 별 부상이 없다는 점도 그렇지만,
그 둘이 쓰러지고 나서 인간으로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고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그렇다.
어쩌면 소현배나 김형채보다도 더 많은 구원자들을 죽여온 자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 던전 포맷의 핵심은 바로 위장된 배틀로얄이다.
광주 금남로의 차원문으로 진입한 사람들에게 다른 구원자들은 ‘오크’로 보인다.
그래서 차원문 소멸 조건이 오크 전멸로 나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입장한 구원자들에게는 이준기나 야마시타가 몬스터로 보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하와이의 차원문은 소멸 조건이 홉고블린 전멸이었을 수 있다.
그들에게, 다른 차원문을 통해 들어온 구원자들은 홉고블린의 모습으로 보인다.
‘오늘 시작 시점에서 오크 숫자는 26마리였다. 즉, 우리 말고도 13팀이 더 진입해 왔다는 이야기.’
다른 모든 구원자들이 전멸할 때까지 살아남는 팀은 던전을 클리어하게 된다.
그들이 들어왔던 차원문 단 한 곳만이 소멸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팀들의 차원문은 게속하여 열려 있는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광주 금남로의 차원문이 그렇듯이.
동료를 몬스터로 보이게 하여, 서로 죽이게 만드는 사악한 흑마법.
게임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흔한 전개일 것이다.
하지만, 게임 속의 장기 말에게 그 상황은 충격적이다.
살인이 처음인 사람이라면,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의 충격을 받는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가 살던 세계는 그렇게 평화로운 곳이었으니까.
차원문이라는 ‘게임’을 지구별에 던진 존재들에게, 이 포맷은 아마도 성공작일 것이다.
그들이 차원문을 통해 관람하는 것이 스포츠라면, 검투사들끼리의 대결이야말로 궁극의 엔터테인먼트다.
검투사가 야생동물들을 학살하는 걸 구경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재미.
그래서 그들은 구원자들이 거리낌 없이 서로를 살육하기를 원한다.
그런 구원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 배틀로얄.
FFA 포맷의 던전과 이 유형의 던전에서 살아남는 구원자들은 살인에 대해 조금씩 무감각해져 간다.
그것이 저들이 노리는 전개.
그래서 구원자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시뮬레이션의 방향이다.
‘그들에게 조슈아 테일러는 최상의 엔터테이너라는 것이지.’
그들, 관람자들에게, 야마시타 시게루라는 자 역시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자신이 쓰러뜨린 오크가 눈앞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데 겨우 놀란 표정 한 번이라니.
가볍게 놀라는 감탄사조차 그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 차원문 소멸 조건: 던전 내 오크 전멸. (현재 14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루팅조차 없는 이 던전에서,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구원자들을 학살하여 얻는 것은 경험치뿐이다.
이준기는 배틀로얄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
야마시타 시게루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몬스터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그 시체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생각보다 빠른 전개지만, 아직 16명이 살아 있다.’
야마시타 시게루가 건너편의 풀숲으로 몸을 숨기는 것을 이준기는 지켜보았다.
야마시타와 시끌벅적한 싸움을 벌여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것이 없다.
오크가 아니라 사람, 즉 구원자들이다.
몬스터보다 훨씬 더 똑똑한 존재들이다.
*****
전쟁터에 떨어진 일개 병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살아남는 것뿐이다.
던전 안을 배회하는 몬스터들이 사실은 다른 나라의 차원문에서 들어온 구원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차원문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규칙에 따라 클리어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차원문 소멸 조건은 구원자들의 사망이다.
수많은 구원자들을 죽여온 이준기지만,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자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최소한의 살인만으로 차원문을 소멸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차원문을 소멸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살인은 과연 정당한가?
저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 죽이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일인가?
적극적인 살인과 소극적인 살인은 과연 다른가?
손을 피로 물들이고 잠자리에 드는 날이면, 언제나 그런 생각들이 그를 덮쳐왔다.
언제나 쫓기는 꿈을 꾸었다.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는 날도 많았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수많은 질문들을 스스로 던져보았지만, 답은 없다.
살아갈 뿐이다.
육식동물에게 생명을 해친다는 비난을 퍼부을 수 없듯이.
규칙에 따라 던전을 클리어하는 구원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들은 차원문 소멸이라는 공익에 봉사하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생각해봐도, 입안의 쓴맛은 사라지지 않는다.
머릿속도 절대로 개운해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히기 전의 시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